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만난 김용익 작가. 작업 공간 안쪽에 있는 서재의 책상에는 그의 스케치와 작가 노트가 펼쳐져 있다.
김용익 작가는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1991년부터 2012년까지 경원대학교 미술디자인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했고,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대안 공간 풀의 대표로 일했다. 197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1979년 앙데팡당전, 2002년 광주비엔날레, 2014년 제5회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2016년 일민미술관 회고전과 국제갤러리 개인전 등에 참가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도쿄도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김용익 작가는 캔버스 앞에 서는 것보다 그림에 대해 생각하고,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다 1990년 경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3년간 폭발적으로 많은 작업을 해냈다. 지난해 말국제갤러리에서 개최한 개인전에서 선보인 ‘땡땡이 연작’ 역시 이때 처음 시작한 것이다. “미대에 다니며 모더니즘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공부하면 할수록 모더니즘 미술 안에 존재하는 이율배반적 요소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됐어요. 철학자 막스 베버도 모더니즘의 조화, 균형, 질서가 인간에게 ‘예측 가능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대신 자연스럽고 창조적인 인간의 욕구를 억압한다고 말했지요. 그때부터 모더니즘 미술에 균열을 내려고 하는 시도를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 것 같아요.” 이번에 선보인 30여 점의 작품은 이 ‘땡땡이 연작’을 최근 2년간 재편집ㆍ재구성한 작품이다. 작가 노트에서 “이제는 크리에이팅creating으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편집으로서의 예술이 요구되는 시대다”라고 밝힌 것처럼 변색, 퇴색, 탈색, 얼룩이나 때같은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반영된 예전 작업을 꺼내 변형과 편집을 거쳐 완성한 작품을 내놓았다.
캔버스 안에 일정한 크기와 간격으로 자리한 땡땡이는 정형화ㆍ도식화된 ‘그리드grid’로 느껴진다. 그러나 가까이 보면 연필 자국, 흘러내린 물감 자국, 완벽하지 않은 형태의 땡땡이, 아주 작은 글씨로 써놓은 메모가 보인다. “어쩌다 잘못되어 우연히 묻은 것 같은, 그림 아닌 그림 같은 요소를 작품 안에 표현하고 싶다는 미학적 의식에서 출발한 시도입니다.” 그렇게 작가는 미술처럼 보이는 것과 미술처럼 보이지 않는 것, 그 두 가지의 묘한 동거를 하나의 화면 안에 구현해낸다. “흰 캔버스를 더럽히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꽃잎이나 잎사귀를 화면에 뭉개거나 걸레로 물감을 마구 문지르기도 하고, 그 위에 물감을 나이프로 밀어서 지우기도 하고요. 투명한 바니시varnish를 이리저리 뿌리고 흘러내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작은 글씨로 문장을 써넣기도 하지요.”
표지작 ‘얇게…더 얇게… #16-11’은 작가가 산책하며 채취한 야생화 꽃잎과 잎사귀를 캔버스에 문질러 표현한 뒤 그 위에 아크릴물감을 이용해 분홍색 땡땡이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이다. “꽃, 풀, 열매 등을 채집해 캔버스 위에 표현하는 방식은 1990년에 처음 시도한 겁니다. 어린 시절부터 꽃을 심고 기르는 것이 일상이었어요. 농대에 진학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농대에서 2년간 대학 생활을 하던 그는 연극을 접하며 예술에 눈떴다. “연극 무대의 배경을 그리다 ‘미대에 가겠다’는 결심을 굳혔지요. 스무 해 남짓한 인생 전체를 전복시키는 첫 번째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유토피아 #16-7’, mixed media on canvas, 80×140cm, 2016(사진: 박준형,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김용익 작가 인생의 두 번째 터닝 포인트는 단색화 거장 박서보 선생을 만난 것이다. “박서보 선생은 일본의 ‘모노화 이론’, 서양의 여러 미술 사조 등을 일찍 접한 분이었기에 학생들의 작품에 대해 가혹한 비평을 하기로 유명했지요. 당시 저는 혼자 모더니즘 미술을 공부하고 있었기에 그때 처음 박서보 선생 앞에서 캔버스 천을 뜯어 천의 구김을 그대로 보여주고 스프레이로 다시 펴는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박서보 선생은 그해 12월 졸업반 학생인 저를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 작가로 데뷔시켰지요.” 그 이후 김용익 작가는 박서보, 하종현 등 단색화 1세대 작가들과 일본에서 전시를 열기도 했지만, 당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던 그는 자신이 미학적 도취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고, 오랫동안 주류 미술계와 거리를 둔 채 교육자로, 저술가로 활동하며 공공 미술과 민중미술, 지역 기반의 환경 미술운동 등에 적극 참여해왔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당대 미술 현장에서 일어난 변화와 사건을 그대로 관통해온 김용익 작가는 일흔이 넘은 지금, 인생의 세 번째 터닝 포인트를 맞고 있다. “작품 안에 숨은 철학과 이념에 상관없이 캔버스에 구현한 화면 자체를 관객이 ‘시각적으로 상쾌하게 느낀다’는 것을 지난해 두 번의 전시를 통해 체감했지요.” 그가 처음 땡땡이 연작을 선보인 1990년 즈음의 한국 현대미술은 이념과 담론, 의미 구조를 중요시했다. 누군가는 “선생님 작품은 디자인과 무엇이 다른가요?”라고 묻기도 했다. “겉으로는 관객과 소통하는 것을 강조해왔지만, 사실 ‘소통은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라는 심정이 더 컸습니다. 그렇게 불통의 시대를 견뎌온 셈이죠.”
오는 5월 초 뉴욕 티나 킴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앞둔 작가는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 세대와 소통할 수 있는 작품 활동을 펼쳐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비쳤다. 오랜 시간 ‘불통의 시대’를 견뎌온 작가는 예술가로서 또한 번 출발선 앞에 서게 된 셈이다. 그의 작업실 바닥에는 세계의 중심축을 의미하는 ‘악시스 문디Axis Mundi’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온전히 작가만의 공간에서 오로지 작가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해낸다면, 그것이 예술이 아니고 무엇일까? 예술이 태어나는 곳이라면, 그곳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이 아니고 또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