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페이지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만난 유국일 디자이너. 이번 전시의 대표작 ‘셀레네의 말’은 현대미술 작품을 연상케 한다.
음악은 영혼에 먹이를 주는 것
눈을 감았다. 파도 소리와 함께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곳은 울진 앞바다. 벽 너머 먼 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온다. 당, 당, 당, 미사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다. 눈을 감았을 뿐인데 갤러리에서 울진 앞바다로, 유럽의 오래된 성당으로, 라이브 연주회에 와있는 듯 착각에 빠진다. 너무 감미롭지도, 너무 애절하지도 않은 묘한 끌림이있다. 더페이지갤러리에서 1월 31일까지 개최하는 <유국일의 메탈스피커: 원음 그대로> 전시 풍경이다. 먼저 소리를 전시한다는 개념이 흥미로웠다. “음악은 영혼에 먹이를 주는 것과 같아요. 심리적 안정도 주지만, 상상의 세계를 펼칠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소리’의 효과지요. ‘울진 앞바다’는 그래미 어워드를 두 번이나 수상한 황병준 선생의 작업입니다. 전시를 하게 되면 바닷소리를 한번 틀고 싶어 황병준 선생에게 소리를 만들어달라 주문했어요. 진짜 울진 앞바다에 있는 것 같지 않았나요? 소리를 정확히 옮겨왔기 때문입니다.”
보통 스피커는 내부의 진동으로 스피커 통이 울리면서 왜곡된 소리가 합쳐진다. 하지만 유국일 디자이너의 스피커는 정확한 소리만 구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소리는 원음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법. 과장되거나 축소되면 오히려 매력이 반감된다. 예컨대 과거에 기록된 음들은 현대 기술의 발전으로 더 생생한 음으로 거듭 살아나 현장에서 일어난 소리를 그대로 재현할 수 있지만, 만약 현재의 시각으로 재현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기준에서 보면 명백한 왜곡이다. 이는 음악을 숱하게 들어온 디자이너의 경험에서 비롯한다. 음악에 푹 빠졌을 때 그는 스피커마다 나오는 음악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같은 음이 나오는 오디오를 장시간 반복해 듣거나 기기를 분해해서 비교해보았다. 뜯고 분해한 스피커만 수백 대다.
혜성 꼬리를 모티프로 디자인한 ‘혜성’ 시리즈.
수많은 공연장은 원음에 가까운 음을 찾기 위한 실험실이 됐다. 공연장에서 연주를 듣고, 라이브로 녹음된 음을 비교, 분석해 실제 연주와 가장 가까운 음을 구현하는 음의 기준을 찾는 데 매진했다. 음악이 아닌 금속 조형 디자인이라는 전공도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금속이야말로 진동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재료. 여러 실험 결과 무게는 진동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맑고 깨끗한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무게가 300kg에 달하는 금속 스피커도 만들었다. 정확한 음질을 구현하는 기술 특허 여덟 개, 디자인 특허 서른두 개를 보유했고,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인 레드닷, IF를 비롯해 CES, 하이엔드 뮌헨쇼 등 수상 경력만 14회다. 2013년 아이리버와 손잡고 개발한 하이엔드 스피커 ‘아스텔앤컨’ 은 당시 돌파구가 필요했던 아이리버의 효자 상품이 되기도 했다.
그뿐이랴. 많은 회사는 신제품을 출시하기에 앞서 그에게 시제품을 보내온다. 스피커로 구현한 음악을 들어보고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지점을 명확히 지적하는데, 오직 컴퓨터만이 구분할 수 있는 미세한 차이까지 짚어내는 것이 놀라워 한 독일 회사 오너가 그의 집을 직접 찾아왔을 정도다. “저는 음을 조율하지 않습니다. 음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뮤지션과 음악을 녹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스피커 메이커의 태도라 생각해요. 직업윤리 같은 거죠. 13년 만에 연 이번 전시는 사실 24년간 스피커를 만든 내 작업에 대한 보고서예요. 이번에 선보인 작품은 기획부터 제작까지 5년 이상 걸린 것들이죠. 무엇보다 전시 형태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스피커, 기능이 있는 오브제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스피커는 혜성, 수직 과 수평, 셀레네의 말 시리즈다. 1관에는 별을 모티프로 한 혜성 시리즈를 전시했다. 2006년부터 해온 별 작업의 연장이다. “작업을 하다 보면 끝나는 시간이 늘 새벽 2시였어요. 집에 가면서 달과 별과 많은 얘기를 한 것 같아요. 별 시리즈 중 열세 번째 혜성은 이름처럼 혜성에 소원을 비는 마음으로 순수하게 작업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어요.” 별 사이로 지나가는 혜성의 심미적 이미지는 동경이다. 사라지는 혜성 꼬리 모양으로 디자인한 스피커는 주변에 요철이 있는데, 이는 음의 여운을 살리기 위한 배려다. 단지 디자인을 위한 형태가 아니라는 뜻. 전시장 2관에는 큐브 모양인 수직과 수평 스피커를 전시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원음 그대로를 재생하는 유국일 디자이너의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1 들을 수 있는 라운지 공간도 마련했다.
디자인적으로 스피커는 결국 건축(공간) 내에 존재하는 오브제다. 수직과 수평 스피커는 현대건축의 일부분으로 원, 삼각, 사각의 기본 도형으로 구성했다. 면과 면이 모여 만난 것이 3차원이고, 소리의 파동이 더해지면 4차원의 구성이 된다. 정연한 입방체의 크기와 면적을 유지한 후 면적 내의 변화는 자유로운 ‘음’ 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다. 정면에서 표면적을 자세히 보면 유닛 주변의 형상들이 미세하게 다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음이 발산할 때 음과 음의 부딪침을 피해 맑고 투명한 음이 난반사되도록 설계한 것이다. 원은 중심이 아닌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같은 공간에 진동이 동시에 있을 경우 진동이 반사되어 다시 돌아오는 효과가 있다. 이 경우 흡수되지 않고 부딪쳐 왜곡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심에서 벗어난 디자인을 구현한 것. 사면 구조의 경사면을 이용해 스피커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전시장 3관에는 셀레네의 말을 전시했다. 소리와 역사를 동일한 주제어로 생각하는 디자이너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왜곡 없이 다뤄야 하는 것처럼 소리 또한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전하고 기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셀레네의 말은 파르테논신전
동쪽에 있는 마차의 말 두상인데, 이것을 스캔한 뒤 음질 형태에 맞게 재구성해 스피커로 만들어 마치 하나의 현대미술 작품을 연상케 한다. “소리는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스피커가 오브제로 존재한다면 시각 이상의 ‘오감’이 됩니다. 공간에 늠름하게 말 조각품이 서있고, 그 뒤에 무대가 펼쳐지는 상상을 해보세요. 하이엔드의 기준은 얼마만큼 생동감 있고, 정확하고, 사실에 가까운가 하는 것입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디자이너가 틀어준 음악을 듣는데, 실제 소리가 스피커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공간 자체에서 퍼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공감각이라고 할까? 왜 그를 두고 ‘소리의 건축가’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차가운 기계와 예민한 음이 만났는데 이상하게 가슴 한편이 위로된다. 이것이 바로 소리가 주는 힐링이 아닐는지. “아이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들은 울림과 파동…. 그래서 사람들은 물소리를 들으면 편안함을 느낍니다. 편안함을 전시장에서 느끼게 하고 싶어서 물소리, 종소리 등 최대한 자연의 소리를 활용했어요. 저는 매일 아침 여섯 평의 자그마한 뜰에 나가 새소리를 듣는 게 중요한 일과예요. 기계음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소리, 그 자체로 치유가 되죠.”
촬영 협조 더페이지갤러리(02-3447-0049)
- 스피커 디자이너 유국일 소리를 온전히 소유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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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 이래 많은 이가 다양한 스피커를 만들었다. 유국일이 만든 스피커의 가장 큰 차별점은 음악의 ‘현존성’이다. 뮤지션의 ‘과거’와 듣는 이의 ‘현재’를 공유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시간. 그의 스피커를 감정이 살아 있는 오브제라 부르는 이유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