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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문화 특집 다시 쓰는 공예 지도 1
담양 대나무, 전주 한지, 한산 모시 등 지역 특산물은 지역이 갖고 있는 역사, 인문적 자원, 손기술 등이 더해져 지역 특유의 공예로 발전한다. 흔히 ‘지역 공예’라 하면 고리타분하고 현대에 맞지 않는 전통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우리 고유의 문화를 담은 생활 명품이요, 궁극적으로는 자연 친화적 삶을 실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최근 전통문화의 가치에 관심을 기울이며 지역과 연을 맺고 세계적으로도 경쟁력 있는 공예품을 만드는 젊은 디자이너의 행보가 반가운 이유다. <행복>은 지금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지역 공예,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소비’를 만드는 열두 명의 디자이너, 공예가를 만났다.


우리나라에는 우리만 아는 ‘지역=특산물’이라는 공식이 있다. 담양=대나무,전주=한지, 한산=모시 등 뚜렷한 사계절과 지리적 특성에 생활양식이 켜켜이 쌓여 재미있는 공식이 만들어졌다. 풀의 색감과 감촉을 그대로 살려 오로지 사람 손으로만 만들어내는 완초 공예품은 사용할수록 왕골의 누런 빛깔이 짙어져 자연의 멋을 더하는 예술품이다. 하지만 대중이 알아주지 않으니 경제적으로 어렵고, 후계자 양성에도 한계에 부딪히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60세가 넘으면 손놀림이 둔해지고 시력이 나빠져 섬세한 기술이 생명인 완초 공예를 제대로 해내기 어려운데,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제자 역시 대부분 50~60대 여성이다. 그나마 서른 명 남짓한 기능인이 작업을 그만두면 다음 세대는 더 이상 완초 공예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통영의 한 나전장은 자식에게 힘든 길을 내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들은 이수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주말에는 과일 장사에 나선다. 지역에서 전통 공예를 하려면 ‘투잡’은 필수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한산 모시의 모시 짜는 어르신들은 문화 시연 행사를 할 때마다 “모시 짜는 사람이 왜 모시옷을 입지 않느냐”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모시 한 필(약 30cm 폭)의 가격은 수십만 원대다. 그만큼 귀한 옷감이기에 자투리 조각 하나도 버리는 법 없이 알뜰하게 활용하는데, 어찌 작업복을 지어 입을 수가 있으랴. 그나마 옻은 공예의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는 소재다. 옻칠은 온도가 20~25℃, 습도가 70~80%를 유지하는 곳에서 작업을 한다. 습기가 없으면 마르지 않고, 문틈 사이로 바람이 조금만 들어가도 쭈글쭈글 울기 때 문에 사방이 막힌 곳에서 작업한다. 요즘처럼 찜통더위가 작업하기 좋은 환경이지만 피부에 닿으면 여기저기 옻이 올라 고역이다. 칠하고 굽는 과정을 최소한 다섯 번은 반복해야 하며, 광을 내려면 그 이상의 인력과 시간이 필요하니 값이 올라가는 게 당연한데 비싸서 외면받기 일쑤.

작품인지, 제품인지 전통 공예를 대하는 시각 차이도 값을 매기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예컨대 도자를 굽다 보면 색이 진하게 나오는 것도 있고, 옅게 나오는 것도 있다. 색이 좀 덜하다고 음식을 못 담는 것도 아니고, 담은 음식의 맛이 덜한 것도 아니다. 물론 작품을 만드는 것과 그릇을 만드는 것에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수공예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도자 그릇은 양산되는 플라스틱 그릇만 못한 애물단지가 된다.

전통은 소비를 통해 그 가치를 지킬 수 있다. 자꾸 쓰고 즐기다 보면 과거에 갇힌 전통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삶을 충만하게 하는 귀한 의미로 전통 공예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칼럼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무엇보다 공예품이 단순히 전시관에 진열되는 것이 아닌, 일상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현재를 사는 디자이너의 역할이 중요할 터. 인터뷰를 위해 만난 열두 명의 디자이너는 한결같이 전통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재해석’보다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통 장인이라고 하면 자기 것에 폭 빠져 살아갈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천만의 말씀. 그 누구보다 세상과의 소통을 원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이가 장인이란다. 그러니 일회성으로 끝나는 문화 행사나 제도적 뒷받침보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이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무엇보다 매력적인 스토리 발굴과 보편적 미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현대적으로 바꾸려 하기보다 현실적으로 바꿔야 한다”(청송 백자 윤한성 수 석 전수자), “만드는 것의 소중함, 수작업의 가치를 아는 것이 나라를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의 시작”(공예가 박유진), “한 방울씩 떨어지는 옻 채취 현장에 가면 공예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진다”(디자이너 문유진), “외국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 고유의 초록색 자개를 신비로운 이미지라 극찬한다. 전통은 고루하다는 인식을 바꿔야 할 것”(공예가 김현주)…. 전통 공예의 맥을 잇고 있는 장인과 그 곁에 있는 디자이너, 공예가를 인터뷰하며 그들의 ‘진심’을 들여다보게 됐다. 스스로 감동받고, 품고 싶고, 전하고 싶은 ‘진심’. 너무 비싸서 접할 수 없다고 투정하기 전에 우리는 얼마나 우리 문화와 전통에 관심을 가졌는지부터 돌아봐야 할 일이다. 모든 것이 대량생산되는 몰개성의 시대. 빛바랜 종이 한 장, 작은 원단 조각 하나에도 저마다의 고유한 이야기가 깃든 ‘전통 공예’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의 얼굴이니. 이지현 기자


안성 유기+안동 하회탈_ 조기상
때론 ‘진지’하게, 때론 ‘해학’적으로
1 브랜딩할 때 그 지역의 스토리와 문화 연구를 가장 중요시한다는 조기상 대표. 2 안동 하회탈 장인과 협업해 디자인한 하회윷. 하회탈의 해학적 특징을 윷가락 끝부분의 조각과 말에 잘 표현했다.3 각상 문화와 음식을 귀하게 여기던 전통 식문화의 정신을 반영한 유기그릇 ‘진지함’. 귀한 음식 선물을 주는 시간을 테마로 보석함처럼 뚜껑을 구성했다. 옻칠, 도자, 옹기 등 네 가지 버전으로 확장할 수 있다. 재단법인 예올의 아트 디렉팅 총괄, 아름지기 아시아 공예 프로젝트 아트 디렉터,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지역 공예 교육 컨설턴트… 크리에이티브 어소시에이트 페노메노의 조기상 대표는 유독 전통 공예와 연이 두텁다. 공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이탈리아에서 요트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수억, 수조 원대의 커스터마이징 요트를 디자인했지만, 특정한 누군가를 위한 최고의 디자인을 한다는 데 오히려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는 그는 디자이너의 중요한 역량으로 사회적 책임감을 꼽는다. “한국에 와서 가장 처음으로 진행한 프로젝트는 영세한 농부의 사과즙 브랜딩이었어요. 제품이든 지역이든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누군가에게 디자인을 수단으로 핵심 언어를 설정해 대중과의 접점을 찾아주는 일이 즐겁더라고요.” 안성의 김수영 유기장과 협업해 탄생한 유기 오첩 반상기 ‘진지함’은 하루 중 가장 귀하고 보물과 같은 ‘진지’를 담는 그릇이다. 핵심 언어는 ‘조금 적게, 조금 작게’. 각상 문화와 음식을 귀하게 여기던 전통 식문화의 정신에 현대의 적게 먹는 식습관을 반영해 그릇 두께를 줄이는 등 소비자에게 불편한 요소를 하나씩 빼냈다(유기는 갈아내는 작업 방식으로 만드는데, 얇을수록 작업 공정이 많아 진다). 유기는 열전도율이 높기 때문에 뜨거운 음식을 담았을 때 뚜껑을 열다 놓치곤 하는데, 손가락 마디에 걸려 열릴 수 있도록 뚜껑에 테두리를 만들었고 안쪽에 굽을 달아 열전도를 차단했다. 안동 하회윷의 탄생 스토리 또한 재밌다. 안동을 대표하는 하회탈은 지켜야 할 우리 고유의 문화지만, 사실 현대 공간에 탈을 걸어두기란 쉽지 않다. 그는 안동의 하회탈이 놀이 문화였음을 주목했다. 실제 안동은 3백65일 윷놀이를 하는 지역으로 서양식 보드게임처럼 대중화할 수 있는 문화적 접근이 가능했다. “하회탈은 그 시대 해학의 아이콘이었어요. 양반 문화가 뿌리 깊은 안동에서는 이 탈을 썼을 때 양반을 풍자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네 종류의 말은 그 시대의 계급, 즉 양반, 선비, 중, 초랭이(상놈)를 상징해요. 말은 겹칠 수 있잖아요. 양반의 말 네 개를 모두 겹쳐 쌓으면 영의 정의 모자 형태가 되지요.” 끝부분에 하회탈의 웃는 얼굴을 조각한 윷은 던졌을 때 꼭 하회탈이 춤을 추는 듯한 형상이다. 웃는 얼굴을 얼마나 단순화할지가 관건이었기에 직접 목조각의 느낌을 장인에게 보여주기도 했다는 조기상 디자이너. 이처럼 갖고 싶은 공예품은 지역의 문화, 자원, 제품력, 디자인, 인적 자원이 충분히 버무려져야 탄생하는 법이다.

4 목조각의 디테일 등 기능과 현대적 미감을 챙기기 위해 직접 작업을 하기도 한다. 5 주물, 유기 등의 원형을 알 수 있는 옛 물건을 모은다.  디자이너로서 당신만의 차별화되는 독창성은? 좋은 가구와 좋은 집 다 누려보고 싶은 사람이 갖고 싶은 궁극의 요트를 디자인하면서 갈고닦은 예리한 날과 신경질적인 촉.
디자이너가 우리 전통 공예의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지역의 고유한 색깔, 아이덴티티를 잘 찾아주는 것. 그리고 ‘진짜’를 살려줄 수 있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
당신의 작업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문화 이슈와 트렌드를 넘어 많은 사람의 관습이 되는 ‘현상(fenomeno)’을 전통이라는 매개체로 풀어내는 일.
직접 목조각, 옻칠을 하는 이유는? 만드는 방법을 알아야 어느 단계에서 수정할지 알기 때문.

“전통을 재해석할 때 형태에만 집중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어요. 제품 자체를 설계하는 것도 디자인이지만, 가격이 높은데 왜 높은지, 이 기술이 왜 필요한지 등 제품 제작 과정을 이해하고 프로세스를 개선하는 것 역시 디자이너의 역할입니다.”

 이지현 기자 문의 페노메노(www.fenomeno.kr)

담양 대나무_ 조병주 
굽이굽이 흐르는 소재 미학
1 학부 시절 하지훈 교수의 프로젝트를 통해 채상장, 소목장, 소반장 등 장인의 전통 방식을 경험한 가구 디자이너 조병주. 2 대나무의 탄성을 곡선 디자인으로 구현한 굽이굽이 벤치. 담양시의 지원으로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선보였다.조병주는 재료의 맛을 잘 아는 디자이너다. 그는 학부 시절 하지훈 교수를 도와 지역 곳곳의 장인과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아름다운 형태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임을 알았다. 담양시의 지원으로 2013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발표한 ‘굽이굽이 벤치’는 실처럼 얇게 쪼개 엮는 채상 방식을 적용한 작품. 자연스럽게 구부러질 정도로 대나무를 쪼갠 뒤 금속 보디에 곡선을 살려 이름처럼 굽이치는 형태를 완성했다. 특정 소재를 다루는 멘토와 함께 작업하고 영감을 주고받는 일의 가치를 경험한 그는 요즘도 공장이나 공방 등 각각의 소재를 직접 다룰 수 있는 곳을 찾아 재료가 지닌 물성적 특징을 배우고 고민하며 또 다른 작업의 아이디어를 얻는단다. 한식 창호의 짜임 구조를 응용한 트레이도 흥미로운 작업이다. 세워진 문을 90도로 눕혀 축소한 형태로 한지를 압착한 부분이 윗면, 문살이 아랫면이다. “전통 공예는 이미 완성된 작품입니다. 사방탁자는 비례가 핵심이고, 창호는 문창살의 짜 맞춤 기법, 그로 인한 투과성과 가벼움 등이 장점이죠. 전통을 모티프로 작업하면서 비례를 무시하거나 근간이 되는 핵심 의미를 틀어버리는 오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통 공예를 재해석할 때 장인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생활 패턴이 바뀌었지만 어쨌든 우리 문화라는 게 중요하고, 영감을 받되 “지금 생활에 맞춰 이렇게 응용해보는 건 어떨까?” 정도의 뉘앙스를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3 소반과 티 테이블의 장점을 결합한 분리형 트레이 소반. 4 창호의 짜 맞춤 기법과 한지, 가볍다는 장점을 디자인 요소로 차용한 트레이. 한국적 모티프의 작업이 많다. 작품인가, 제품인가? 중간쯤이다. 사실 요즘 친환경 신소 재 개발 기업 ‘웹스’의 디자인 팀에서 바닥재, 대리석, 타일 등의 마감재를 개발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가구는 고급 취미 생활로 즐긴다.(웃음) 회사를 다니지 않고 전업 작가였다면 가격을 높이기 위해 좀 더 화려한 스킬을 사용하거나, 많이 팔기 위해 생산에 적합한 형태로 바꾸지 않았을까?
트레이는 소반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했다고 들었다. 소반이야말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용품인데, 실제 사용하려면 불편한 점이 있다. 좌식 생활이 익숙지 않고 식탁에서도 사용할 수 없으니. 소반과 티 테이블의 중간 정도 되는 작업을 생각했고, 상판을 트레이처럼 분리해 쓰는 디자인을 구상했다.
당신이 만난 최고의 공예 명품은? 싸리 빗자루. 정통 장인은 아니지만 시골에서 싸리 공예 하시는 분들을 보면 한 땀 한 땀 엮는 행위 자체가 예술이다. 그때부터 전국의 빗자루를 모으고 있다.
어떤 디자이너로 이해되고 싶은지? 결과물이 아닌 과정으로 이해되는 디자이너. 

“디자이너의 작품이라고 해서 굳이 복잡하고 어려울 필요가 있을까요?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사람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가구를 만들기 위해 재료의 물성에 집중해요. 전통 공예는 분야를 막론하고 재료의 특성을 배우고, 과정을 익히기에 최고의 학습 교본이 되지요.”

이지현 기자 촬영 협조 계원예술대학교, 웹스(www.waps.co.kr) 

문경 한지+전주 한지_ 김빈
한지로 세계를 담다

1 갖고 싶은 공예품이 진짜 공예품이라고 하는 김빈 디자이너. 2 한지를 활용한 제품뿐 아니라 최근에는 단청과 관련한 비누, 브로치, 프레이그런스 등을 디자인한다. 여러 겹의 단청을 쌓아 완성하는 철제 바스켓.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산업 디자이너로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김빈 디자이너는 “가장 한국적인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쉽사리 답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사용하고 싶은 한국적 디자인 제품부터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중 전주한지사업협동조합 최영재 대표를 만났다. 한지를 이용한 현대적 공예품을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제안이었다. 그길로 전주에 내려 가 한지를 만드는 전 과정을 보고 배웠다. 매력적인 물성이라는 생각에 영감이 솟구쳤다. 당시 드링클립이라는 아이디어 제품의 양산 건으로 중국에 다닐 때였는데, 중국에 서 밤새 최 대표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연구한 끝에 한지 바스켓을 완성했다. 한지 바스켓은 독특한 생김새도 인상적이지만 입체적 형태를 틀에 넣어 굳혔다는 것,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음매가 없다는 것, 접착제 없이 물과 한지로만 만들었다는 점 등 이전 한지 공예품과 다른 독창성을 인정받아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작품이다. 그러다 김빈 디자이너는 2014년 영국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 볏짚 의자를 전시하게 됐다. 때마침 전 세계 종이 전문가들이 모여 워크숍을 하는 세계 종이 콘퍼런스가 열렸는데, 그의 한지 사랑을 드러낼 좋은 기회였다. KCDF의 추천을 받아 문경 삼식지소의 김삼식 장인과 함께 영국에서 최초로 외발뜨기 시연을 하고 워크숍을 진행해 최고점을 받았다. 일본, 태국 등 쟁쟁한 경쟁자를 제치고 워크숍 대상자들이 한지를 대량 주문해 갈 정도였다. 전통 공예품의 가치를 해외에서 확인한 그는 이후 다양한 제품을 디자인했다. 시공 후 남는 장판지 낱장을 이용해 음식이나 액세서리를 담아두기 좋은 JPJ(장판지) 바스켓, 테이블 매트, 파우치 등의 생활용품을 디자인했다. 장판지는 콩기름을 먹이고 옻칠을 한 터라 생활 방수가 가능해 일상용품으로 제격이다. 요즘은 단청 무늬에 빠져 한지를 천연 염색해 단청 오너먼트와 브로치, 카드 등을 만든다. 그의 제품은 파리의 메르시, 뉴욕, 도쿄 등 전 세계에서 판매되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 그의 행보처럼 앞으로도 더 많은 ‘갖고 싶은 공예품’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3 시공 후 쓸모없어진 장판지 낱장을 이용해 만든 조명 갓. 4 장판지로 만든 다용도 바스켓은 콩기름을 먹이고 옻칠을 했기 때문에 생활 방수가 가능해 일상용품으로 활용하기에 제격이다. 5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한지 공예품 중에서는 독특함과 기발함을 인정받은 한지 바스켓. 문경 한지를 이용해 접착제 없이 만든 제품으로, 물에 넣으면 금세 풀어진다문경 한지와 전주 한지의 차이점은? 문경 한지는 옛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 가치를 둔다. 제작 방식 또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잇는다. 한지를 만들 때 분산제라는 풀을 쓰는데, 황촉규(닥풀)라는 풀의 뿌리를 물에 풀어 사용하는 옛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제작 방식의 차이 때문이지만 전주 한지는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물론 양산지와 수제지 두가지가 있으며, 가격은 50배 차이가 난다.
제품을 디자인할 때 가장 중심 철학은? 사람들은 전통적이거나 한국적이라는 이유로 제품을 사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갖고 싶을 만큼 예쁘고 오래 쓸 수 있을 만큼 품질이 좋아야 한다.

“전통이란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향유하는 것이어야 하지요. 이를 위해 필요한 임무를 이어나가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고요.”

손지연 기자 문의 빈컴퍼니 (02-780-9491, www.beeeen.com) 

전주 조선 한식 가구_ 소동호 
안팎의 경계를 허문 짜 맞춤 가구
1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가까운 지역 소재부터 연구하기 시작한 소동호 디자이너. 2 한지를 접어서 만든 오리가미 조명등. 펜던트나 캔들 라이트, 오브제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 3 조선 한식 가구 기법과 낙동법을 매치해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담은 낙동 가구를 완성했다. 전통 공예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법과 멋을 내재하고 있다. 디자이너로서 아이덴티티를 세우기 위해 지역 소재를 찾아나선 소동호 디자이너는 2015년 한국 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관한 ‘한국적 생활 문화 공간 발굴 및 확산 사업’ 공모전에서 ‘낙동烙桐’ 시리즈를 선보였다. 플레이트와 의자, 사이드 테이블로 구성한 이 시리즈는 조선 한식 가구 중 최고의 조형미로 꼽히는 사방탁자의 ‘구조’와 목가구 문판에 쓰인 ‘낙동법’을 토대로 한다. “사방탁자는 가구 선의 굵기와 비례감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정갈한 멋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실제 사방탁자를 따라 붉은 참죽나무를 가로세로 10mm 굵기로 자르고 제비초리 짜임으로 프레임을 만들었어요.”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소병진 선생에게 1년간 조선 한식 가구 기법을 배웠다. 톱질과 끌질, 대패질 등 기초부터 다지느라 정작 만든 가구는 사방탁자 하나지만, 사방탁자야말로 당대의 기본기를 모두 담은 걸작. 그때의 경험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소목장 이수자 방석호의 도움으로 제작한 프레임 위에 낙동법으로 태운 판재를 올렸다. 오동나무를 인두로 지진 후 볏짚으로 문질러 색을 짙게 하고 나뭇결을 드러내는 낙동법은 목재가 귀하던 시절에 나무를 덧대어 쓰면서도 멋을 잃지 않았던 선조의 지혜를 보여준다. 문판 뒤에 있던 낙동법이 세상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 테두리는 옻칠을 올려 물성의 대비를 이루었는데 옻칠 장인의 솜씨다. 전통 가구의 단아한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작업에 한계를 두지 않을 예정이지만, ‘한국적 디자인’ 하면 자신의 디자인이 떠오르도록 공예와 디자인을 접목할 계획이다.

소병진 소목장과 친척 관계가 아닐지 궁금했다.(웃음) 모두들 그렇게 묻지만 전혀 아 니다. 초창기에 한지로 조명등과 스툴을 만들었는데, 그때 전주 일대의 장지방을 돌아 다니다 대문 밖에 목재가 쌓여 있는 집을 발견했다. 무언가에 이끌려 대문을 열고 들어 갔는데 그곳이 소병진 선생님의 작업실이었다.
한지 작품 역시 공예와 관련이 있는가? 아쉽게도 그건 아니다. 한지의 견고함을 실험하는 디자인이었기에 다양한 한지를 찾아 가평, 전주 일대의 공방을 돌아다녔지만 내가 원하는 한지를 만들려면 결국 한지 제작 틀에 변화를 줘야 했다.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은? 통나무를 목선반 기법으로 돌려 깎아 만든 일체형 조명등. ‘이음매 없이 조명등을 만들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베트남 지역 공예 프로젝트를 위해 그곳에 갔을 때 베트남 장인의 물레를 이용해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곧 국내에서도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입을 모아 사방탁자의 조형성을 이야기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구조재로서 사방탁자는 형태와 비례감, 쓰임새 등 모든 면에서 훌륭한 가구입니다.”

이새미 기자 문의 소동호 디자인 스튜디오 (www.sodongho.com) 

한산 모시_ 강미나
조형미 입은 모시의 신선함

1 다양한 스타일의 바느질 기법을 연구하며 매일 조각 잇기 작업을 이어가는 강미나 작가. 2, 3 어떤 재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차분한 색을 조합한 이번 신작은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또 다양한 소재를 결합하기 위해 산호, 금속 등을 더했다. 모시는 섬세하고 단아하며 청아함을 제일로 여기는 우리 민족이 가장 선호한 직물이었다. 통풍이 잘되고 결이 고와 삼베와 더불어 여름철 최고의 옷감으로 각광받았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질기고 손질하기 까다로운 탓에 이불이나 저고리, 조각보로나 만날 법한 고급 소재다. 모시에 조형미를 더한 강미나 작가의 장신구는 공예품의 현대화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금속공예를 전공했지만 소재 탐구에 관심이 많았어요. 어머니가 취미로 조각보를 만들어 모시는 친숙한 소재였죠. 처음에는 평면 작업을하다 다른 천에 비해 빳빳해 모양 잡기가 수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체 작업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의 장신구는 추상적이면서 구조적이고, 가벼우면서 단단하다. 스케치가 따로 없어 즉흥적으로 시작해 마무리를 짓는데, 그날그날 기분이나 생각에 따라 하루 시리즈, 한 달 시리즈 등으로 완성하기도 한다. “모든 공예가 그렇지만 바느질 작업에 공이 많이 들어가요. 두 조각 원단을 감싸듯 감침질하고 버튼홀스티치, 귀갑수 등의 자수법을 더해 깨알처럼 이어나가다 보니 눈도 아프고 손목도 쑤셔요.” 그는 목걸이, 브로치 등을 만드는 데는 보름에서 한 달 정도가 걸리지만, 바느질하는 동안은 잡생각 없이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해 그 시간이 행복하다고. “모시라는 전통 소재를 활용한 장신구지만, 처음에는 중국산 모시를 사용했어요. 하지만 작업을 이어나갈수록 알맹이가 빠진 듯한 느낌이었어요. 역으로 뿌리를 찾아야겠다 생각했지요. 그러다 보면 제 작업의 가치도 높아지니까요.” 그는 모시의 품질과 제직 기술이 뛰어난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을 찾았다. 이번 신작은 한산모시관을 직접 방문해 구입한 한산 모시를 이용해 만들었다. 결이 촘촘하고 색이 차분한 한산 모시처럼 이번 시리즈는 색이 다채롭지만 연결감이 느껴진다. “색감은 한층 어둡고 짙어졌으며, 부드럽고 고운 모시의 매력은 배가 됐고요. 무엇보다 작은 디테일로 전통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는 가치가 저를 뿌듯하게 만듭니다.” 작업을 통해 전통을 탐닉하는 것이 즐겁다는 강미나 작가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전통의 맥을 찾고 싶다고 덧붙였다.

2012년 독일의 BKV(Bayerischer Kunstgewerbe-Verein) 미술공예협회에서 1등을 수상한 후 국내에 알려졌다. 당시에는 작품에 보색대비를 많이 사용했는데, 서양에서는 이런 과감한 색 대비를 낯설어했다. 여기에 세심하고 정성스러운 바느질, 모시라는 독특한 소재가 결합해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신감이 생겼다.
초기작과 신작을 비교한다면? 마치 유닛이 자라나는 듯한 형상으로 원기둥이나 육면체 형태를 이어 붙이던 것과 달리 지금은 추상적 형태에 더 집중하고 있다. 가벼움, 견고함, 고운 색감은 계속해서 이어간다. 

"작품으로 감정 표현을 해요. 나만의 세계, 나만의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바느질하고 색과 면을 이어가죠. 이때 중요한 것은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거예요. 한국과 전통이라는 나의 뿌리를!”

손지연 기자 문의 www.minakang.pe.kr

강화 완초_ 서정화
낯선 어울림을 그리다

1 소재의 물성을 대비하며 개성이 뚜렷한 작품을 선보이는 서정화 디자이너. 2 매끄럽게 다듬은 장미목 스툴에 독특한 질감의 원형 완초 공예품을 얹었다. 3 현재 구상 중인 작품은 완초 공예품을 가구의 문에 적용하는 것이다.디자이너 서정화는 소재의 물성을 테마로 한 작품을 선보인다. 나무, 금속, 석재를 포함해 그가 택한 여덟 가지 소재는 똑같은 형태의 스툴에서 질감을 화려하게 드러냈다. 왕골도 그중 하나. 그는 자신의 스툴에 올릴 원형 화문석을 찾기 위해 스케치 한 장만 들고 무작정 강화 화문석문화관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소개받은 분이 바로 완초 공예 이수자 박순덕 씨. 강화도 석모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완초 공예를 하는 박순덕 이수자는 원형 화문석으로는 국내에서 제일가는 명인이다. 화문석을 찾아 이곳까지 온 젊은 디자이너가 기특해 보였을 터. 디자이너와 명인의 협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정화 디자이너가 스툴 프레임을 제작하고, 나무로 원형 화문석의 구조재를 만들어 가져가면 장인은 그 위에 원형 완초 공예품을 짜서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를 촘촘하게 짤 것인지, 성글게 짤 것인지(이에 따라 완초 선정이 달라진다), 어떤 색상의 무늬를 넣을지 등은 사전에 의논한다. 젊은 디자인과 농익은 손맛의 만남은 낯선 새로움을 입은 가구를 탄생시켰다. 이제는 함께 공모전에도 참가하며 완벽한 호흡을 보이는 두 사람은 지난해‘한국적 생활 문화 공간 발굴 및 확산 사업’ 공모전에서 얇은 금속 프레임 위에 화문석을 얹은 대중화된 디자인의 스툴을 선보였다. 완초를 가구의 접이식 문으로 활용할 아이디어를 모색 중인 두 사람은 조만간 새로운 가구를 선보일 예정이다.

얇은 금속 프레임 위에 원형 완초 공예품을 얹어 가격과 디자인 면에서 대중에게 가가고자 노력한 점이 엿보인다.스툴을 고집한 이유는? 소재의 질감을 명확히 대비하려면 가구는 디자인 요소를 최대한 절제해야 했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원하는 소재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가구가 스툴이다.
완초 공예를 직접 배워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배워서 할 순 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일까? 오랜 공력을 몇 개월의 실습으로 흉내조차 낼 수 있을까? 아름다운 쓰임새를 부여해 잊혀 가는 완초 공예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이야말로 디자이너인 내가 할 일이다.
지역과 연계된 또 다른 작품이 있다면? 제주 현무암으로 만든 데스크웨어. 최근 제주도에서 현무암으로 만드는 상품이 크게 줄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더욱 활성화되길 바라는 마음에 누구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데스크용품을 제작했다.

“완초 공예는 사람과 자연이 함께 만드는 작품입니다. 같은 디자인이어도 완초 굵기에 따라, 짜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표정을 지니게 됩니다. 이게 수공예의 진정한 멋이 아닐까요?”

이새미 기자 문의 www.jeonghwaseo.com


디자인 김홍숙, 전지원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최익견 자료 조사 이인영 인턴기자

기획과 진행 주거문화팀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