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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작가 손부남 자연에는 우열이 없다
충북 진천공예마을, 예전에 옥을 캐던 곳이라 옥동예술마을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에 손부남 작가의 작업실이 자리한다. 그는 직접 설계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정원의 나무와 화초, 채소를 기르며 소담한 다실에서 차와 함께 자연을 즐긴다. 그의 예술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자연에 있다.

 다실 겸 사랑채에서 차를 즐기는 손부남 작가. 이곳에서 밖을 내다보며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를 감상하는 일은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다실을 겸하는 사랑채 앞으로 작은 도랑이 흐르는 야트막한 동산에 숲이 우거져 있다. 바람에 온갖 나무가 스치는 소리와 희미하게 퍼지는 수국 향이 차 맛을 더한다. 8평(약 26.4㎡) 남짓한 소담한 다실이지만 문을 열어두니 탁 트이는 느낌. “15년 전 구입해둔 절간에서 목재를 가져다 지었습니다. 여기 앉아서 차 마시며 바깥 풍경을 보는 걸 참 좋아하지만, 작업이 바빠서 손님이 오셔야 겨우 와볼 수 있는 곳이지요.(웃음)” 손부남 작가는 진천공예마을이 조성된 2008년, 공예가가 대부분인 이곳에 유일한 회화 작가로 입주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동산에 널찍한 돌을 놓은 것. 그 위에 중국에서 사 온 작은 돌 탁자를 두었다. 여름에 지인이 찾아오면 사랑채 대신 돌 위에 앉아 도랑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신다.

농가에서 헛간을 사다 이곳으로 옮겼다. 정원을 가꾸는 데 쓰는 물건은 모두 중고품.
생거진천生居鎭川
“‘생거진천,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이라는 뜻이지요. 그만큼 진천은 살기 좋은 곳입니다. 좀처럼 물난리와 가뭄이 없고 토양은 비옥하지요. 이곳의 자연에는 제가 원하는 그림의 소재와 색상, 질감, 모양이 주변에 넘쳐납니다. 나무마다 초록이 다 다르고, 화살나무의 단풍은 환상적이지요. 이곳에선 자연의 미감이 작품에 절로 흡수됩니다.”

손부남 작가는 충북을 대표하는 중견 회화 작가다. ‘상생’이라는 주제로 새와 풀, 나무, 인간 등을 그리는데 일견 선사시대 동굴 암각화를 연상시킨다.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논문을 천전리 암각화에 대해 썼습니다. 고고사학과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웃음) 암각화는 회화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선적인 묘사가 탁월합니다. 꿈틀대는 본능적 에너지, 생명력도 느낄 수 있고요.”

1 작업실과 사랑채 전경. 작업실 외벽은 구조물 같은 느낌을 내고 싶어 거푸집을 떼낸 콘크리트를 그대로 사용했다. 2 도예가 김장의 작가의 백자에 그림을 그린 작품들. 3 폐기 처리한 가로등 윗부분을 떼내어 중국에서 사 온 불상 머리에 얹었다. 
지역과 시대를 뛰어넘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옛 벽화처럼 손 작가의 그림 역시 해석할 것 없이 즉각적으로 다가온다. “<스타워즈>의 미래 사회에서 우두머리끼리는 검으로 싸우지 않습니까? <어벤져스>에도 망치 들고 싸우는 영웅이 나오고요.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원초적인 것에 대한 욕구는 늘 있을 겁니다. 그걸 통해 폭넓게 소통할 수 있겠지요. 본질적이고, 장식 없는 암각화가 저와 잘 맞았습니다.”

손부남 작가는 자신의 그림과 작업실 건축에 대해 설명하며 ‘나다운 것’을 강조한다. 나답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 암각화를 닮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듯이, 자연 속 작업실을 짓는 일 역시 그에겐 ‘나다운것, 내가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그는 직접 설계해, 콘크리트 작업실을 지었다. “건축을 따로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캔버스에 구도를 잡고, 선을 긋고 색채를 입히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건물을 설계했지요. 도면이 아니라 공간에 직접 서 배치를 생각했습니다. 눈이 가는 쪽에 창을 내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론보다는 직접 부딪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제 그림처럼 작업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설계했습니다.” 경사진 부지의 지하엔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 공간을 두었고, 그 위에 천장이 6m에 달하는 널찍한 작업실과 생활 공간이 자리한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환기와 천장 높이. 지하 갤러리에 바람이 들도록 서쪽으로 창을 냈고, 작업실로 통하는 벽 쪽엔 중국에서 사 온 나무 대문을 달았다.

손부남 작가의 작업실 천장 높이는 6m에 달한다. 사다리를 타고 일하는 게 조금씩 힘에 부친다는 그는 10년쯤 후엔 젊은 작가가 마음껏 작업할 수 있도록 작업실을 임대하는 것을 고려하는 중이다. 
손 작가는 작업실을 지으며 생활과 예술이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단청으로 장식한 나무 대들보를 가로로 놓아 공간을 구분한 작업실은 여행하며 사 모은 온갖 잡동사니와 크고 작은 작품, 빈 캔버스로 가득했다. 한쪽엔 백자 도자기에 그림을 그린 작품이 놓인 찬장이 있었다. 그는 진천공예마을에 거주하는 도예가 김장의 작가의 백자에 새와 인간, 나무와 풀을 그린다.


“캔버스에 구도를 잡고, 선을 긋고 색채를 입히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건물을 설계했지요. 도면이 아니라 공간에 직접 가서 건물의 배치를 생각했습니다. 눈이 가는 쪽에 창을 내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론보다는 직접 부딪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제 그림처럼 작업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설계했습니다.”


회사후소繪事後素
“공자는 ‘어떤 일을 할 때는 흰 바탕이 잘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회사후소’라는 말을 했습니다. 근본이 잘되어 있을 때 그 위에 뭔가를 얹을 수 있겠지요. 작업과 생활에 두루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입니다. 잘 만든 도자기 위에 그림 그리는 긴장감을 좋아합니다. 저 혼자 작품을 완성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지요. 과거엔 도공과 화공이 함께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었어요. 현대로 오면서 분야를 세분화해 자기 것만 하느라 한계가 드러납니다. 저는 곁눈질을 자주 하는 작가입니다.(웃음)”

최근엔 아이패드로도 그림을 그린다. 몇 년 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사는 아들이 사서 보냈는데, 그림 그리기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고. “새로운 매체로 작업하면 숙달될 때까지는 초보 수준에 머무르는데,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결과물이 나오곤 합니다. 혁신적 예술은 새로 시작하는 젊은 작가에게서 나오게 마련이지요. 기성작가로선 새롭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익숙하지 않은 매체를 배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왼쪽) 사랑채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오른쪽) 작업실 아래 주차장에서 동산을 바라보았다. 돌 벽 위에 기와를 차곡차곡 쌓은 모양이 재미있다. 
그가 이곳에 작업실과 사랑채를 짓기 전, 경사진 대지에 흙과 자갈을 깔고 나무와 풀을 가꾸는 데만 1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 역시 근본 바탕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모네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었지요. 그 정원에서 수많은 걸작이 나왔고요.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삶을 가꾸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되묻고, 확인하는 일이니까요.”

손 작가는 정원에 화초뿐 아니라 채소도 재배한다. “농약을 안 치니 수확량은 보잘것없습니다. 하지만 그 맛은 일품이지요. 수확할 때가 지나도 먹지 않고 그냥 놔두기도 합니다. 부추도 당근도 그 꽃이 참 예쁘거든요.” 정성 들여 가꾼 자연 속에서 작업하며 생활하는 그에게 친환경적 삶에 대해 물었다. “화가로서 친환경을 이야기하기가 부끄럽습니다. 물감이 다 화학제품이거든요. 다 쓴 물감을 물에 희석해서 버릴 때 늘 자연에 미안한 마음이 있지요.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오염 물질을 배출하지 않을 수는 없겠죠. 그러니 덜 쓰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스스로 소비를 자제해야겠지요.”

폐기된 거푸집과 작가가 수집한 낡은 오브제를 결합해 완성한 작품 ‘황폐함에 어루만지다’. 
손 작가의 작업실엔 새것보다 낡고 헌 물건으로 가득하다. 작업실 바닥에 깐 마룻바닥 역시 시골 학교 강당에서 쓰던 것. 새로 구입하는 것보다 결코 저렴하지 않지만, 세월의 흔적과 손때가 좋았다. 손부남 작가는 그런 물건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사람 좋게 웃고 있는 불상엔 가로등 윗부분을 모자처럼, 또 철제 공자상엔 스타벅스 종이 컵 홀더를 망건처럼 씌웠다. 푸줏간에서 고기를 걸어놓던 갈고리엔 반짝거리는 액세서리를 달았다. “이질적 요소가 묘하게 어울릴 때 느껴지는 편안함이 있습니다. 자연을 관찰하다 보면 자연엔 우열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어울릴 수 있으니 버려진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의 이런 취향을 작업으로 확장한 것이 ‘황폐함에 어루만지다’라는 제목의 최근 연작이다. 작가가 수집한 온갖 오브제를 버려진 거푸집에 부착한 작품들은 위트가 넘치고, 조형적으로도 흥미롭다. 쓸모를 잃은 물건들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근사한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선 어떤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어떤 분이 전시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퇴직한 후 2년간 내적 갈등으로 마음이 무척 황폐해졌는데, 폐기된 거푸집이 작품으로 거듭난 걸 보니 자신도 어떤 기회가 되면 이렇게 다시 쓰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요. 사실 제가 이걸 만들때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지만요.(웃음)”

작품을 전시해놓은 지하 갤러리.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물건들이 작가의 작품과 잘 어울린다. 
승거목단繩鋸木斷
손부남 작가는 고등학교 때까지 검도를 했다. 상대를 마주하고 모든 걸 임기응변으로 해결해야 하는 검도의 의외성은 매력적이었지만, 평생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7개월 정도 학생을 가르친 것 외에 그는 예순이 넘은 지금껏 전업 작가로 살았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계속 바꿔나가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라갔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좋아하는 그림 그려서 아이들 공부시키고 집을 지었으니까요. 물론 그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의 작업실에 액자로 걸린 ‘승거목단’이라는 글귀가 바로 그런 뜻이다. 노끈으로 나무를 벤다는 의미. 손 작가는 관심 가는 자연과 사물을 계속 관찰하고 새로운 쓸모를 찾는 등 궁리를 멈추지 않는다. “예술이 엄숙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려울 것이 뭐 있겠어요. 느낌을 전달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말처럼 쉽지 않은 일. “부단히 노력해야죠.” 작가의 너털웃음이 서쪽 창에서 불어온 바람을 타고 작업실 공간에 나직하게 퍼졌다.


글 정규영 기자 사진 김동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