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기, 발톱깎이 그리고 진공청소기. 건대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세 가지 물건입니다. 샤워기가 몸에 닿으면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르는 개, 발톱깎이만 손에 들면 부리나케 도망가기 바쁜 개, 진공청소기 소리가 들리면 구석에서 벌벌 떨며 어쩔 줄 모르는 개가 바로 건대입니다. 건대는 지난 15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특히 목욕할 때마다 욕조에 큰 실례를 하곤 했는데, 혹시 목욕이 개의 소화 기능을 촉진하는 건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죠. 개가 극심한 공포를 느낄 때 원치 않는 배변 행위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건대만큼은 아니었지만 저 역시 이 세 가지 물건이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몇 번은 건대의 발톱을 자르다 피가 날 정도로 물리기도 했으니, 공포심이 생긴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문제는 개를 목욕시키고, 길게 자란 발톱을 깎고, 집을 청소하는 일은 일상에서 외면할 수 없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거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까, 건대를 강하게 제압해 빠르게 끝내야지. 건대도 익숙해지겠지.’ 그러나 이런 저의 기대와는 달리 건대는 결코 세 가지 물건에 익숙해지지 않더군요. 오히려 물건에 대한 공포는 점점 심해져갔습니다. 건대가 세 살쯤 되자 가족 모두가 달려들어야만 무사히 건대의 발톱을 자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럴수록 건대를 다루는 저의 힘도 세져서 거의 건대의 목을 조르다시피 해서야 목욕을 겨우 끝낼 수 있었죠. 지금 생각해도 가장 안타까운 건 이런 전쟁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저도 모르게 건대를 귀찮은 존재로 여기게 됐다는 겁니다. 그렇게 건대는 사람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는 반려견 신세가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쩌다 건대는 샤워기와 발톱깎이, 진공청소기를 무서워하게 된 걸까요? 아마도 생후 3개월 이전(사회화의 골든 타임)에 세 가지 물건을 접하지 못했거나, 접했더라도 그때의 경험이 긍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생각해보니 작고 어린 건대가 진공청소기만 보면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모습이 귀여워 일부러 청소기로 장난을 친 적도 있고, 발톱을 자르기 전 낮은 목소리로 겁을 주기도 했습니다.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이지만, 발달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건대를 정신적으로 학대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건대가 처음 발톱을 깎던 날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억지로 무서운 사람 흉내를 내며 발톱을 자르진 않을 겁니다.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저는 건대가 그것을 좋아하게 만들어줬어야 했습니다. 발톱깎이 주변에 건대가 좋아하는 간식을 뿌려놓고 자연스럽게 접근하도록 했다면 좋았겠지요. 많은 개가 발바닥 만지는 것을 싫어하므로, 간식을 입에 대주는 것과 동시에 반복해서 건대의 발바닥을 만졌을 겁니다. 쓴 약을 먹는 아이에게 사탕을 내미는 것처럼 건대에게도 보상은 필요했을 테죠. 임상행동학에선 이 과정을 ‘카운터컨디셔닝 counterconditioning(역조건 형성)’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개가 발톱깎이에 익숙해졌다 해서 곧바로 발톱을 자르려 드는 실수는 절대로 해선 안 됩니다. 모든 일엔 순서가 있고, 싫어하는 일일수록 목표에 다가가기까지 페이스 조절이 중요하니까요. 더구나 말이 안 통하는 개가 그 대상이라면 우리는 더욱 은밀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른바 ‘디센서티제이션desensitization(탈감작)’ 과정입니다. 건대 입에 간식을 대주는 동안 발톱깎이로 발톱 위를 톡톡 두드려보고, 발톱깎이 날 사이에 발톱을 올려두기도 하다가 건대가 어떤 행동에도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발톱을 잘라줬다면 상황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발톱깎이를 들면 좋아서 달려오는 개가 됐을지도 모르죠. 당연히 가족 누구도 건대를 목욕시키거나 발톱을 잘라주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지 않았을 테고 말입니다.
건대의 남은 생에 발톱깎이는 계속해서 공포의 대상이겠지만, 여러분의 반려견은 그렇지 않길 바랍니다. 평생 동안 개가 반드시 통과해나가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기필코 즐거운 일로 여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세요. 여러분 곁에 앉아 있는 개가 느끼는 감정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지 마세요. 개가 두려워하는 일을 해야 할 때는 결코 힘으로 제압하거나 윽박지르거나 서두르지 마세요. 대신 인내심을 갖고 조심스럽고 편안하게 다가가보세요. 개가 주인의 속마음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고 달콤하게 말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오영욱 건축가는 ‘오기사’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건축가이자 작가로, 오다건축사무소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베들링턴테리어 암컷을 키우는 그는 초보 개 아범의 심정과 에피소드를 자신의 블로그에 연재하고 있다.
글을 쓴 조광민 수의사는 동물 행동 심리 치료를 하는 특별한 수의사다. 미국 동물행동수의사회 정회원이며 ‘그녀의 동물병원’이라는 동물 행동 심리 치료 전문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동물 애플리케이션 개발 자문으로도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