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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성심병원 박홍근 원장, 메르씨엘 윤화영 셰프가족 가족 그 이름으로
지역을 거점으로 한 중소 병원이 펼치는 것이라기엔 그 규모와 내공이 만만치 않은 문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구포성심병원’의 박홍근 원장 가족. 그리고 부산에서 정통 프렌치의 격식을 갖춘 희귀한 레스토랑 ‘메르씨엘’을 운영하는 사위 윤화영 셰프. 한 몸에서 나뉜 가족으로, 결혼을 통해 오지랖 넓은 정으로 묶인 가족이 되어 사는 이들이 만들어낸 작고도 단단한 기적을 들여다본다.

프렌치 레스토랑 메르씨엘의 오너 셰프 윤화영, 레스토랑과 비스(아트 갤러리와 숍으로 이루어진 복합 문화 공간)로 구성한 메르씨엘의 운영을 책임지는 박현진 대표 부부. 

밤새 치근거리던 바닷물이 마침내 편편한 얼굴로 돌아온 아침, 잠시 동백섬 숲에 바람이 일었나 보다. 풀잎들이 작게 몸을 떤다. 이 이름 모를 풀잎 안에 수억만 개의 우주가 담겨 있음을 그 가느다란 떨림으로 알겠다. 동백섬이 바로 내다보이는 해운대의 한 아파트로 그들을 만나러 온 길이다. 부산 구포에 자리한 중소 병원이지만 눈여겨볼 만한 문화 프로젝트들로 서울까지 입소문 난 구포성심병원의 박홍근 원장 가족. 그의 딸 박현진 씨는 부산을 근거지로 라는 꽤 괜찮은 잡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구포성심병원의 후원으로 제작한다). 사위 윤화영 씨는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프렌치 셰프다. 아들 박시환 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원장으로 구포성심병원을 이끌고 있다. 필연과 운명적 선택이 있어야 가능한 집단, 가족으로 살며 에너지의 삼투압을 이뤄내는 이들의 이야기, ‘나와 같은 너’를, ‘너와 같은 나’를 당기고 밀어주면서 사는 가족 이야기를 들으러 온 참이다.

동백섬이 내다보이는 해운대의 아버지 집에 가족이 모였다. 박홍근 원장 부부, 윤화영・박현진 부부와 아들 박위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들에게 아버지는 그저 생물학적 유전자만 나눠준 이가 아니었다. 잡티가, 삿됨이 섞이지 않은 흙이 푸른 곡식을 살찌우듯 이들에게 아버지는 근사하고 확신에 가득 찬 삶을 몸소 가르쳐준 이다. 아버지 박홍근 원장은 구포에서 나고 자라고 결혼하고 아이를 만들고 나이들었다. 구포는 그에게 고향 이상의 땅이었다. “구포초등학교 바로 밑에 선친 (낙동강주조주식회사 설립자 박건자)이 운영하던 낙동강 소주가 있었어요. 한국전쟁으로 피란민이 임시 수도인 부산에 모여들 땐데 술 고아 내면 팔리고 또 팔리고 했지. 우리 선친이 시인 기질이 있어 술병에 ‘낙동강’ 가사(낙동강에 대한 향토애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일간 신문에 가사를 모집해 뽑은 가사)를 인쇄해 넣었다고. 그러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 낙동강 소주가 망했어요. 그 뒤로 동경여전에서 자수 전공으로 유학한 어머니가 자수 공방을 열어 10남매를 키워내셨지. 형제들이 내리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고.”

구포성심병원은 1983년 전문 분야인 내과와 정형외과를 바탕으로 개원해 30만 북구인에게 병원 이상의 장소로 사랑받아왔다.

당시도 지금도 구포는 분투하듯 사는 서민들의 동네였다. 찰찰 넘치는 생의 비린내 속 구포시장과 맞닿은 자리에 그는 1983년 구포성심병원을 열었다. 전국 의사 고시에서 4등을 할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갖춘 그가 학교에 남지 않고 택한 길이었다. “옛날부터 구포라 하는 자리가 역촌으로 사람들 심성이 강강하고, 환경이 여러모로 척박해요. 환자 태반이 감염성 질환이야. 여름에 홍수 한번 들면 농가진에, 이질에, 장티푸스 환자로 가득차고, 정형외과 영역도 척추 카리에스, 결핵성 관절염 같은 감염성 질환이 많아요. 우리 병원이 덕천로터리에서 중앙 냉난방 시설을 갖춘 첫 건물인데 동절기에 온수를 넣으면 화장실 문이 안에서 잠겨버려. 환자 보호자들이 애들 다 데리고 와서 목욕시키느라. 그런 시절이었어요. 구포뿐 아니라 북구(현재의 북구, 사상구, 강서구)는 부산 안에서도 경제적ㆍ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이었지만 내가 태어난 동네니까 애착도 있고, 사명감 갖고 병원 운영했다고.” 짓궂고, 매섭고,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눈물 울컥 치솟는 삶의 수많은 얼굴이 오가는 구포 시장 입간판 바로 옆에서 30여 년을 함께한 병원이었다.

인구에 비해 의료 기관도 턱없이 부족했던 이 동네 사람들에게 구포성심병원은 병원 이상의 곳이었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밀양에서, 김해에서 염소 몰고 장닭 몰고 수수 많은 소리와 사연들을 몰고 온 이들에게 이 장소는 이벤트처럼 꼭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실제로 장날이 되면 환자 수가 두 배 가까이 많아질 정도였다). 매일매일 비린내 나는 삶을 흥정하는 고향 마을 사람들의 삶을 위해 그는 무언가 하고 싶었다. 처음엔 복지관, 학교 등지에서 무료 건강강좌와 무료 건강검진을 했다. 이런 활동을 하며 구포 사람들이 문화생활이나 삶의 여유 같은 걸 찾기엔 너무 고단한 삶을 살고 있음을, 또 마땅한 문화 공간조차 없음을 깨달았다. 아픈 몸 치료하러 들렀다 피곤한 마음도 쉬어 갈 수 있는 그런 병원을 한번 만들어보자고 작심했다. 평소 좋아하거나 의미가 있는 그림들을 병원 곳곳에 전시하고(유명 작가의 작품뿐 아니라 소년 소녀 가장을 위한 자선 바자회나 각종 후원 행사에서 구한 아마추어 작가의 그림도 함께 걸었다), 철 바뀔 때마다 야외 음악회를 열어 구포 사람들을 초대했다. 의료 건강 토크쇼를 꾸리다 다양한 문화 강좌를 시작하게 됐다. 그 결정체가 바로 입소문 난 ‘심아카데미’로, 병원에서 운영하는 학기제 문화 강좌다. 건강 강좌뿐 아니라 미식 역사 강좌, 요가 강좌, 개인 자산 관리 강좌, 공공 미술 강좌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다.

박현진 씨가 만드는 . 구포성심병원의 후원으로 제작하는 계간지로, 부산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잡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병원의 문화 프로젝트 중 하나가 다. 딸 박현진 씨가 만드는 이 잡지는 문화와 예술, 여행, 사람 이야기를 담은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으로, 부산의 오피니언 리더를 위해 무료 배포하는 계간지다. “술병에 낙동강 노랫말을 적어 넣은 할아버지 피를 대물림해서인지 아버지의 자식들은 어릴 때 부터 가족 문예지 <종달새> 같은 걸 만들었대요. 구포성심병원에선 1990년대 초부터 타블로이드판의 월간 소식지를 만들었고요. 부산 시내의 어느 대학 병원보다도 먼저 원보를 낸 거죠. 아버지도, 저도 병원 소식만으로는 콘텐츠에 한계가 있고 지역 주민과 좀 더 의미 있는 소통을 하고 싶어 했죠. 그렇게 해서 가 탄생했어요.” 병원의 후원으로 만드는 병원 원보라기엔 그 밀도가 훨씬 촘촘하고 폭이 넓고 깊이도 깊은 잡지다. 이 병원이 도모한 여러가지 일도 지역 거점의 중소 병원이 해낸 것이라 하기에 그 밀도와 폭과 깊이가 만만치 않다.

자식이 승업承業하는 것만큼 큰 효도가 없다는데, 아들 박시환 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형외과 의사로, 구포성심병원의 부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성실하고 참한 농사꾼처럼 마음을 닦고 환자를 돌보며 산 아버지 뒤를 가열하게 따르는 중이다.

부자지간이자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정형외과 선후배 간인 박홍근 원장과 박시환 부원장. 올 8월 종합병원으로 승격한 구포성심병원을 이끄는 주역이다. 
“아버지와 저는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정형외과 1호 부자 동문이에요. 제가 학교 다닐 때까지도 아버지는 스타셨어요. ‘느그 아버지 시험지가 족보였다’는 대학 병원 원장님도 많았고, ‘가르치던 학생 중 천재가 몇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느그 아버지’라고 전하는 은퇴 교수님도 있었으니까요. 공부도 잘하셨지만, 무엇보다 원칙을 가지고 성실히 살아온 삶 자체가 제겐 정면교사죠. 지역을 기반으로 한 큰 병원이기 때문에 지역민에게 그만큼 되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이러저러한 활동도 하셨고, 종합병원 승격도 오랫동안 미루셨죠(종합병원이 되면 치료비 중 지역민의 본인 분담금도 높아지고, 할증 액수도 올라간다). 일찌감치 종합병원이 되어야 할 규모인데도요. 간호사 수급 문제나 지역 응급 의료 기관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올 8월 종합병원으로 승격하긴 했지만요. 고향 땅이 요구하는 바에 순응해서 병원을 발전시키는 게 옳은 게 아닌가 늘 생각하시죠. 정도 경영, 정도 경영 외치시며 늘 올바른 가치관 안에서 움직이려 하시니 사실 병원이 좀 더 크지 못한 점도 있죠. 하하. 하지만 지역에서 존경받는 의사로, 테크니컬하면서도 인술을 펼치는 의사로 남은 아버지는 제 롤모델이에요. 그저 저는 산만디를 전자서(‘저 먼 산꼭대기를 향하여’ 라는 뜻의 부산 사투리) 간다는 심정으로 하고 있죠.” 자기 신화를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 천지인 세상에서 이런 아버지를 두었다는 것은 행운이다.

“나는 뛰어난 의사보다 멋진 의사, 그것도 참 멋진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자기 직업이 멋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자부심이 있어야 가능하거든. 밖으로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보다 자기 자존심을 찾는 거지 뭐. 참 멋지다, 이거 하나만 잘해도 도가 트이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 병원 원훈이 ‘성실하게 행동하고, 사랑으로 봉사하며 더불어 발전하자’인데, 사실 우주의 기본 원소가 성실이라고. 그게 쌓이고 시간이 공고해지면서 나중에는 우주를 이루지. 성실 하나만 파도 끝이 없어요. 나는 그저 성실하게 살고 행동한 것밖에 없지 뭐.” 말 그대로 성실하게 살아 삶의 옹이가 박힌 진짜 철학을 지니게 된 아버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자식들에게 부드러운 회초리가 되고 있다.


(왼쪽) 12년 동안 파리에서 활동하다 아내의 고향인 부산에 자리 잡은 윤화영 셰프. 그는 메르씨엘에서 프렌치 퀴진의 클래식한 조합을 엄밀하게 준수하는 요리를 선보인다. (오른쪽) 메르씨엘 2층 브라스리에 자리한 ‘막스MACS의 방’. 젊은 아티스트 그룹 막스가 존재에 대한 질문을 유머와 위트로 익살스럽게 표현한 공간이다.
멋진 의사를 닮은 멋진 셰프가 되리
그리고 그의 사위 윤화영. 그는 르 코르동 블루와 프랑스 국립 고등조리학교를 졸업하고, 오텔 드 크리용, 피에르 가니에르 파리, 알랑썽데랑스, 포시즌스 호텔 V 파리 등 유수의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정식 채용돼 일한 1세대 요리사다. 오로지 실력으로 성공이라는 개선문 앞에 선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부터 국내 셰프계의 ‘워너비 스타’ 였다. 그가 아직 양명하지 못한 요리사일 적에 딸을 주십사 청했더니 그 장인 어른은 “자네도 칼잡이고 나도 칼잡이고, 그럼 됐네” 한마디를 건넸다. 

파인 다이닝의 불모지 부산에서 4년 넘게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메르씨엘.
윤화영 셰프와 박현진 씨는 지난 2012년 한국으로 돌아와 바다 냄새 찡하게 엉겨오는 해운대 달맞이고개 위에 ‘메르씨엘’이라는 프렌치 레스토랑을 열었다. 이곳은 지금 부산에서 대기업이나 호텔 소속이 아닌 개인 업장의 파인 다이닝을 ‘파인 다이닝’이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유일무이한 곳이다. 정통 프렌치의 격식을 갖춘 몇 안 되는 레스토랑으로, 내로라하는 우리나라 톱 셰프들이 부산에 오면 꼭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메르씨엘은 해운대 달맞이길,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절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곳에 자리 잡았다. 
“이 풍경을 보고 나서는 서울로 가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부산은 ‘그 많던 셰프는 다 어디로 갔을까’ 란 말이 있을 정도로 오너 셰프에겐 참 혹독한 곳이죠. 모든 재료가 서울에서 경매를 거쳐 다시 내려오는 유통 구조 때문에 서울보다 재료값이 15~20% 비싸고, 대기업, 회계 법인, 법무 법인, 대학 병원처럼 돈 좀 버는 40대(레스토랑의 주요 고객)의 일터는 모두 서울에 있고. 인천국제공항보다 큰 파리의 식자재 도매시장에서 최고 품질의 식자재만 봐오다 한국에 오니 선어는 거의 없고 활어조차 안 좋은 피가 돌도록 너무 험하게 다뤄 어떤 노력을 해도 매운탕 맛밖에 안 나는 재료뿐이고요. 저보고 성공했다고들 하는데 울고 다닌 세월이 얼마인지…. 식자재 시장에 적응하고 좋은 재료를 찾아내는 게 가장 힘들었죠. 프랑스 요리의 핵심은 ‘계절성과 지역성’인데 말이죠. 그걸 살리려고 될 수 있으면 우리나라에서 재배한 그 계절의 재료(기장의 멸치, 대저의 토마토, 원동의 딸기처럼)에 요리사의 기술을 보탠 다채로운 프렌치 요리를 선보이려고 애는 쓰고 있어요.

기장에서 작은 배를 끄는 어부가 늦은 저녁에 대주는 ‘그날 잡은 신선한 생선’을 받아 손질하고 숙성시켜 프랑스식 조리법으로 만들어내고 있죠. 그렇다고 뉴 코리안은 아니에요. 어떻게 프랑스식으로 바꿀까 고민하지, 한국적으로 바꿀까 고민하진 않으니까요. 처음 메르씨엘의 문을 연 그때나 지금이나 돈 버는 건 큰 차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말이죠, 제가 제일 존경하는 장인어른의 말씀인 ‘멋진 의사가 되고 싶다’가 가슴에 확 와 닿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 벽에 ‘멋진 외식업계의 사람이 되자’라고 붙여놓았죠. 비록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자부심과 긍지를 지니고 살자는 맘으로.” 그는 ‘파인 다이닝의 불모지’라 할 부산에 서 여전히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1 2 대안 공간 ‘오픈스페이스 배bae’가 메르씨엘 지하 2층에 자리 잡았다. 평소 오픈스페이스 배의 전시를 자주 보아온 박현진 대표가 새로운 공간을 찾고 있던 오픈스페이스 배에 레스토랑의 지하 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남편 이야길 하기 전에 먼저 아버지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게요. 아버지가 어떤 생각으로 살아온 사람인지는 병원 운영에 그대로 드러나요. 아버지 병원이 부산 시내 대학 병원 제외하고 1.5 테스라급 MRI를 처음 도입한 병원이에요. 지금은 3.0 테스라급 MRI를 갖추고 있고요.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죠. 사람들이 혹하는 건 로비고, 인테리어다 아무리 말씀드려도 아버지는 그것보다는 늘 원칙, 기본, 내용에 집중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제 남편도 똑같더라고요. 메르씨엘에서 레노Raynaud, 제엘 코케 JL Coquet, 베르나르도Bernardaud 세 메종의 본차이나를 쓰는데 미슐랭 별 2ㆍ3개 이상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쓰는 제품이죠. 그런데 그건 샤넬이나 에르메스 정도만 쳐주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숨은 가죽 장인이 만든, 듣도 보도 못한 제품만 갖다놓은 거나 매한가지예요.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대표 자격으로 제가 ‘사람들이 달팽이, 양파 수프, 안심 스테이크 원하는데 좀 해주면 안 될까?’ 하면 ‘프랑스에서 그건 단체 급식이나 집에서 먹는 거지 돈 내고 먹는 음식이 아니야. 레스토랑에 가는 건 셰프의 기술과 창의성을 감상하러 가는 거지’ 하고 한마디로 일갈하죠. 제가 아버지의 그런 면을 그렇게 답답해했는데도 똑같은 사람을 남편으로 만난 거죠. 하하. 가슴을 치지만 제 속에 그것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있으니 뭐 별 탈 없이 살고 있는 거겠죠.” 원칙이라는 정공법으로 세상과 ‘맞장 뜨며’ 사는 두 남자는 사랑보다 오지랖 넓은 정,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끈끈한 정으로 그렇게 가족이 됐다.


메르씨엘을 찾는 고객에게 또 다른 즐거움과 자극을 주고자 마련한 갤러리 메르씨엘 비스. 1~2개월 단위로 테이블웨어를 비롯한 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공예품을 소개하는 기획전을 열고 있다. 한ㆍ중ㆍ일 삼국의 서로 다른 차 문화를 보여주는 , 일본 장인의 칼, 찜기 등을 전시한 <낭만부엌> 등이 그것이다. 

성실히 사는 매일매일에 우주가 담겨 있다
흩어진 윷가락이 한목에 잡히듯 ‘아버지 곁’이라는 제자리로 돌아온 가족이 함께 맞는 아침이다. 그 볕 좋은 가을 아침이 여우볕처럼 지나가버릴 것 같아 서둘러 가족사진 한 방 박는다. 딸은 볼우물이 환하게 웃음을 잘 무는 어머니 옆얼굴을 빼닮았고, 사위의 선하게 쭉 째진 눈매는 영락없이 장인어른을 닮았다. 카메라 렌즈 안으로 헐겁기도, 도탑기도 한 그 이름, 가족이 보인다. 동백섬 이름 모를 풀잎 안에 수억만 개의 우주가 담겨 있는 것처럼 집약하듯 성실히 살아가는 매일매일에 우주가 담겨 있음을 아는 가족. 그 믿음으로 나와 같은 너를, 너와 같은 나를 당기고 밀어주면서 사는 가족이 그 안에 보인다.


글 최혜경 사진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