여행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매화가 상징하는 것은 다양하다. 임금, 신선, 선각 정신, 절사, 임, 달, 백설, 평화, 화해, 행운, 건강 등 이루 열거하기도 힘들다. 이 가운데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오롯한 정신. 선비는 매화를 통해 얼음골처럼 갈라져 투박해 보이는 줄기에서 싹을 띄우는 정신과 봄의 기운을 먼저 알아차리고, 우주만물에 봄을 알리는 선각자적인 정신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다른 꽃들보다 앞서 피워 올린 꽃향기를 맡으며 매화 정신의 힘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오롯하게 피워낸 꽃향기로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그 부드러운 힘을 접하면 누구라도 매화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터이니 말이다. 한여름의 더위와 폭우, 한겨울의 추위와 눈보라를 모두 받아들이고 피워낸 매화 한 송이. 선비들은 이 꽃을 보며 세속의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숱한 유혹에 미혹되지 않으며, 성취감에 들떠 방일하지 않겠다던 자신의 각오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매화는 다른 꽃나무보다 일찍 꽃을 피워 봄을 알리는 ‘나무들의 어머니 나무’. 고결하고 기품 있는 매화로 사랑받는 경남 산청 단속사지 정당매는 역사성에서, 전남 순천 선암사 고매는 풍경에서, 전남 구례 화엄사와 전남 백양사의 고매는 홀로 있는 멋스러움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정원이 많은 담양에는 식영정, 독수정, 소쇄원 제월당 뒤 굴뚝 옆에 매화나무가 있다. 사진은 용인 민속촌 홍매.
탐매 여행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서식하는 매화는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 시기에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말기 당나라로 유학 갔던 최광유의 시, 고려시대에 그려진 사군자 그림과 시 등이 전해지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접하게 되는 매화 사랑에 관한 많은 글과 그림은 조선시대에 창 작된 것들. 매화를 사랑했던 선비들은 어느 외진 곳에 희귀한 매화나무가 있고, 그 나무에서 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가는 여정이 아무리 멀고 험하더라도 서슴지 않고 길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매화가 처음 피기 시작하는 모습을 찾아 산길로 떠나는 탐매 여행을 시작한 원조는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698~740)이라고 한다. 그는 매화가 필 때면 장안 동쪽에 있는 심산으로 건너가 처음 핀 꽃을 보며 오래도록 감상했다고 전해진다. 맹호연의 탐매 여행은 ‘파교심매?橋尋梅’라는 고사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가 나귀를 타고 파교?橋라는 다리를 건너 심산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맹호연이 나귀를 타고 탐매 여행을 떠나는 고사는 송나라 이후 많은 묵객(먹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작품 소재가 되었고,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서는 탐매 여행의 시초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 서유구(1764~1845)가 쓴 책에 따르면 ‘납전상매臘前賞梅’와 ‘유회락流會樂’과 같은 매화 감상 모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납전상매’는 동지를 전후해 ‘화분에서 키운 매화盆梅’가 꽃을 피우면 술과 고기 안주를 마련해 벗들을 불러 함께 완상하는 놀이이고, ‘유회락’은 소매小梅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12월이면 매화 감상 모임을 만들어 글을 짓거나 시를 읊는 놀이. 소수의 선비들이 참여하는 모임이었다는 점에서 아녀자들이 참여하는 삼월삼짇날을 전후해 열리는 꽃놀이와 차별된다.
2~3월에 꽃이 피는 매화는 꽃 색깔이 흰 백매, 붉은색인 홍매로 나뉜다. 또한 꽃잎의 경우 낱장으로 된 꽃과 겹쳐 있는 꽃으로 나눠진다. 춘삼월이면 매화 사진을 찍기 위한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통도사. 영각 앞의 백매화는 꽃송이가 예쁘고 맵시가 빼어나 어느 각도에서 누가 찍어도 결과물이 훌륭하다. 사진은 통도사 불이문의 백매.
조선시대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도 매화 감상을 즐겼다. 그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죽란시사竹欄詩社’는 화분에 심은 매화가 망울을 터뜨리면 시회詩會를 열었다. 모두 열다섯 명으로 구성되었던 ‘죽란시사’는 서로 가까운 지방에 살면서 정례적으로 모여 시회를 열고 친목을 도모했다고 한다. 이 모임은 살구꽃이 필 때, 복숭아꽃이 필 때, 한여름에 참외가 익을 때, 초가을 서지西池에서 연꽃이 필 때, 국화가 필 때, 겨울철 큰 눈이 내릴 때 각각 한 번씩 모이고, 세모에 분매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더 모였다. 모일 때마다 술, 안주, 붓, 벼루 등을 지참하는 것은 필수. 그리고 회원들이 모이면 술을 마시며 시를 읊는 데 ‘이바지’하는 것을 규정으로 정해두어 풍류를 즐겼다.
현대인으로 매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 LG그룹 구자경 회장, 학고재 우찬규 대표, 고 박종화 작가 등이 유명하다. 특히 박종화 작가는 안방 문갑 위에 올려놓은 화분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 이불 위로 떨어진 꽃잎 때문에 이불을 걷지 못할 정도로 매화 사랑이 극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더 나아가 친구를 불러 매화 향이 밴 이불을 보여주고는 했다.
마치 하나의 마을처럼, 무리지어 피어 있는 매화를 보려면 농원으로 가는 것이 좋다. 전남 광양시 다압면의 청매실농원, 보해양조에서 20여만 평 부지에 꾸며놓은 전남 해남군의 보해매실농원 등이 대표적이다. 벚꽃 도시로 유명한 김해에도 매화 군락지가 있다. 아름드리 매화나무가 길 양쪽으로 사열해 있는 경남 김해시 김해공고 교정도 아름답다. 사진은 전남 광양시 다압면에 핀 매화.
대표적인 전국의 매화 명소 7
전남 순천 선암사 백제 성왕 7년, 아도화상이 세운 절로, 이곳에는 해우소 옆에 있는 매화를 포함해 수십 그루의 매화가 있다. 우리나라 매정梅庭(정원의 매화)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수령이 2백~6백 년인 묵은 매화가 무리 지어 있는 뒤쪽, 무우전無憂殿 돌담길이 으뜸. 백매화와 홍매화가 어울려 핀 모습이 환상적이다. 팔상전 오른쪽 뒤편에 있는 6백20년 된 백매白梅는 높이가 11m, 수관(줄기와 잎이 많이 달려 있는 줄기의 윗부분) 폭이 15.5m, 나무 밑둥치의 지름이 78cm에 이르는 노매다. 때 맞추어 찾아가면 그윽한 매화 향기의 진수를 접할 수 있다.
강원 강릉 오죽헌 현존하는 주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진 오죽헌의 왼쪽 뒤편에 수령 6백 년으로 추정되는 홍매紅梅 한 그루가 있다. 일명 ‘율곡매’라고도 하는 이 매화는 높이가 약 9m, 수관 폭이 6m, 나무 밑둥치의 지름이 약 68cm인 고매. 한 줄기로 시작되었으나 밑둥 약 90cm 지점에서 두 줄기로 갈라진다.
경남 산청 단속사지 조선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문신인 인재 강희안(1419~1464)의 조부 통정공 강회백이 소년 시절 공부하러 와 심었다는 백매. 이름은 ‘정당매庭堂梅’로 불리는데 강회백이 정당문학 대사헌이라는 벼슬까지 올랐던 데서 연유한다. 애초에 강회백이 심은 매화는 고사했고, 지금 생존하는 나무는 손자 강희맹이 심은 ‘손자 정당매’로 알려져 있다. 실제 수령은 5백50년 정도로 추정되고, 높이는 약 3.5m, 수관 폭은 약 5.3m인 노매다. 줄기는 본래 세 개였으나 두 개가 고사했고, 다시 세 개의 곁가지가 자라나 현재 줄기는 모두 네 개. 인근 마을인 남사리에 가면 조선 중기의 대표적 도학자인 남명 조식의 은거지 산천재의 4백40년 된 ‘남명매’를 비롯해 최씨 고택의 약 1백 년 된 백매, 이씨 고택의 약 1백 년 홍매 등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전남 광주 전남대 교정 명나라 희종황제가 증정한 홍매로, 수령은 약 4백 년이다. 조선시대 학자인 고부천이 1621년 진문사서상관으로 명에 가 하사받은 홍매분紅梅盆을 심은 것으로 ‘대명매’라 불린다. 분매 형태로 ‘귀화’했던 이 매화는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의 고부천 자택의 정원에 심어져 정매가 되었다. 독특한 이력이 있는 이 홍매를 전남대 교정으로 옮긴 사람은 고부천의 11대 후손인 고재천 박사. 고 박사가 전남대 농과대 학장으로 재직하던 1961년 이곳으로 옮겨 온 것. 높이 약 5.3m, 수관 폭 6.5m로 건강하다.
전남 장성 백양사 “매년 집사람과 함께 한·중·일 탐매 여행을 다니는데, 저희 부부가 최고로 꼽은 매화는 백양사의 고불매입니다. 나무의 수령도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눈 내린 달밤의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운이 좋다면 눈 내리는 날 저녁, 절집 기와지붕 위로 가지를 걸친 멋진 장관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매화연구원 안형재 원장의 이야기에 끌려 달밤 매화 풍경을 찍으려던 어느 사진가는 한 달을 기다린 끝에 겨우 그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웅전 앞에 있는 ‘우화루雨花樓’ 오른쪽에서 홀로 고고하게 자라고 있는 홍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3백60년 수령인 이 매화는 높이 6m로 자태가 아주 고혹적이다.
‘매화초옥-설중방우’(2004)
서울 창덕궁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 내의원의 자시문資始門과 낙선재 뒤뜰에 아리따운 홍매가 자라고 있다. 내의원 자시문의 매화는 조선시대 선조(1567~1608) 때 중국 명나라에서 보내준 ‘만첩홍매’로, 3~4월이면 탐스러운 꽃이 만발한다. 원래 줄기는 고사했으나, 밑둥치에 남은 부분의 수령이 4백여 년에 이르는 높이 5.0m, 수관 폭 5.2m의 노매. 낙선재 뒤편의 승화루 담장 밖에서도 높이 3.5m, 수관 폭 5.2m의 매화가 자라고 있으며, 낙선재 앞뜰에는 30여 그루의 백매가 무리 지어 있어 장관을 이룬다. 창덕궁 관람은 미리 신청해야 입장할 수 있으며, 낙선재는 금~일요일에만 개방된다. 문의 02-762-0648
1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의 홍매화
2 경기도 용인 민속촌의 백매
광양매화문화축제 경상도 출신의 홍쌍리 할머니가 운영하는 12만 평 규모의 ‘청매실농원’으로 유명해진 광양시 다압면 일대를 찾는다면 과실용 매화가 군락을 이뤄 장관을 이룬 모습을 실컷 볼 수 있다. 대개 2~3월경 꽃을 피우는데 그 모습이 마치 흰 구름이 땅으로 내려온 듯하다. 어찌 보면 산자락에 운무가 낀 듯도 하다. 게다가 매화 향이 온 마을에 진동해 드라이브를 즐기기에도 그만이다. 매화 개화 시기에 맞춰 이 일대에서는 매년 ‘광양매화문화축제’가 열리는데, 열한 번째인 올해 행사는 3월 17일부터 25일까지 개최된다. 올해 주제인 ‘달빛 어린 매화, 섬진강 따라 사랑을’에 따라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올해 처음으로 ‘매화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어서 더욱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총 9일 동안 섬진강 종이배 띄우기, 전국매화사진촬영대회, 매화 탁본 체험, 매화 백일장, 매화 묘목 분재 판매 및 전시, 섬진강 소달구지 여행, 매화 압화 만들기 등의 부대 행사도 열린다. 문의 061-797-3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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