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1960~1970년대에 내가 살던 집은 지방 소도시의 한옥이었다. 넓지는 않았지만 마루와 마당이 있는 그 집에는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손님들로 매일 들썩였다. 더욱이 시골 본가와 외가에서 온 친척 두세 명까지 하숙 아닌 하숙을 하고 있었기에 우리 집에는 늘 사람으로 붐볐다. 할아버지 생신이라도 될라치면, 넓지않은 집에 수십 명의 손님으로 넘쳐났다. 그들은 하루나 이틀을 묵어가기도 했다. 그야말로 매일이 잔칫집이었다. 아마도 조선시대 종가나 대학자의 집도 이러했을 것이다. 퇴계 이황이 제자들에게 일러둔 ‘대인지도待人之道’라는 가르침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찾아온 손님의 신분이 높든지 그렇지 않든지, 나이가 많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하지 않고 똑같이 대접해야 한다.” 말이 쉽지 과연 이런 태도로 손님을 접대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을 품은 몇몇 제자가 선생이 실제 손님 맞는 모습을 눈여겨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퇴계 선생은 실제로 누가 오든지 간에 손님에게 공평하게 술과 고기를 차려서 대접했다. 그렇다고 손님의 면전에서 부인을 불러 상을 차려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 손님이 무안해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집에서 술을 마시겠다고 막무가내로 손님을 끌고 온 부친이 생각났다. 그런데 모친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술상을 차려서 내왔다.
통행금지가 있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부친과 손님들은 밤새워가며 술을 마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절 가부장적 문화가 남긴 이런 기억은 내게 유쾌하지 않은 트라우마trauma로 남아 있다. <미암일기>를 쓴 조선 선조 시대의 학자 유희춘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차면遮面’의 전략을 쓰라고 했다. 차면이란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려 막는 행동을 이르는 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이 찾아오면 주인은 직접 만나지 않고 하인을 시켜 음식을 대접한 후 돌려보내는 것이 바로 차면이다. 교수가 되고 얼마 안 되어 내 제자들이 집에 세배하러 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예의 어릴 적 트라우마 때문에 집이 아닌 음식점에서 신년 하례식을 하는 것으로 바꾸어버렸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손님을 그리 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음식 장만과 대접이 무척 부담스러울 뿐이다. 나도 간혹 친한 사람의 집에 초대받아 가는 일이 있다. 그럴 때마다 그 집에선 음식 문화를 연구하는 나의 ‘미식 수준’ 을 걱정한다. 정작 나는 미식가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나 때문에 동행한 사람들마저 모두 안주인으로부터 차면을 당하는 처지가 되는 난처한 경우도 있었다. 서자였지만 학문이 높아 정조 임금에게 발탁된 실학자 이덕무는 남의 잔치에 가서 음식이 시다느니 짜다느니 품평하지 말라는 지침을 글로 써서 후손에게 남겼다. 선비 혼자만 남의 집에 초대받던 시절이라 그가 집에 돌아가서 부인에게 그 집 음식이 맛없었다고 흉을 보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면 금세 소문이 나서 선비의 체면을 잃게 된다.
18세기 초까지만 해도 서유럽의 귀족들 역시 대저택에서 파티를 열면 남자만 초청했다. 그러다가 18세기 말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파티에 남녀가 짝을 이루어 참석하는 규칙이 생겼다. 대저택의 거실에 도착한 손님 부부는 외투를 벗고 정해진 좌석에 앉았다. 식사가 끝나면 남녀 무리가 나뉘어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나 대저택에서 살지 않는 시민들은 감히 이런 파티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영국이 세계를 경영하는 대제국이 된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영국의 일부 소시민 부인들은 오후에 ‘애프터눈 티타임’를 열어 이웃부인들과 작은 파티를 즐길 수 있었다. 손님 초대는 그 집의 경제적 수준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것이다. 홍콩에는 부엌이 없는 집이 많다. 인구는 날로 증가하고 거주 공간이 부족한 1960년대 부엌을 빼고 지은 아파트 때문이다. 어머니가 집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는 30대 후반의 한 홍콩 변호사는 자신의 집 거실을 아예 부엌으로 개조해버렸다. 그래야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정도 만만치 않다. 2015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요리 시간은 일주일에 3.7시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부엌과 거실을 버젓이 갖춘 집에 사는 한국의 중산층도 집안에 경사가 있으면 어김없이 음식점을 찾는다. 이런 탓에 대형 외식업체가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만큼 우리 속에 패스트푸드 체인의 운영 방식처럼 편리함이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너 나 할 것 없이 ‘집밥’을 그리워한다.
많은 문화인류학자가 강조하듯 인류는 유일하게 요리하고 함께 식사하는 동물이다. 날이 갈수록 세상 사정이 녹록지 않지만, 이럴수록 이웃과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한솥밥 식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끈끈하고 정 깊은 가족 공동체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집은 나와 가족의 삶이 담긴 그릇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가부장적 초대 문화 때문이었을까? 어느덧 이웃과 친구를 초대하는 문화가 사라졌다. 자녀의 돌이나 생일잔치는 물론, 이사 후 집들이까지 외부에서 하거나 그마저도 생략하는 경우가 흔하다. 집은 경제력이나 규모의 크고 작음을 드러내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취향과 관계에 대해 스스럼없이 묻고 대화하며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다. 집에 사람을 초대하는 건 인간관계에서 가장 친밀한 일이다.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차면의 가면따위 과감히 벗어버려야 한다. 나 역시 하루빨리 제자들을 집에 초대할 작정이다. 부부 동반이라면 더욱 좋겠다. 그래야 오래된 나의 트라우마가 치유될 것 같기 때문이다.
글을 쓴 주영하 교수는 음식을 문화인류학, 민속학, 역사학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연구해 한국인의 생활 방식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규명하는 음식 인문학자입니다.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 석사 학위를, 중국 중앙민족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음식 인문학> < 식탁 위의 한국사>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 차폰, 잔폰, 짬뽕 - 동아시아 음식 문화의 역사와 현재> 등이 있습니다.
- <행복> 창간 30주년 캠페인_ 우리 집에 놀러 와 초대 진정한 소통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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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들은 이야기다. 시골에서 시어머니가 서울 며느리 집에 왔는데, 고급 호텔에 모셨단다.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세상이 참 이상해졌다고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며느리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파트 공화국에 살면서 모든 공간이 식구 개개인에게 분할된 상황에서 누군가를 초대해 집에 재운다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초대를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 남의 집에 가서 식사 정도야 괜찮지만, 하룻밤을 보내며 가장 내밀한 잠버릇까지 드러내기는 머뭇거려진다. 그 시어머니도 그런 생각으로 며느리의 제안에 동의한 것이 아닐까?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