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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인 연세대 특임교수·김재옥 부부의 과수원 속 미술관 중선농원의 두 번째 시작
제주시 영평길, 돌담 너머 자갈길로 들어서니 귤 창고를 개조한 듯한 소담한 건물 세 채가 눈에 들어온다. 반질한 초록 잎 사이에 얼굴을 빼꼼 내민 샛노란 열매가 반가웠고, 길고 긴 돌담이 다감했으며, 멀찍이 방풍림 숲에서 이는 보드라운 바람이 마음을 간질였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고 누군가에겐 작고 깊은 울림을 주는 그곳, 제주 중선농원의 오늘.

선친한테 물려받은 감귤 농원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방법으로 비영리 복합 문화 공간을 구성한 문정인・김재옥 부부(가운데)와 카페에 선인장 작품을 설치한 김수현 작가(왼쪽), 문화 콘텐츠를 함께 기획한 갤러리 2 정재호 대표와 제주 갤러리 2를 운영하는 김정원 대표 부부(오른쪽).
또 한 해가 저문다. 시간의 흐름에 무슨 매듭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흐르는 세월에 인위적 의미를 부여하고 가는 해를 아쉬워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마무리는 곧 시작의 서막이요, 12월 31일과 1월 1일처럼 종이 한 장 차이로 의미와 마음가짐이 달라지기도 한다. 원철 스님은 산문집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에서 이를 김장에 빗대어 서술했다. “겨울 준비로 김장을 했다. 배추 걷이가 끝난 휑한 빈 산밭을 바라보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배추로서는 아름다운 마무리겠지만 김치로서는 새로운 시작이다.” 배추의 죽음이 아니라 김치의 시작을 보라니 얼마나 설레는 말인가! 제주 중선농원에서 수십 년간 감귤을 품어주었던 창고의 ‘죽음’이 아닌, 문화 나눔의 ‘시작’을 보았다.

귤 창고의 노후한 흔적과 자연광을 그대로 살린 뒤 안쪽에 하얀 벽체를 세워 마감한 갤러리 2 전시 공간. 중선농원 오픈 후 두 번째 전시로 <백남준 언플러그드>전을 11월 12일부터 2017년 2월 28까지 진행한다. 친구, 작품의 협업자 등의 관계를 통해 ‘사람 백남준을 기억하는 지인들의 소장품과 설치 작품, 자료를 아카이브 형식으로 선보인다. 
자연 VS. 인공 : 대비의 아름다움
중선농원은 국내 외교 안보 권위자로 활동한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와 부인 김재옥 씨가 지난 4월에 개관한 비영리 복합 문화 예술 공간이다. 문 교수는 선친의 땀과 숨결이 서려 있는 감귤 농원을 어떻게 이어갈까 고민이 깊었다고 한다. 부부는 건축가 김원 선생과 그의 제자 최석원 소장, 갤러리를 운영하는 정재호 대표 등 전문가와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끝에 농원을 갤러리, 카페, 라이브러리로 구성한 문화 공간으로 만들었다. 큰 창고는 미술 전시장인 갤러리 2, 작은 창고는 카페와 예술ㆍ인문 도서관인 청신재晴新齋, 거주 공간은 게스트 하우스 태려장太麗莊으로 변신했다.

귤밭 가운데 농기구를 보관하던 작은 창고는 라이브러리로 변신했다. 스윙 창 너머로 보이는 귤밭 풍경이 일품.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한 후 이곳에 들러 예술ㆍ디자인 서적을 보며 머리를 식히기 좋다. 
“중선농원은 시부모님께서 노후를 보내시던 감귤 농장이에요. 농사를 짓지 않는 후손에게 과수원은 그리 축복스럽지만은 않은, 어쩌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지요. 경제적으로는 귤밭을 없애는 게 이득이지만, 부모님이 일궈온 땅의 의미와 난개발의 문제점들을 생각하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고요. 마침 딸을 통해 잘 알고 지내던 갤러리 2 정 대표가 제주에 쉬러 왔던 때라, 이곳을 보여주며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을 의논했어요.”

무릇 지나온 길을 기억해야 새로운 지도가 완성되는 법. 게스트 하우스의 ‘태려’ 라는 이름은 부모님의 함자에서, ‘청신’은 손주들의 중간 이름에서 각각 따왔다. 이름을 짓고 보니 장소에 대한 흔적과 기억,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와 닿았다. 김재옥 씨의 은사이기도 한 김원 선생은 농원을 둘러보고 딱 두 가지를 조언했다. 첫째, 터의 무늬, 즉 자연을 없애는 오만함을 범하지 말 것. 둘째, 멋있게 하기 위해 과거의 흔적을 파괴하고 덧칠하지 말 것. 이 두 가지를 명심하니 공간 구성과 레노베이션의 명확한 기준이 세워졌다.

라이브러리 앞에 선 문정인・김재옥 부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라이브러리는 손주들 이름에서 한 자씩 따 청신재라 이름 지었다. 
가족과 지인들이 이용하는 게스트 하우스는 1층과 2층이 분리된 옛 구조를 그대로 살렸다. 부부는 제주에 오면 주로 2층에 묵는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제주 돌을 활용해 파티션을 세웠다. 옛날에는 마치 계단이 붕 떠 있는 것처럼 불안정했는데, 파티션을 세우니 집과 파티션 사이에 프레임이 생겨 늘 보던 풍경이 새롭고, 제주의 바람을 오롯이 만끽할 수 있어 좋다. 2층 덱으로 나가면 나지막한 귤나무와 언덕의 방풍림까지 농원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집 바로 옆 라이브러리는 농원을 방문하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가운데 널찍한 책상을 두었다. 김재옥 씨와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다 미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딸 혜연 씨가 평소 관심을 갖고 모은 정원ㆍ건축ㆍ미술 관련 서적을 분야별로 두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작가의 작품 도록도 상당히 많은데, 그중 배병우 사진작가가 제주 바람을 담은 풍경風景(‘Windscape’)은 이곳에서 봤을 때 감동이 배가된단다. 창가를 향해 배치한 단정한 책상은 문 교수가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는 사색의 자리. 김재옥 씨는 책상 가운데 앉아 바라보는 귤밭 풍경을 가장 좋아한다. 창문과 문은 모두 스윙 방식으로 제작해 바람이 잘 통한다.

안쪽에 자리한 갤러리 2 전시장은 창고의 단순한 구조를 그대로 살려 하얀 벽체로 마감했다. 농원 입구에 자리한 카페는 라운지 역할을 한다. 파란색 가구와 격자 책장이 돋보이는 카페 공간은 서양화가 홍승혜 씨가 디자인했다. “농원에 오면 먼저 갤러리 2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겠죠. 작품을 보겠다는 목적은 분명하지만 물리적으로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은 바로 카페 라운지가 아닐까 싶었어요. 작품으로서 ‘공간’을 경험하게 할 수는 없을까 고민했고, 정재호 대표와 베이징의 카페 인테리어를 진행한 적 있는 홍승혜 작가가 적임자라고 생각했죠.”

카페는 서양화가 홍승혜 씨가 공간 디자인을 맡았다. 컬러만으로 그래픽적 느낌을 주는 책장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빅 테이블이 천장의 나무 보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옛 귤 창고의 모습 그대로 보가 살아 있는 천장을 타고 흐르는 선인장은 김수현작가 작품이다. 진짜 식물이 아닌, 프린트로 제작한 페이크 선인장을 들인 이유가 궁금했다. “과수원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자연인데, 꼭 실내에까지 진짜 자연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나”라는 현답이 돌아왔다. 자연과 인공의 콘트라스트는 가구를 고를 때도 적용했다. 의자, 사이드 테이블 등 이동식 가구는 카르텔의 플라스틱 제품. 제주의 습도를 이겨내는 기능성, 자연과 최대한 대치를 이루는 인공미 두 가지 요소를 갖췄기 때문이다. 하얀 벽과 노란 불빛 아래서 작품을 감상한 뒤 돌아 나와 자연으로 눈을 씻고, 다시 인공적 공간에서 페이크 자연과 함께 진짜 자연의 소중함을 느낀다는 공간적 시나리오 역시 염두에 두었으리라.

중선농원은 문 교수 내외와 건축가, 작가, 갤러리스트 등 다양한 인적 자원이 모여 합을 이룬 결과물이다. 50년간 꿋꿋이 자리를 지킨 나무 그늘 아래서 작은 공연을 펼칠 수도 있다.
기억 VS. 미래 : ‘내일’을 크리에이트하라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몇 학기를 이탈리아 캠퍼스에서 보낸 적이 있어요. 양적인 성장을 앞세우던 미국 문화와 달리 시간이 거꾸로 흐른 듯 여전히 고풍스러운 교황의 여름 궁전이 있고, 올리브나무가 한가롭게 펼쳐진 풍광이 무척 아름답더군요. 몇 세기가 지나 멀리 문화가 다른 동양인이 와서도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을 유지하려는 노력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고, 언젠가는 저 역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나 하나를 위한 투자라면 쉽게 결정하지 못했을 텐데, 나눈다고 생각하니 이 모든 과정이 어려우면서도 설레더라고요.”

천장을 타고 흐르는 선인장은 김수현 작가 작품. 
김재옥 씨는 중선농원을 오픈하며 가장 먼저 길가에 반사거울을 달고 방풍림을 베어냈다. 좁은 길에 비해 교통량과 과속하는 차량이 많아 아찔한 순간이 많았는데, 나무를 베고 낮은 돌담을 쌓으니 지나는 차들도 멈추어 서서 농원 풍경을 감상한단다. 농원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낡은 수조는 선친 때부터 사용하던 물 저장고다. 선친이 감귤 농사를 짓기 전에 전기 사업을 했는데, 그래서 이 농원에는 (당시에는 획기적으로) 전신주가 두 개나 들어왔다고 한다. “과거에는 모더니즘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산업 시대, 반대되는 개념이잖아요. 이제 기능적으로 필요하지는 않지만, 우리 가족의 스토리를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상징인 만큼 그 흔적을 남겨두기로 했지요.”

김재옥 씨가 중선농원을 오픈하고 느끼는 또 다른 행복은 바로 잡초 뽑는 일이 다. 지인들은 여유 있게 여행도 다니고 즐길 일이지 나이 들어 힘들게 왜 일을 벌이냐 걱정 어린 조언도 한다. 하지만 은퇴 후 새로운 일, 비전문가도 할 수 있는 ‘잡job’을 ‘크리에이트create’ 했다는 게 농원이 지닌 또 다른 미래다. “제가 워낙 정원 가꾸는 일을 좋아해요. 정원은 단순히 관상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고 장르죠. 루이 14세 절대왕정 시대의 절도 있는 정원부터 영국의 풍경식 정원까지… 세상에 아름다운 정원은 많지만 제게 가장 큰 울림을 준 정원은 바로 이 귤밭이에요.”

부모님이 거주하던 이층집은 가족, 지인들이 묵을 수 있는 게스트 하우스로 개조했다. 공간 어디서든 창을 통해 사계절을 관망할 수 있다. 
봄에는 밥풀처럼 하얀 꽃이 피어오르고 여름에는 싱그러운 초록 내음, 겨울에는 오렌지 빛깔로 온 천지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귤밭. 다시 계절이 바뀌고 중선농원의 겨울은 노란 귤 열매로 시작한다. 커다란 창을 통해 귤밭이 보이는 서재는 계절을 관망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초록 이파리 사이로 눈이 시리도록 청명한 파란 하늘을 마주하면 어느새 복잡한 머릿속이 맑아진다.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자연과 교감하며 우리는 지극히 작은 순환의 일부라는 것을 느낀다면 더없이 감사할 일이다.

게스트 하우스 태려장의 1층 거실. 작은 방을 터서 부엌으로 개조하고, 앞에 다용도 테이블을 두었다. 폴딩 도어를 열면 중선농원 입구가 펼쳐진다. 플라스틱 의자는 카르텔 제품. 
‘다다익선’ VS. ‘less is more’ : 작고 더 깊게
갤러리 2는 중선농원의 두번째 전시로 11월 12일 <백남준 언플러그드(Namjune Paik Unplugged)>전을 시작했다. 백남준 10주기라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워낙 많은 전시가 진행 중인데, 하필 또 ‘백남준’인 이유가 궁금했다. “무엇보다 사람 백남준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공로명 동아시아재단 이사장께서 백남준 선생과 중학교 동창이셨는데, 찍다가 망친 판화지에 편지처럼 글을 써주시곤 했대요. 그 작품이 이번 전시의 단초가 되었지요. 공간의 전체 플랜을 세워주신 김원 선생도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한 ‘다다익선’ 작업을 함께 하신 인연이 있고요. ‘다다익선’ 진행 과정을 담은 도록과 작품의 설계도, 기사 스크랩 등 김원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기록들을 아카이브 형식으로 전시장 한편에 풀어놓았지요.”

작은 창고를 개조한 라이브러리. 지붕과 벽체 사이를 폴리카보네이트로 마감해 자연광이 은은하게 투과된다. 마주보는 책장의 높이를 달리하고 정면 벽의 비스듬한 라인을 살려 역동적이다. 누구든 잠시 책을 보다 갈 수 있도록 실용적인 빅 테이블을 두고 빨간색 의자로 컬러 포인트를 줬다. 
정 대표는 이번 백남준 전시야말로 중선농원의 작고 단순하되 깊은 꿈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강조한다. 친구, 작품의 협업자 등의 관계를 통해 그들이 기억하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시간으로, 작가를 더 가까이에서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 실제 공로명 이사장의 소장품인 드로잉은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사람 백남준의 인간적이고 재치 넘치는 면모가 듬뿍 담겨 오랜시간 눈길을 사로잡는다. 김종학 작가가 소장한 새장 ‘케이지 5’와 김수경 문인의 소장품 ‘블루 붓다Blue Buddha’ 설치 작품 역시 작가와 소장자의 인연과 스토리를 상상하게끔 한다. 김재옥 씨는 “많은 작품을 봐야만 백남준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Less is more’, 즉 작은 것을 더 많이,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 포인트”라며 혼자 보는 전시로 적극 추천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최근 제주도에 돌, 바람만큼 많은 것이 미술관이라고 한다. 수많은 미술관 중 과연 어떤 미술관이 될 것인가? 작품을 보다가 잠깐 나와서 산책하고 책도 읽고 차 한잔 마시는 여유… 무엇보다 혼자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자기 안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전시장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크다. 문화 공간 역할로 로컬 커뮤니티 역시 중요한 대목이다. 전시 기간 중 김원 선생을 비롯해 백남준 작가에 관한 다채로운 강연을 진행하는데, 근처 대안 학교 학생들이 강연을 듣고 작가 백남준에 관해 각자의 시각으로 또 다른 작품을 만들어 전시를 펼칠 예정이다. 귤나무밭을 관리하는 사회적 기업 김우진 대표의 곶자왈 강연이나 귤나무 이파리를 활용해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드는 등의 클래스도 계획 중이다.

그림같은 감귤 농원의 초겨울 풍경. 이탈리아의 오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어우러진 모습에 감명받은 김재옥 씨는 제주 감귤 농장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라 꼽는다. 
사람들은 자연을 경험하고 가치 있는 예술을 가까이하며 순화되고 위로를 받는다.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다면 더 이상 과수원으로 기능하지 않아도 영원히 과수원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믿음을 다채로운 문화 공유로 실천하는 문정인・김재옥 부부. 중선농원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에 부합하는 콘텐츠를 채우는 데 함께한 건축가, 갤러리스트, 작가, 사회적 기업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부모님이 귤을 재배하면서 품었던 꿈을 기억하기 위해, 과수원이 어떤 식으로 존재했고, 앞으로도 어떻게 존재해야 한다는 걸 다음 세대에도 보여주기 위해 말없이 의미를 실천 중인 중선농원의 내일이 기대된다.

글 이지현 기자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