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선율과 음을 생각합니다. 실제 들리는 소리도 있지만 조형으로 보여주는 소리도 있지요. 생물과 무생물의 만남, 색色과 형形이 어우러진 소리에는 지고한 맛이 있습니다. 꽃이요? 전통 민화 속 꽃을 제 시각으로 재해석해서 그린 것입니다. 보는 사람이 느끼는 대로 부르면 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입이 있는 존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만물을 소리로 받아들여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 중에는 3월호 <행복>의 표지 작품인 ‘생음生音’뿐 아니라 높은 산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물의 여정을 그린 ‘수음水音’, 눈 내린 뒤 대나무 숲의 맑음을 노래한 ‘청음淸音’도 있다.
우리 전통 회화에서는 물감을 섞지 않는다. 다섯 방위를 나타내는 청(동쪽), 백(서쪽), 적(남쪽), 흑(북쪽), 황(중앙)의 오방색을 있는 그대로 칠할 뿐이다. 오방색 외의 색은 진하고 연한 정도로 표현한다. ‘생음3’은 전통 회화의 채색법과 맞닿아 있다. 나무는 나무대로 꽃을 피우고, 바위는 바위대로 세월 따라 닳았을 뿐인데 그 어떤 인위보다 조화롭다. 조화로움이 생음이고, 생음이 조화로움이다.
“동양화는 그림보다 여백을 더 중시합니다. 여백에 상처를 덜 내면서 많은 걸 얘기한다는 점에서 서양화의 미니멀리즘과 상통하는 면이 있어요. 서양에서는 현대에 들어와서야 시작한 장르를 동양에서는 수천 년 전부터 그려왔던 셈입니다.”
10여 년 전, 작업실을 경주 삼릉 옆으로 옮긴 후 그는 신라 유산을 소재로 한 작품 창작에 몰두해왔다. 불국사나 석굴암같이 눈에 보이는 유산은 물론 신라의 정신세계까지도 그림에 담는다. 석굴암 본존불을 그린 대작 ‘법열法悅’, 신라의 불국정토 정신을 담은 ‘천년 신라의 꿈-원융圓融의 세계’를 보고 있노라면 그림 한 점의 무구한 가치를 절감하게 된다.
프로필 1945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한 한국화가 박대성 씨는 6·25 전쟁 때 양친과 왼쪽 팔을 잃었다. 오른팔에 의지해 고학으로 그림을 공부한 그는 제1회 중앙미술대전(1978년)에 ‘추견’을 출품, 장려상을 수상하며 화단에 데뷔했다. 이듬해 열린 중앙미술대전에서는 ‘상림’으로 대상을 수상했으며 타이완 공작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래 열아홉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선대로부터 내려온 조형 언어를 만드는 것이 일생의 꿈입니다. 정신 문화와 조형 언어는 선대로 올라갈수록 순진무구합니다. 현대 과학이 넘어서지 못하는 과거의 조형물이 많지 않나요? 과학기술이 이렇게 발달했는데도 석굴암에 비 새는 걸 고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지요.”
그는 무학이다. 정규 교육 혜택은 물론이거니와 별도의 미술 교육도 받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그림이 좋아 열 살 때부터 묵화를 연습하고 전통 화법에 관한 고서를 습득하며 자수성가했다. 국전의 위상이 지금 같지 않았던 1970년대 국전에 작품을 출품해 여덟 번 수상했고, 1979년에는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차지했다. 올해로 화필 농사 51년. 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는 ‘실경산수화’의 맥을 잇는 독보적인 작가로 손꼽힌다.
“붓글씨 가운데 초서草書는 삼라만상을 옮겨놓은 서체입니다. 초서를 쓰면서 영감을 얻고는 합니다. 뜻이 지고한 가운데서 느껴지는 찰나의 희열이 이미지 구상의 초석이 됩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는 절제된 구도와 시선, 파격적인 화면 구성도 기실은 붓글씨 수행을 통해 습득한 것이다. 다양한 시선이 공존하는 화폭의 파격적인 구도도 마찬가지. 긴 세월 동안 붓글씨를 쓰면서 글자 하나, 획 하나의 차이가 빚어내는 크나큰 차이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의 독창적인 그림세계는 지금에 이르지 못 했을 것이다.
‘생음’은 3월호 <행복> 표지 작품인 ‘3’을 포함해 모두 다섯 점으로 구성된 연작이다. 왼쪽 위 작품부터 시계 방향으로 ‘생음 1, 2, 4, 5’. 모두 종이에 수묵담채, 2006년 작품.
“추사의 ‘부작란도’와 ‘세한도’를 참 좋아합니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아주 이상적이고, 가장 평범하면서도 아주 비범한 그림이지요. 시·서·화의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불후의 명작입니다. 시공을 초월한 그 경지는 목숨 열 개를 내놓고라도 이르고 싶습니다.”
지난 50여 년 세월 동안 내놓았던 목숨 수도 적지 않을 텐데, 환갑의 나이에 다시 목숨을 담보를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하는 그의 열정이 대단하다. 이제부터 보여주는 작품이야말로 ‘박대성의 진면목’을 보여줄 것 같은 느낌. 그러나 그는 다음 행보에 대해 “아마 초현실적인 것으로 점프하지 않겠나” 하는 정도로 운만 띄울 뿐 말이 없다.
지난해 봄, 그의 그림 인생 50년을 기념해 서울 평창동 가나 아트 갤러리에서 열렸던 <소산 박대성, 천년 신라의 꿈>전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이 경남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4월 30일까지 전시된다. 5백 호짜리 대작 ‘천년 신라의 꿈-원융圓融의 세계’를 비롯해 가로 길이 12m에 달하는 대작 ‘법열法悅’, 작가의 독창적인 시선이 돋보이는 ‘현율玄律’ 등 50여 점을 볼 수 있다. 문의 055-382-1001
3 3월호 <행복> 표지는 한국화가 박대성 씨의 ‘생음生音3’이다. 종이 위에 수묵담채로 그린 이 그림에는 돌과 이름 모를 꽃이 함께 피어 있다. 나무는 나무대로 꽃을 피우고’돌은 돌대로 꽃을 피웠다. 돌도 한 송이의 꽃. 주름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의 옆얼굴 같다. 가로 97 ㎝× 세로 1백90㎝’ 2 0 0 6년 작품.
우리 전통 회화에서는 물감을 섞지 않는다. 다섯 방위를 나타내는 청(동쪽), 백(서쪽), 적(남쪽), 흑(북쪽), 황(중앙)의 오방색을 있는 그대로 칠할 뿐이다. 오방색 외의 색은 진하고 연한 정도로 표현한다. ‘생음3’은 전통 회화의 채색법과 맞닿아 있다. 나무는 나무대로 꽃을 피우고, 바위는 바위대로 세월 따라 닳았을 뿐인데 그 어떤 인위보다 조화롭다. 조화로움이 생음이고, 생음이 조화로움이다.
“동양화는 그림보다 여백을 더 중시합니다. 여백에 상처를 덜 내면서 많은 걸 얘기한다는 점에서 서양화의 미니멀리즘과 상통하는 면이 있어요. 서양에서는 현대에 들어와서야 시작한 장르를 동양에서는 수천 년 전부터 그려왔던 셈입니다.”
10여 년 전, 작업실을 경주 삼릉 옆으로 옮긴 후 그는 신라 유산을 소재로 한 작품 창작에 몰두해왔다. 불국사나 석굴암같이 눈에 보이는 유산은 물론 신라의 정신세계까지도 그림에 담는다. 석굴암 본존불을 그린 대작 ‘법열法悅’, 신라의 불국정토 정신을 담은 ‘천년 신라의 꿈-원융圓融의 세계’를 보고 있노라면 그림 한 점의 무구한 가치를 절감하게 된다.
프로필 1945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한 한국화가 박대성 씨는 6·25 전쟁 때 양친과 왼쪽 팔을 잃었다. 오른팔에 의지해 고학으로 그림을 공부한 그는 제1회 중앙미술대전(1978년)에 ‘추견’을 출품, 장려상을 수상하며 화단에 데뷔했다. 이듬해 열린 중앙미술대전에서는 ‘상림’으로 대상을 수상했으며 타이완 공작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래 열아홉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선대로부터 내려온 조형 언어를 만드는 것이 일생의 꿈입니다. 정신 문화와 조형 언어는 선대로 올라갈수록 순진무구합니다. 현대 과학이 넘어서지 못하는 과거의 조형물이 많지 않나요? 과학기술이 이렇게 발달했는데도 석굴암에 비 새는 걸 고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지요.”
그는 무학이다. 정규 교육 혜택은 물론이거니와 별도의 미술 교육도 받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그림이 좋아 열 살 때부터 묵화를 연습하고 전통 화법에 관한 고서를 습득하며 자수성가했다. 국전의 위상이 지금 같지 않았던 1970년대 국전에 작품을 출품해 여덟 번 수상했고, 1979년에는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차지했다. 올해로 화필 농사 51년. 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는 ‘실경산수화’의 맥을 잇는 독보적인 작가로 손꼽힌다.
“붓글씨 가운데 초서草書는 삼라만상을 옮겨놓은 서체입니다. 초서를 쓰면서 영감을 얻고는 합니다. 뜻이 지고한 가운데서 느껴지는 찰나의 희열이 이미지 구상의 초석이 됩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는 절제된 구도와 시선, 파격적인 화면 구성도 기실은 붓글씨 수행을 통해 습득한 것이다. 다양한 시선이 공존하는 화폭의 파격적인 구도도 마찬가지. 긴 세월 동안 붓글씨를 쓰면서 글자 하나, 획 하나의 차이가 빚어내는 크나큰 차이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의 독창적인 그림세계는 지금에 이르지 못 했을 것이다.
‘생음’은 3월호 <행복> 표지 작품인 ‘3’을 포함해 모두 다섯 점으로 구성된 연작이다. 왼쪽 위 작품부터 시계 방향으로 ‘생음 1, 2, 4, 5’. 모두 종이에 수묵담채, 2006년 작품.
“추사의 ‘부작란도’와 ‘세한도’를 참 좋아합니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아주 이상적이고, 가장 평범하면서도 아주 비범한 그림이지요. 시·서·화의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불후의 명작입니다. 시공을 초월한 그 경지는 목숨 열 개를 내놓고라도 이르고 싶습니다.”
지난 50여 년 세월 동안 내놓았던 목숨 수도 적지 않을 텐데, 환갑의 나이에 다시 목숨을 담보를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하는 그의 열정이 대단하다. 이제부터 보여주는 작품이야말로 ‘박대성의 진면목’을 보여줄 것 같은 느낌. 그러나 그는 다음 행보에 대해 “아마 초현실적인 것으로 점프하지 않겠나” 하는 정도로 운만 띄울 뿐 말이 없다.
지난해 봄, 그의 그림 인생 50년을 기념해 서울 평창동 가나 아트 갤러리에서 열렸던 <소산 박대성, 천년 신라의 꿈>전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이 경남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4월 30일까지 전시된다. 5백 호짜리 대작 ‘천년 신라의 꿈-원융圓融의 세계’를 비롯해 가로 길이 12m에 달하는 대작 ‘법열法悅’, 작가의 독창적인 시선이 돋보이는 ‘현율玄律’ 등 50여 점을 볼 수 있다. 문의 055-382-1001
3 3월호 <행복> 표지는 한국화가 박대성 씨의 ‘생음生音3’이다. 종이 위에 수묵담채로 그린 이 그림에는 돌과 이름 모를 꽃이 함께 피어 있다. 나무는 나무대로 꽃을 피우고’돌은 돌대로 꽃을 피웠다. 돌도 한 송이의 꽃. 주름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의 옆얼굴 같다. 가로 97 ㎝× 세로 1백90㎝’ 2 0 0 6년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