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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보희 자연 속으로

(왼쪽) ‘Towards’, 패브릭에 채색, 280×180cm, 2017 (오른쪽) ‘Towards’, 패브릭에 채색, 280×180cm, 2017
김보희 작가는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25년간 재직했고, 오는 8월 교수로서 정년을 맞는다. 학고재갤러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내외 여러 기관에서 열린 다수의 개인전 및 단체전에 참여했다. 1982년과 1983년에 한국미술협회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을, 1992년에는 월전미술상을 수상했다.


저절로 동공이 커지는 선명한 초록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씨앗일까, 열 매일까? 꽃 같기도 하고 잎사귀 같기도 한데, 정체를 알 수 없다. 그 생 김새가 낯설고 신비해서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김보희 작가가 제주 의 자연을 바라보며 느낀 것도 바로 이런 ‘물음표’일까? “신혼여행을 제 주로 갔어요. 남편과 농담처럼 ‘나중에 제주에 땅 사서 집 짓자’고 했는 데, 현실로 이뤘죠. 2005년에 제주로 내려가서 20년 전 사둔 감귤밭을 정리해 그 자리에 집을 지었어요. 10년 넘게 주중엔 서울에서 수업하고, 주말엔 제주에서 일상을 살며 작업했지요.” 

제주는 김보희 작가에게 영감의 터전이다.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 키 큰 야자수, 색색의 꽃나무가 있는 그의 작품은 제주 집의 정원을 그대로 옮 겨놓은 것이다. 작가와 남편이 손수 가꾼 정원엔 야자수, 용설란, 수국, 로즈메리, 선인장 등이 제주의 자연을 닮은 야생의 모습 그대로 펼쳐져 있다. “제주에 정착한 후 가장 많이 그린 것 중 하나가 선인장이에요. 제주에서는 선인장이 나무처럼 크게 자라지요. 사람 키보다 큰 것도 많고요. 제주 땅 어디에나 선인장이 있어요.” 표지작 ‘투워즈Towards’ (2015) 역시 제주에서 직접 본 선인장 고목을 그린 것이다. 지난 5월 첫째 주까지 종로구 소격동의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최한 개인 전 <자연이 되는 꿈(Becoming Nature)>에서 김보희 작가는 회화 서 른여섯 점을 선보였다. 동양화를 전공하고 25년간 동양화과 교수로 재 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쳐온 그는 기본적으로 먹을 쓰고 분채로 색을 입 히는 동양화의 채색 기법을 사용하지만, 캔버스를 이용하고 아크릴, 바 니시 등 서양화 재료도 다양하게 수용하며 동서양의 경계를 허문 새로 운 화면을 선보여왔다. 대담한 듯 단아한 듯 오묘한 빛깔과 깊이감 있는 색 표현의 비결 또한 바로 이것.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있다고 생각할 때 아크릴 같은 서양화 재료를 사용하지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재료를 찾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보희 작가의 화폭에 등장하는 수많은 ‘초록’은 제주의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것보다도 더 이국적이고, 더 야생적인 원시림을 떠올리게 하는 초록이다. 스콜이 한차례 시원하게 지나간 후 자연의 생명수를 흠뻑 빨 아들인 원시림의 한가운데에 들어온 느낌마저 든다. ‘따뜻한 남쪽 나라’ 에 대한 동경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드러난다. “호주 시드니를 여행할 때 높이 7~8m는 족히 되는 거대한 유리 돔 안에 새, 여우원숭이, 거북이, 열대식물을 한데 어우러지게 만들어놓은 동물원에 간 적이 있어요. 유리 돔 사이의 통로로 지나가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데, 마치 내가 그 열 대의 자연 속에 들어간 듯한 착각이 들었죠.” 그때 본 장면을 김보희 작 가는 ‘더 데이즈The days’(2011~2014)라는 작품에 담았다. 짙은 네이 비 컬러의 밤하늘에 둥그렇게 떠오른 샛노란 보름달, 그 아래 펼쳐진 열 대식물, 원색의 열매가 대롱대롱 매달린 키 작은 과목, 선인장이 만들어 내는 초록의 끝없는 중첩. 작은 앵무새 한 쌍과 선인장 사이를 지나는 나무껍질색의 거북, 마다가스카르에서 볼 법한 여우원숭이가 그 초록 과 대비를 이루며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Towards’, 패브릭에 채색, 160×130cm, 2015
“피지 여행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빨강, 초록, 연둣빛의 조화가 너무 예 뻐 기억해둔 꽃을 제주 둘레길을 걷다 우연히 찾 았어요. 이름을 몰라 ‘피지꽃’이라고 부르는데, 실 제로는 주먹보다 작은 꽃을 이렇게 크게 그렸죠.” 대추알만큼 작은 야자 열매가 사람 주먹만큼 크 게 화폭을 메우고, 파인애플을 닮은 씨앗은 몇백 배의 크기로 부풀려져 캔버스 안에 떡하니 앉아 있다.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 마저 든다. “제주 집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하염 없이 들여다보다 보면 작은 씨앗, 잎사귀, 열매 같은 것에서도 현대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아름다 움을 발견할 수 있어요. 자연이면서 동시에 훌륭 한 오브제인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몇십 배, 몇백 배로 확대해 그렸지요.” 김보희 작가는 실재하는 자연만을 그리지 않는다. 여행에서 맛 본 열대 과일에서 영감을 받아 그가 새롭게 창조 한 것도 있다. “머릿 속에 그리던 상상의 열매를 그려놓고 보면 그런 열매가 지구상 어딘가에 실 제로 존재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랜 시 간 자연을 들여다봐왔는데, 그럴수록 오묘한 자 연의 신비를 새삼 깨닫죠.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접하는 자연은 얼마나 한정적일까요? 지 구 반대편, 우리가 모르는 작은 섬에는 또 얼마나 신비로운 자연이 존재할까요?”

자연을 그리는 작가는 이 세상에 수없이 많다. 작품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이다. “사람들이 ‘나도 지나갈 때 본 것인데, 그것을 특별히 어여삐 여겨 이런 작품을 그리느냐’고 물어요. 저 는 그저 내 눈에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을 나만의 느낌으로 표현할 뿐이 에요. 아직도 그리고 싶은 게 너무나 많고요. 최근엔 ‘숫자’를 주제로 한 작업을 시작했어요.” 김보희 작가는 오는 6월 둘째 주까지 이화여자대 학교 조형예술대학 내 아트센터에서 47년간의 대표작을 추려 정년 퇴임 기념 전시를 연다.  “누군가는 제 작품을 보고 십장생이 존재하는 한국식 정원이라고 표현 하기도 하고, 남편은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성경>의 ‘다섯 번째 날’ 같다고 하기도 해요.” 김보희 작가는 “자연에 모든 것이 다 있다”고 말 한다. 자연이야말로 이 세상의 근원이자 모든 아름다움의 출발점이라 는 것. 그가 이번 개인전에 선보인 신작들의 제목 ‘투워즈towards’처럼 김보희 작가는 오늘도 자연을 향해, 자연으로 가는 그 길목에 서서 호 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본다.

글 유주희 기자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