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단 레드스텝 가장 보편적인 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연정, 권수정, 강경희 무용수. 이들이 9월 10일 부산 민주공원 원형 램프 무대에 올리는 ‘청소’는 천명관의 소설 <고래>의 문장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에서 모티프를 얻은 창작 무용이다.
전통 춤과도, 현대무용과도 달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해온 이연정, 권수정, 강경희 세 명의 무용수는 맞춰 입은 보라색 치마를 펄럭이며 나긋하면서도 힘 있는 춤으로 널찍한 원형 중정을 수놓았다. “춤이 지닌 보편성이 무엇일까를 고민합니다. 우리가 추는 춤을 남들이 뭐라고 부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 춤일 뿐이니까요. 관객과 소통하고, 그들이 감동할 만한 춤을 추고 싶습니다.” 무용단 레드스텝의 기획자 이상헌 씨는 세 명의 무용수와 함께 부산 민주공원 원형 램프에서 다음 날 열릴 야외 공연을 위한 막바지 연습에서 춤 동작과 동선을 세심하게 다듬고 있었다. 레드스텝은 현재 부산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무용단.
부산시립무용단 부수석을 지낸 한국무용가 허경미 예술 감독이 20년 이상 무대미술을 해온 기획자 이상헌 씨와 의기투합해 지난 2000년 무용단을 창단했다. 첫 공연은 2005년. 짧은 연혁에도 수상 경력이 만만찮다. 지난 2011년엔 말(言)과 춤의 관계를 고민한 작품 ‘외치다’로 부산무용제 대상, 전국무용제 은상을 수상했고, 이듬해부터 부산 민주공원에 상주하며 새로운 공연을 기획하고 지역 주민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허경미 예술 감독의 안식년, 하지만 예술 감독의 부재에도 단원들은 여전히 새로운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전통 무용가 박경랑 풍류가 한류다
장소는 문화공감수정(정란각).
한 손에 부채를 들고 몸을 움직이자 일순 그 자리의 공기가 완전히 바뀐다. 꾸밈없이 간결하지만 박자를 당겼다 놓는 춤사위에 자연스레 경탄했다. 네 살 때 춤에 입문한 박경랑 선생은 지난 50년간 춤을 췄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웃음) 4~5년 전부터 내 춤이 괜찮게 느껴졌습니다.” 곱게 빗어 쪽찐 머리만큼이나 말투도, 몸가짐도 단정하다. 박경랑 선생은 이름난 춤꾼이던 외증조부의 대를 이어 영남 춤의 맥을 잇고 있다. “영남 춤은 부산 사투리처럼 투박하면서도 그 속에 숨은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남성의 멋과 여성의 멋이 함께 녹아 있지요. 직접 춤을 배우진 않았지만 외증조부가 흥얼거리시던 가락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박경랑 선생은 과거의 풍류 문화를 발굴ㆍ재현하는 한편, 문학과 대중가요 등 새로운 장르를 접목하는 실험을 서슴지 않는다. “우리 것을 흩트리지 않은 채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이지요. 우리 풍류 문화를 외국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미난 전통 무용 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힙합 크루 킬라몽키즈 맨바닥에서 비엔날레까지
(왼쪽부터) 댄서 장형우, 배은성, 김지현과 양문창 대표. 이들은 ‘몽키즈 댄스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후배 댄서를 가르치고,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발레 등 다양한 장르의 무용가들과 협연하는 공연을 기획한다. 최근 열린 부산비엔날레에서 ‘혼혈하는 지구’라는 콘셉트에 맞춘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용두산공원 초입의 공터, 초로의 신사들이 격렬하게 춤추는 댄서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촬영을 마치자 구경하던 아주머니가 떡이 가득 든 비닐봉지를 건넨다. 용두산공원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 힙합 음악에 맞춰 춤추던 부산 비보이 B-Boy의 집결지였다. 부산을 대표하는 힙합 크루 킬라몽키즈의 댄서들 역시 이곳에서 춤을 시작했다. “여기만 오면 춤 잘 추는 형들을 볼 수 있었어요. 맨바닥에서 춤추다 구청에서 장판과 음악을 틀 수 있는 콘솔을 빌려주었습니다. 서울과 대구 등에서 비보이들이 찾아오기도 했어요. 부산 비보이들 ‘깡’이 세다, 겁 없이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요. 항상 재미있는 것만 하고 싶어서 고등학생이던 15년 전 친구들과 크루crew를 만들어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킬라몽키즈 대표 양문창은 다부진 몸매의 비보이다. 운동선수 같은 근육질의 장형우 역시 화려한 동작을 선보이는 비보이, 몸집 좋은 배은성은 동작에 힘이 넘치는 크럼핑, 넷 중 가장 연장자이자 키가 크고 몸의 선이 가는 김지현은 관절을 퉁기고 꺾는 파핑과 로킹 댄서다. 한눈에 드러나는 춤꾼의 개성과 그들의 춤이 그대로 일치한다. “자기만의 재미를 연구하다 보면 댄서의 성격과 마음이 춤에 배어나거든요.”
현대무용단 자유 춤은 삶을 은유한다
(상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안희주, 박근태 회장, 안선희, 이언주, 조현배, 박은화 예술 감독. “혼자 할 때보다 모여서 할 때 더욱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개인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잠시 몸을 풀던 무용수들이 바위 위, 풀숲, 나무가 우거진 자연 속에 말 그대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현대무용단 자유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움직임이든 춤이 될 수 있다’는 철학으로 부산 무용의 지평을 넓혀온 무용 단체다. “산과 들판, 바닷속에서도 춤을 춥니다. 지난 2월엔 해운대에서 스킨스쿠버 슈트를 받쳐 입고 춤을 추었지요. 우리는 이걸 ‘자연춤’이라 부릅니다.” 부산대학교 무용학과 박은화 교수는 지난 1995년부터 제자를 중심으로 현대무용단 자유를 창단, 이끌어왔다. “춤은 삶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몸짓으로 삶을 은유하는 것이지요. 날것 그대로의 느낌으로 충만한 부산 춤꾼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지만, 유행에 물들어 지역성이 없어지는 요즘이 아쉽습니다.” 현대무용단 자유는 10월 3일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금정산 고당봉 정상에서 다대포해수욕장으로 이동하며 춤추는 공연을 준비 중이다. 촬영을 위한 짧은 동작에도 무용수들의 몸은 온통 벌레에 물리고 나무와 바위에 긁혔다. “자연은 보기에는 좋지만 그 속에 들어가면 정말 치열한 곳입니다. 자연에서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하고, 생각과 감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에너지가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알기 위해 자연과 만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부산의 춤꾼들 손 하나 드니 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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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호남은 소리, 영남은 춤이라 했다. 거친 산세와 드넓은 바다가 함께하는 땅에서 부산 춤꾼들은 호방한 춤사위로 특유의 활달한 기질을 드러냈다. 전통 춤 명인부터 힙합 댄서까지, 항도 부산을 대표할 만한 춤꾼에게 춤을 청했다. 과연 “손 하나 들어서 춤 안 되는 것이 없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