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뉴욕 스튜디오에서 임영균이 촬영한 ‘브라운관을 뒤집어쓴 백남준’. 값비싼 TV 여러 대를 한 번에 살 형편도, 스폰서를 구하기도 힘들었던 백남준은 벼룩시장에서 중고 TV를 구해 작업하곤 했다.
백남준 + 사진작가 임영균
“모든 건 내 몽골 유전자 때문이야”
DDP에서 열리고 있는 <백남준 쇼>의 ‘Nostalgia’ 방에는 임영균이 촬영한 백남준 사진 43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 시절을 회상 중인 임영균.
임영균 중앙대 사진학과와 뉴욕대 예술대학원을 졸업했고, 뉴욕 국제사진센터에서 수학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 큐레이터가 선정한 전 미주 10대 사진가상(1986)과 미국 국무성 풀브라이트 연구 기금(2000) 등을 수상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중앙일보 뉴욕 지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뉴욕타임스 등 일간지와 잡지에 글과 사진을 발표했다. 뉴욕대 사진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했고,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국제사진센터, 뮌스터 시와 올덴부르크 시립미술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백남준 1984년 1월 1일 자 뉴욕타임스였지? 임 씨가 찍은 ‘브라운관을 뒤집어쓴 백남준’이란 사진 말이야. 이 사진은 그야말로 대히트작이 됐지. 수많은 실력가가 내 인물 사진을 찍었지만, 이 사진만큼 잘 나온 것이 없어요. 이 사진을 찍으러 임 씨가 1983년 여름 소호의 내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가 눈에 선하군. 어떻게 찍을지 몹시 난감해하더니 여러 시간 대화를 나눈 끝에 세 개의 TV 모니터를 배경으로 첫 사진을 찍었고, 두 번째가 TV 브라운관을 쓴 그 포즈였지. 한데 알고 보니 임 씨가 날 처음 본 건 그보다 2년 전이었다지?
임영균 1970년대 말 제가 뉴욕 유학을 준비하던 중 국내 일간지 문화면에서 백 선생님의 존재를 처음 알았죠. 엄숙한 피아노 연주회에서 도끼로 피아노를 부수어 관객들을 놀라게 한 경범죄로 뉴욕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관객들이 현장에서 주머니를 털어 벌금을 내주어 풀려났다는 기사였습니다. 과격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라는 기억으로 제게 남았죠. 그때부터 뉴욕에 가면 꼭 한번 뵙고 선생님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1980년 9월 유학생으로 뉴욕에 도착했지만, 비싼 학비 때문에 공부보다는 한국인 채소 가게에서 일하는 시간이 더 많았죠. 어느 날, 단골 식당의 주방에서 만난 이탈리아 아르바이트생이 한국 사람은 왜 채소 가게나 생선 가게에서만 일하고 예술가는 없 느냐는 말에 백남준이라는 유명한 예술가가 있다고 말했더니, 백남준은 일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때 결심했죠.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예술가를 촬영해 소호에서 전시하고, 책으로 출판해 자랑스러운 한국인 예술가들을 알리겠다고. 당연히 첫 번째는 백남준 선생님이었고요. 1950년대에 한국을 떠나 한국 예술가들과 전혀 교류가 없던 선생님의 연락처를 수소문하는 것부터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의 인물 사진 수업에서 하비 스타인 교수가 촬영한 뉴욕 저명 예술가 시리즈에 백 선생님이 있는 걸 보고 교수님께 부탁해 전화번호를 얻었고요. 첫 번째 통화를 한 지 1년 후인 1982년, 선생님의 휘트니 회고전 전야제 때 저를 초대해주셨고 샬럿 무어먼과의 첼로 공연 등을 촬영할 수 있었죠. 그리고 1983년 초여름, 드디어 선생님의 스튜디오에 초대받게 된 겁니다.
‘브라운관을 뒤집어쓴 백남준’ 사진이 뉴욕타임스에 소개된 이후에는 선생님이 저를 자주 예술가 파티에 초대해주셨죠. 그때마다 제 작품을 휘트니 미술관장 등 미술계 인사들에게 소개해주셨고요. 선생님 기억나시죠? 저녁 10시만 되면 정기적으로 제게 전화를 거셨던 거. 처음엔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날마다 저녁 10시가 되면 인슐린 주사를 장시간 맞으면서 그 무료한 시간에 전화를 하셨던거더군요. 제가 일상적인 안부로 시게코는 잘 있냐고 물으면 “시게코는 폴과 영화 보러 갔다”고 하셨죠. 반대로 제가 저녁에 선생님께 전화를 걸면 의외로 시게코가 전화를 받으면서 “남준은 제인과 공연을 보러 갔다”고 하곤 했죠.
백남준 임 씨가 그랬지. “사진은 결국 나에게 예정된 일기를 쓰는 것”이라고. 그럼 나와의 만남도 인연이라는 필연이었다고 생각하나?
임영균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미 1970년대 말, 제가 서울의 예술학도로 뉴욕의 선생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시작된 거라고 봅니다. 비록 선생님은 10년 전에 이생을 떠나셨지만, 현재도 저와의 인연은 이어져서 이렇게 전시도 하고 글도 쓰는 것입니다. 지금도 선생님을 생각하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고운 목소리로 제 질문에 자분자분 설명해주시던 음성이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1983년 초여름 소호 스튜디오에서 백남준을 촬영한 후 헤어지기 아쉬워 “사진 한 장 더 찍어도 될까요?”라고 묻는 임영균에게 백남준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안녕히 오세요”라 인사했다.
백남준 임 씨는 내 일상적 모습뿐 아니라 작품, 퍼포먼스 장면, 전시 장면도 숱하게 찍었지. 휘트니 회고전에서 나의 예술 동료 샬럿 무어먼이 내 벗은 몸을 첼로 삼아 존 케이지의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 내 설치 작품 ‘TV 부처’,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기념한 퍼포먼스 ‘바이 바이 키플링’을 담은 사진처럼 말이야. 20년 동안 나를 찍었으니 정말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연이 아니었던가 싶어. 지근거리에서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촬영한 동반자로서 임 씨에게 나의 퍼포먼스와 예술 활동이 어떻게 보였을지 궁금하네.
임영균 선생님의 예술 동반자인 샬럿 무어먼과 ‘TV 브라’ 공연을 준비할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무어먼은 관객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놓는 것이 신경 쓰여 공연 전에는 항상 호주머니 속 위스키 샘플병을 홀짝홀짝 마셨죠. 선생님은 건강을 위해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던 인삼을 부스럭거리며 찾아내 껌처럼 항상 씹으셨고요. 무어먼이 두 번째 위스키병을 마시려 하면 백 선생님은 만류하셨고, 무어먼은 “나는 너의 꼭두각시가 아니다”라며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째 병을 마셔버리곤 했죠. 그렇게 어린아이들처럼 무대 뒤쪽에서 티격태격 싸우다가도 일단 무대 위에서 공연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무어먼은 백 선생님의 연출에 충실했고, 생글생글 장난기 어린 웃음까지 띠며 관객들을 즐겁게 했죠.
공연이 무르익었을 때 이번에는 선생님이 웃통을 벗고 무어먼의 가슴에 안겨 첼로처럼 자세를 취하셨어요. 무어먼은 실제로 첼로를 연주하는 것처럼 백 선생님의 상체를 껴안으며 첼로 스트링을 선생님 등에 튕기기도, 활로 문지르기도 했지요. 끼륵끼륵 날카롭고 둔탁한 전자음 소리만 날 뿐이었죠. 공연이 끝난 후 선생님이 “오늘 이 공연은 서양음악사에서 역사적인 날이다. 왜냐하면 첼로 탄생 6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내 몸이 첼로 역할을 했다”라고 어눌한 일본식 발음의 영어로 다시 한 번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셨고요. 제겐 그날들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선생님은 예술가인데 어떻게 미래학자처럼 미래를 예견하셨는지 아직도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미래에는 TV 모니터를 캔버스처럼, 두루말이처럼 접어서 가지고 다닐 수 있다. 그러면 내 작품을 이동하기도 편하고, 원하는 곳 어디에도 설치 하기 쉬울 것이다” 하셨죠. 그 말씀을 들을 땐 설마 했는데, 그 기술이 이제 곧 상용화된다고 하더군요. 이미 1960년대부터 걸어 다니고 노래 부르는 로봇을 아베 슈야와 공동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즐겁게 하셨지요. 1982년 휘트니 회고전에 앞서 길거리에서 우연을 가장한 연출로 자동차와 충돌한 로봇을 장사 지낸 것도 여전히 회자되는 일화죠. 1980년대에는 인공위성을 소재로 전 세계 TV 시청자들을 관객으로 만드셨죠(<굿모닝 미스터 오웰>). 동서양은 만날 수 없다던 키플링의 예언을 무색하게 한 사건이었어요. 이뿐인가요. 1990년대에는 첨단 산업용으로만 사용하던 레이저를 이용해 ‘야곱의 사다리’ 등의 작품을 만드셨잖아요. 1996년 중풍으로 쓰러진 후에도 2000년 1월 구겐하임 회고전에서 휠체어에 의지한 채 무어먼을 위한 추모 공연을 했고, 레이저 작품 등 첨단 작품으로 개인전을 여셨고요. 선생님의 삶은 그야말로 첨단의 삶이었네요.
어느 날 제가 선생님께 “첨단 과학을 그렇게 잘 아십니까?” 물었더니 선생님은 “예술가도 과학자만큼 공부해야 한다. 항상 뉴욕타임스의 과학 세션을 공부한다” 라고 하셨죠. 늘 시대를 앞서가려던 백 선생님이 지금 살아 계셨더라면 어느 수준까지 작품을 발전시켰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또 환경과 인류 문제를 이미 간파해 평생 자가용을 소유하지 않으셨잖아요. 성인 체중(보통 70kg)의 열 배 혹은 스무 배인 자동차는 그 탄생부터 환경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요. 2000년 구겐하임 회고전 때는 환경을 중시하는 ‘TV 정원’을 만드셨죠.
저도 예술가지만 선생님의 새로운 작업은 항상 범인의 상상을 초월해서 늘 놀라웠습니다. 그런 상상력은 어디에서 나오냐고 여쭈었더니 “사마천의 <사기>를 정독해서 읽어라”라는 뜻밖의 조언을 해주셨죠.
백남준 나는 20세기 초입을 살았지만 늘 ‘다음 세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가 궁금했지. 늘 새로운 것, 뻔하지 않은 것, 넓은 것이 궁금해 헤매고 다닌 거야. 건반과 건반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하지 않는 음을 찾다 보니 쇤베르크에 이르렀고(그는 쇤베르크 연구로 도쿄 대학 졸업 논문을 썼다), 전통악기에서 벗어나려고 고투하다 보니 슈톡하우젠의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다다랐지. 듣는 음악보다는 보고 듣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행위 음악’이란 걸 창안했고. 전자음악을 전자 비전으로 확장해보고 싶은 포부가 ‘비디오아트’라는 새 세상을 만들어낸거지. TV의 일방성을 극복하는 ‘대용 TV’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위성쇼를 감행했고.
“사람들은 내게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많은 질문을 던지는데, 그건 나의 무모함에 와 닿기 때문이라고 답하곤 했지. 모험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 왜 10대의 내가 쇤베르크에 관심을 보였는지 생각해보면, 그가 가장 극단적인 아방가르드로 소개되었기 때문이야. 왜 그의 ‘극단성’에 관심을 보였을까? 나의 몽골 유전자 때문이야. 선사시대에 우랄・알타이 쪽 사냥꾼들은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 라플란드까지 세계를 누비고 다녔거든.
임영균 제가 하는 사진 예술과 선생님이 창조한 비디오아트는 어떤 합과 차가 있는 걸까요?
백남준 비디오아트와 사진 예술도 원리는 같아. 내가 예전에 임 씨에게 들려준 이야기 중 사진이라는 말을 비디오로 바꿔 읽어보면 그 답이 될 것이야. “사진이란 것은 진짜를 베끼는 것이므로 진짜의 복제다. 복제란 가짜를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사진의 상대 개념은 가짜의 복제라 할 수 있다. 사진 예술이란 단순히 무의미한 모습을 복제하는 것에서 벗어나 가짜를 복제하는 데 접근하는 노력이다. 임영균이 바로 그런 예술적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오늘날 컴퓨터를 이용한 인위적인 사진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가짜를 복제하는 예술이 너무 철저해지면서 단순한 진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역설이다. 컴퓨터로 만든 사진이 있다면 CD-ROM에 집어넣어라. 이것이 바로 비디오아트다.” 임 씨가 내 편지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영상 작품 ‘윙크’ 얘기를 해줄 수 있겠나?
임영균 선생님은 평소 공연이나 인터뷰 중에 잘 모르는 이가 사진을 촬영하려고 하면 눈을 찡그리곤 하셨잖아요. 왠지 저는 선생님이 눈을 찡그릴 때면 어릴때 굿을 하던 박수무당 애꾸가 생각났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작품 ‘뉴욕 VUSAC’ 등에는 항상 주술적 내용이 들어 있었고, 제가 촬영한 TV 모니터가 세개 있는 사진에서도 오른쪽 모니터에 주술적 오브제를 붙여놓는 것을 즐겨 하셨기 때문이죠. 그뿐 아니라, 요제프 보이스가 죽었을 때 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본인 스스로 무당이 되기도 하셨고요. 그런 뜻을 담아 1994년 선생님이 제게 보내주신 편지 내용처럼 컴퓨터로 수정한 사진이 ‘윙크’입니다. 그 사진을 CD-ROM에 넣었더니 백 선생님 말씀처럼 바로 비디오아트가 되어버린 것이고요. 2000년대 제가 뉴욕에서 체류할 때 휠체어를 탄 선생님을 촬영하려니 이전 모습이 떠올라 착잡했어요. 시게코 여사의 보살핌도 가슴 먹먹했고요.
백남준 시게코 이야기라면…. 플럭서스 커플이자 비디오아트 커플이기도 한 시게코와 나는 음과 양, 달과 해, 그리고 요철凹凸이었지. 우리가 젊을 때 시게코는 내게 최고의 연인이었어. 내가 늙으니 시게코는 최고의 어머니 그리고 부처가 되었지. 그러다 내가 아프니까 시게코가 바빠. 손이 천 개 달린 부처님처럼 바빠. 천수관음처럼 말이야.
임영균 시게코 여사는 예술가입니다. 순수하고 욕심이 없습니다. 선생님 돌아가신 이듬해 제가 뉴욕에서 선생님 회고 사진전을 열었는데 시게코 여사가 보러와서 혼자 우시고는 그리움이 깃든 장문의 편지까지 제게 남기셨어요. 이튿날엔가 제가 전화해서 만났더니 백 선생님의 사진을 얻을 수 있냐고 하시더군요. 항 상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크기로 인화해주면 좋겠다고 해서 A4 사이즈로 인화해 스크랩북으로 만들어드렸더니 매우 기뻐하시며 고맙다고 저녁까지 사주셨죠. 그러나 개인적으로 제게 아쉬움이 좀 있긴 합니다. 선생님이 중풍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의지하고부터는 선생님 안부를 물으러 전화를 걸어도 웬일인지 차갑게 자신에게 직접 말하라며 전화를 바꾸어주지 않았죠. 선생님 목소리가 듣고 싶고, 통화가 되면 얼른 뵈러 가려고 일부러 소호의 선생님 집 근처에서 전화를 하곤 했는데 말이죠.
2000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선생님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을 때 선생님의 생전 공식 마지막 퍼포먼스 ‘샬럿 무어먼을 위한 추모 공연’에서 선생님을 뵌 게 이생에서의 마지막 만남이었군요. 공연이 끝나고 휠체어에 의지한 선생님에게 다가가자 공연 때의 엄숙한 표정은 어디로 가고 뜻밖에 저를 만나게 된 걸 매우 반가워하셨죠. 신체가 부자유스러운 자신의 상황이 힘드신지 눈물을 글썽이고 내 손을 덥석 잡으시며 언제 뉴욕에 왔느냐고 물으셨죠. 전 “뉴욕에 있었지만 시게코가 전화를 바꾸어주지 않아 안부 인사도 못 전했다”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때도 “안녕히 오세요”라고 하셨죠. 우리말을 잘하시다가도 헤어질 땐 “안녕히 오세요”라고 말하셨지요. 언제나 예상하기 힘들었던, 제가 만나본 최고의 천재 백 선생님, 안녕히 오세요.
백남준 그래그래, 임 씨 안녕히 오세요.
1 1982년 임영균이 촬영한 샬럿 무어먼의 퍼포먼스 장면. 백남준은 샬럿 무어먼과 함께 예술적 스승 존 케이지의 ‘현악기 연주자를 위한 26’ 1.1499’’(1955)’를 해석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알몸으로 등장하거나, 백남준이 무어먼의 가슴에 안겨 첼로처럼 자세를 취하는 퍼포먼스로 ‘예술과 외설의 자유 논쟁’으로 예술계를 떠들썩하게 하기도 했다. 2 백남준은 플럭서스 일원으로 활동한 예술적 동지 요제프 보이스를 추모하며 보이스의 상징과도 같은 토끼와 중절모로 작품을 만들었다.
백남준 + 건축가 최욱
창신동 큰 대문집의 기억
1 올 11월, 백남준의 옛 집터인 창신동에 들어설 백남준기념관을 설계 중인 건축가 최욱. 2 주민들이 지역 명소화 사업을 제안해 백남준 집터에 음식점으로 쓰이던 단층 한옥을 매입한 뒤 기념관을 조성 중이다.
최욱 홍익대 건축학과, 이탈리아 베네치아 건축대학에서 건축설계 및 이론을 공부했고 macdowell colony(u.s.a.), Valparaiso foundation(spain)에서 펠로십을 받았다. 현재 ONE O ONE architects의 대표다. 2006년 베니스 비엔날레, 2007년 선전-홍콩 비엔날레에 초대되었고, 대표작으로 학고재 갤러리, 두가헌, 현대카드 영등포 사옥 등이 있다.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가 2013 DFAA(Design For Asia Awards) 대상을 수상했으며, 현대카드 영등포 사옥으로 2014 김종성 건축상을 수상했다.
백남준 나는 늘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었어. 창신동에 말이야. * 다섯살 때부터 유학 가던 1949년까지 12년을 살던 곳이야. 조선의 마지막 외무대신이 살았다는 우리 집은 대문이 어찌나 큰지 ‘큰 대문 집’으로 불렸지. 3천 평도 넘는 거대한 한옥이었는데, 마당이 넓고 뒤쪽에는 동산이 있어 아이들이 놀기가 아주 좋았어. 나는 고단샤노 에혼(일본 출판사 고단샤의 그림책)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유치원 친구 이경희가 놀러 올 때면 방에 하나 가득 그 책들을 꺼내놓고 책만 보는 체하거나 책을 한 권씩 들고 뒷동산의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곤 했어 또 봄날이면 대청마루 천장에 하얀빛이 어른거리는 걸 바라보곤 했지. 놋대야에 담긴 물이 햇살에 반사되어 그렇게 요사를 떨고 있었던 거야(후에 ‘플라잉 피시’라는 비디오 작품의 모태가 됨).
창신동 무・배추밭에 가을 서리가 내릴 무렵이면 동네 사람들은 ‘큰 대문 집’ 굿을 기다렸어. 징 소리에 맞춰 작두날 위에 맨발로 올라서던 무당이며, 수없이 모여들어 식솔들을 위해 쉴 새 없이 두 손을 비비던 동네 아낙들이며…. 큰 대문 집 굿 은 동네 잡귀신들까지 다 모셔서 배불리 대접하는, 말 그대로 창신동 귀신 달래기 페스티벌이었지. 나는 작품을 만들 때 무의식으로 만들어. 누구나 알고 있듯 인간의 정신적 면은 대부분 18세 이전에 결정되잖나. 나는 이 집에서 17세 반이 될 때까지 살았어. 그야말로 내 무의식의 발현이 최고조에 달한 때지.**
그런데 자네가 이 집터에 내 기념관을 설계하고 있다고? 기념관이라… 어떤 걸 기념하는 집인가? 어떻게 만들 생각인가?
최욱 선생님의 기념관이 들어설 창신동 집터는 주민들의 의지와 서울시의 지원으로 확보한 30평 남짓한 공간입니다. 원래 집의 100분의 1 남짓한 터이기에 선생님의 유년 시절을 상상해 구현하는 건 여러모로 힘들었고요. 대신 창신동이라는 장소의 기억에서 출발하고 싶었죠. 창신동은 서울성곽 동쪽 바깥쪽에 위치해 6백 년 서울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산업 현장입니다. 우리는 한 인물을 기억하는 작은 기념관을 지어 주민들이 돌보는 공간을 만들려고 합니다. 집터에 남아 있던 한옥 구조를 최대한 살려 전시장으로서 기능을 찾아주려 합니다. 또 집 안팎의 바닥에 바둑판처럼 규칙 있는 패턴을 만들어 바둑의 수처럼 다양한 변화를 상상해봤고요.
백남준 자네가 내 이야기를 인용한 인터뷰를 종종 봤다네. 내 생각에 동의하는 바가 좀 있었던 모양이군. 그중 “지구 역사상 인류 역사는 정말 짧고, 그 인류 역사상 문자의 시대는 정말 짧다. 그런데 우리는 기껏 문자를 가지고 인류를 논한다. 우리는 문자 이전의 소리 세계로 넘어가야 한다”라는 내 이야기와 한옥을 연결해 이야기한 부분이 흥미로웠지.
최욱 한국의 전통 건축을 논할 때 흔히 눈에 익숙한 조선 후기의 형식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인지’ 범위에서는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인지는 아주 오래 전에 새겨진 유전의 흔적으로 우리 몸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시대의 지배를 받는 전통 혹은 현대의 형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개인마다 다르게 주어진 시간과 장소의 상황에서 적절하게 처신하려 할 뿐이죠. 인류 문화에서 문자로 기록된 역사는 아주 짧은 순간이기에 그 이전 역사, 즉 음성 세계를 찾고 싶다고 하신 말씀은 제게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제가 몸담고 있는 장소, 그리고 제가 경험한 시간의 기억을 드러내고 싶습니다.
1983년 뉴욕 스튜디오에서 임영균이 촬영한 백남준.
백남준 1980년대부터 대규모 공공 예술 성격의 작품을 시작하면서 건축에 대해 많이 생각했지. 내 예술을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광장으로 끄집어내려면 건축이 필요하겠더군. 건축가가 있어야 그 공간을 이해하고, 그 공간에 맞는 크기와 형태를 나하고 같이 창작해낼 수 있겠더라고. 건축 김원 대형(건축가 김원)과 함께 한 ‘다다익선’이 그랬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나선형 계단이 있는 중앙홀에 1천 대가 넘는 TV 탑을 세우는 일이었으니까. 브라운관이라 엄청 무거운 TV를 쌓아 올리는 것도 일이었고,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 그 공간과 상생하는 조형적 가치를 만드는 거였어. 그 많은 TV를 쌓는 탑의 설계를 김원 대형이 했어. 결국 바닥을 뚫고 지하 암반까지 기초공사를 했지. ‘다다익선’으로 나는 막대기 시집갔지(막대기 시집간다는 것은 처녀가 시집갈 때 혼숫감을 준비할 형편이 안 돼서 부지깽이 하나만 들고 시집간다는 이야기다). 김원이 전부 했지. 내가 작품명에 작가는 남준 백, 디자인은 김원, 이렇게 쓰자 했지. 공동 작품으로. ‘Donation of Artist’s’, 이거야말로 요즘들 좋아하는 컬래버레이션이라고.
최욱 그렇죠. 건축이든 미술이든 장르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조선의 선비를 예로 들면 철학, 예술, 건축을 구분 없이 사유했으니까요. 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나 예술가들도 그러했고요. 다만 현대 상황에서는 필요에 따라 서로 협조하는 병치 혹은 혼용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세상은 구분을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백남준 한데 말이야, 그거 아나? 사실 나는 그 중앙홀 형태를 보고는 바로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을 닮은 비디오 작품을 세우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타틀린을 위한 헌정’이라는 제목으로. 러시아 혁명 시절 건축가 타틀린이 에펠 탑보다 훨씬 높게(396m) 설계한 탑인데, 나선형으로 힘차게 솟구치는 변증법적 형태가 백미지. 러시아 구성주의의 걸작이지만 모형으로까지만 만들어지고 실제 건축되지는 못했거든. 그걸 닮은 비디오 작품을 세우고 싶었지. 그런데 레닌 정부의 지시를 받아 설계한 전 세계 공산혁명 기념탑을 닮은 탑이라니 말썽이 날지 모른다고 관계자들이 말리더군. 그래서 잠시 생각한 끝에 새로운 제목 ‘다다익선’을 제안했지. 그저 많은 게 좋다는 의미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활자매체, TV, 라디오, 컴퓨터 등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는 현대사회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지. 시게코는 내가 제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냈다며 호들갑이더군. 한데 제목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좀 흥미로운 말 아닌가? 자네 회사 제목(이름)도 재미나더군.
최욱 처음에는 ‘스튜디오 최욱’이었습니다. 그러다 “최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이런 팀원이 있어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지더군요. 그래서 만든 이름 ‘원오원(one o one / 101)’은 대칭입니다. 숫자로 바꾸어도 대칭입니다. 영문으로 쓰면 형태가 아름답습니다. 한글로는 의미가 없는 음성입니다. 제가 없어도 지속 가능한 이름이지요.
백남준 누군가 내게 예술을 왜 하냐고 묻더군. 인생은 싱거운 것이지. 이 상투적인 세계를 짭짤하고 재미있게 만들려고 하는 거야. 자네는 왜 건축을 하나?
최욱 옷과 음식처럼 건축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저는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죠. 그만큼 공간을 만들고 상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건축은 제 일기의 한 부분이죠. 저는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뉴욕과 서울에서 공연을 통해 선생님을 여러 번 뵐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패션 중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한쪽만 꼬인 멜빵과 단추가 풀어진 셔츠 소매는 연출인가요?
백남준 나보다 내 패션을 먼저 기억하는 이들이 있긴 하지. 파란 주머니 달린 흰 색 와이셔츠(내 발명품), 검정 바지에 멜빵바지로 말이야. 꼬인 멜빵과 단추 풀어진 소매? 이 두 가지 이야기가 답이 될지 모르겠군. 주머니를 덧댄 셔츠는 사실 필요해서 만든 발명품이거든. 나는 뭔가를 빼먹는 습성이 어린아이보다 심했다고. 소지품 못 챙기는 악습관 때문에 입는 피해를 줄여보려는 방책이주머니 달린 셔츠였지. 셔츠 양쪽 위에 커다란 앞주머니 두 개를 꿰매 달아 웬만한 건 모두 집어넣고 다녔지. 나는 이 패션이 꽤 맘에 들었어. 이세이 미야케에게 선물까지 했으니까. 시게코는 이 허름한 차림새를 보고 “예술에만 전념할 뿐 옷차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남준의 습벽”이라 했지만 말이야. 음… 두 번째 이야기는 이거야. 평소 멀쩡히 지내다가도 기자가 왔다는 소리만 들리면 셔츠의 단추를 어긋나게 끼웠지. 나는 평범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거든. 답이 되겠나?
* 백남준은 자신의 성장 과정과 정신적 배경을 담은 비디오 프로그램 <서울에서 부다페스트까지>를 제작했다. 이 영상 속에 ‘큰 대문 집’을 방문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 “남준은 한국의 무속 문화를 사랑하고 자부심까지 가졌다. 그는 한국의 샤머니즘을 그의 어머니처럼 종교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예술적인 영감을 얻는 소재로 여겼다. 남준 안에는 무당의 신기 같은 게 있었던 듯하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부수고, 미친 듯 무대 위를 뛰어다니던 퍼포먼스 장면, 샬럿 무어맨과 함께 전위적 공연을 했던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영락없이 신들린 무당의 모습 그대로였다. 남준은 1984년 귀국 당시 <중앙 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예술은 매스게임이 아니에요. 페스티벌이죠. 쉽게 말하면 잔치입니다. 왜 우리의 굿 있잖아요. 나는 굿장이에요. 여러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도록 부추기는 광대나 다름없지요.”<나의 사랑, 백남준> 중
백남준 + 미디어 아티스트 최종범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 아닌가”
1 백남준의 대표작 중 하나인 ‘TV 부처’. 1982년 휘트니 뮤지엄 전시 모습으로 사진작가 임영균이 촬영했다. 2 <백남준 쇼>에서 백남준의 ‘비디오 샹들리에’ ‘TV 샹들리에’ ‘TV 첼로’ 등이 자리한 방 ‘LOVE’를 미디어 아티스트 최종범이 사랑을 빛으로 표현해 새로운 공간으로 연출해냈다.
최종범 일본 고베예술공과대학교 예술공학부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학과를 졸업했다. CG 애니메이션, 멀티미디어, 영상, 전자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작업으로 미술 전시뿐만 아니라 무용 공연, 오페라, 패션쇼, 콘서트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미디어 아트의 확장 가능성을 탐색해가고 있다. 미디어 시티 서울2002전, 상하이 비엔날레(2004), 싱가포르 아트 페스티벌, Louvre des Antiquaires Place du Palais Royal 파사드(파리), 디토 페스티벌(2009, 2010), 쾰른 아트 페어 등 국내외 다수의 전시회와 페스티벌 공연에 초대받아 비주얼 퍼포먼스 작품을 발표해왔다.
백남준 1960년대 초 내가 처음 TV를 샀을 때는 무엇이 나올지 전혀 몰랐어. 주사선走査線만 조작했는데도 새로운 그림이 펑펑 쏟아져 나왔지.(1984년 KBS 특집 프로그램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세계> 중) 1963년 열세 대의 TV를 이용해 연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독일 파르나스 갤러리)이 비록 실패했지만 난 확신했지.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치할 것이 확실해 보였어. 서양 미술사의 주류는 비디오아트가 될 것임에 틀림없었지. 2인치 두께의 얇은 TV가 나오고 크기가 30×40m까지 되면 우리는 유명한 화가들과 경쟁하는 입장이 아니라 그들을 뛰어넘을 것이라 봤지.(전시 <시간의 색깔> 도록에서) 2016년이 되었는데, 어떤가? 미디어 아트가 미술사의 주류가 되었는지 궁금하네.
최종범 선생님께서 예측하신 대로 2016년의 우리는 종잇장처럼 얇고 인체 공학적으로 휘어지는 화면이나 투명한 창으로 구현되는 스마트 기능의 TV까지 나오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끊임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고, 더불어 아티스트들은 더욱더 업그레이드되어가는 영역에 도전과 시도를 거듭하며 창작 활동을 해야 하죠. 미디어 아트가 미술사의 주류가 되었냐고 물으셨죠? 개인적으로 저는 예술이라는 분야에 경쟁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경쟁보다는 끝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아티스트들의 갈망이자 욕구의 표현이 있을 뿐이죠. 아티스트에게 새로운 작품을 완성하며 얻는 성취감은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한 호흡기와 같다고 생각하고요.
백남준 2000년엔가 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살면서 제일 실패한 일이 무엇이냐” 묻더군. 나는 명성도 얻었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지. 그런데 나와 유사한 환경의 명성을 지닌 예술가에 비해 유독 돈을 버는 데 실패한 것 같아.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년까지도 나는 꽤 경제적 고통을 당했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만들 때 40만 달러가 들었는데, 그때 진 빚으로 몇 년간 죽을 고생을 했지. 구겐하임 전시회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료비를 조달하기 위해 정든 작업실까지 팔려고 내놓았을 정도였고. 사실 비디오아트라는 게 실업實業, 즉 비즈니스는 아니나 적어도 허업虛業이라서. 허업이란 아이디어와 자금과의 마이너스 곱절이라는 말이지. 비디오아트로는 어떠한 아이디어가 있어도 돈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마을의 이름 없는 발명가 겸 중소기업의 사장이나 다름없잖나.(백남준이 와타리 화랑에서 출판한 <바이 바이 키플링> 중) 지금은 어떤가? 미디어 아트라는 예술로 예술가들이 먹고사나? 자네는 이 예술로 먹고사나?
최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 또한 작품 규모가 큰 미디어 아트 작업을 하다 보니 종종 어렵습니다. 아쉬운 것은 아직도 광범위한 미디어 아트 세계가 제대로 이해받지 못해 실험적 시도가 필요한 경우에도 공공 기관이나 투자자 를 설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익숙한 작품만 선호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서두가 너무 길었네요. 이 예술로 먹고사느냐고요? 글쎄요, 제 입장에서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제게 모든 작품 활동은 때로는 다이내믹한 즐거움과 사랑, 그리고 슬픔과 고통이 함께하는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뿐인 삶, 그보다 값진 것은 없기에 후회 없는 삶을 느끼고 또 경험하려 합니다. 돈으로도 채울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선생님께서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백남준 “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시대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이 내 어록 중 하나라며 자꾸 본떠 쓰더군. 실제로 나는 서로 섞일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것들을 비빔밥처럼 버무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걸 즐겼지. 쉬운 예로 서울 아시안게임을 위해 만든 ‘바이 바이 키플링’을 볼까. 서양 연주가가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 일본 마라톤 선수가 결승 테이프를 끊는 장면, 서양의 타악기 연주와 한국의 사물놀이 연주가 함께 울려 퍼지는 장면. 그야말로 동양과 서양, 테크놀로지와 인간성,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온갖 요소를 뒤범벅으로 섞은 ‘비빔밥 정신’이 담겨 있지. 자네 작업도 보니 영락없이 비빔밥 같더군. 영상, 사운드, 설치미술, 퍼포머가 총동원되는 비주얼 퍼포먼스가….
최종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질적인 것들이 버무려져 각기 지닌 본질을 뛰어넘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낸다는 것… 참으로 멋진 일이죠. 돌이켜보니 초등학교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왜 그림은 캔버스라는 사각 규격 안 에서만 그려야 할까?’라는 불만 같은 의문이죠. 어른이 되면 우주 공간에 그림을 그려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죠. 사실 아직 우주 공간에서 비주얼 퍼포먼스 작품을 구현해보지는 못했지만, 틀에 박힌 캔버스는 물론 브라운관에도 구애받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해 다양한 방식으로 오감을 자극하는 비주얼 퍼포먼스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주 공간에서 비주얼 퍼포먼스 작업을 통해 또 다른 생명체와 소통하고 싶은 바람은 버리지 못했죠. 아차, 제 작품 세계를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네요. 저는 영상 매체의 기본 요소라 할 수 있는 ‘빛’과 ‘소리’를 가지고 공간과 시각의 다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보고 듣고 있는가?”라는 의문에서 시작했죠. 인간은 사물을 인식할 때 먼저 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접한 정보 데이터로 거의 모든 것을 판단해버립니다. 하지만 같은 사물이라도 어떠한 매개체를 통해 정보 테이터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사물의 본질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정보 테이터를 전달하는 빛에 더 많은 정보 데이터를 존재하게 만들면 어떨까요. 제 작업은 바로 빛에 마술을 걸어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 풍부한 감성을 느끼도록 말이죠. 시력 다음으로 발달한 감각인 청각에도 더불어 마술을 걸어서 말이죠.
보이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영상과 사운드를 실시간 으로 연출해 시청각적으로 제시하는 퍼포먼스, 즉 ‘비주얼 퍼포먼스visual performance’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게 됐죠. 현재는 영상과 사운드를 뛰어넘어 복합적 멀티미디어 요소로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하는 큰 규모의 시공간적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백남준 <백남준 쇼>에서 ‘Homage to Paik Nam June 20160720’이란 작품을 헌정했더군. 대칭을 이루는 두 개의 원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영상이던데. 자네가 설명하길 “원은 인생과 인연이다. 그래서 서로 소통하는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라 했더군. 자네도 나처럼 인생과 인연을 중히 여기는구먼.
최종범 하나의 원은 관람자(또는 백남준 선생님)이고 다른 하나의 원은 관람자(선생님) ‘외의 것’입니다.그리고 그 두 원은 무한한 반복 속에 서로 소통하는 연결 고리가 존재합니다. ‘외의 것’이란 가족일 수도, 삶터(작품 세계)일 수도, 관람자(선생님)의 마음 한 구석에 늘 남아 있는 욕망일 수도 있죠.
인생은 다양한 사람과 일로 인연이 맺어지고 그 인연줄에 의해 삶의 전부가 바뀌기도 하죠. 인연은 서로 같은 에너지끼리 응집되어 어느 한쪽이 부족하면 다른 한쪽이 그 부분을 채워주는, 서로 에너지를 끌어당 기며 어우러지는 거잖아요. 여기서 소통이 양쪽의 연결 고리가 되어주는데, 인생의 고리죠. 이러한 것이 평생 무한 반복되고요. 이게 인생 아닐까 싶었습니다.
백남준 <백남준 쇼>에서 내 작품 ‘TV 첼로’를 자네만의 방식으로 연출했더군. ‘choi57 visual performance - Love light 20160720’이라는 헌정 작품도 보이던데. 아름다운 사랑의 순간이라…. “길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라고 베를렌이 노래했지. 나는 “내 가슴에 비가 내리듯 내 컴퓨터에 비가 내린다”라고 말했네. 그리고 ‘내 컴퓨터에 비가 내리네’가 나의 비디오 첫 작품이 되었지. 그것은 현상의 비와 컴퓨터 비의 혼합이었다네. 내 두 번째 작품은 센티멘털한 컴퓨터가 되었지. 기계로 표현한 미디어 아트에 스토리와 감수성을 담으려 했지. 자네의 이번 작업도 이런 것과 연결되겠나?
최종범 저는 센티멘털한 공간을 연출했습니다. 잠시나마 마음속 감수성을 되살려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말이죠. 사랑을 빛으로 표현했죠. 사랑이 그러하듯 빛에도 다양한 빛이 존재하고, 빛이 존재해 그늘이 생길 수 잖아요. 제게 사랑은 연인 간의 사랑보다 가족과의 사랑으로 더 진하게 다가옵니다. 아버지께서 곁을 떠나시고 나서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죠. 이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만든 작곡가 윤자은 씨 또한 최근에 떠나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곡을 만들었습니다. 가정의 그늘이 되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모든 것을 감당해온 아버지의 삶. 뒤늦게 그 존재와 가치를 깨달았을 때 아버지는 곁에 계시지 않는 안타까움…. 제가 연출한 빛과 소리의 하모니가 사람들의 마음에 치유로 다가갈 수 있기를, 소통의 연결 고리가 되기를 바랐죠. 그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마음이 찡했다는 관람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아직도 사람들은 미디어 아트를 어려워하거나, 폄하하거나, 모른 척합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비디오 소통 혁명의 최종 목적은 거침없는, 혼선없는 상호 소통”(백남준의 <빙햄턴 편지> 중)인데도 말이죠.
백남준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 아닌가. 속이고 속이는 거지.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지.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지. 엉터리와 진짜는 누구에 의해서도 구별되지. 내가 30년 가까이 갖가지 해프닝을 벌이고, 예술 같지도 않은 도구로 예술을 선보였을 때 대중들은 미친 짓이라고 웃거나 난해하다는 표정을 지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었지(1984년 6 월 26일 조선일보 인터뷰 중). 대중은 자네의 작업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살피고 의문을 품고 꿰뚫어보게 될 거야.
최종법 선생님, 직접 ‘나의 예술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백남준 내가 하는 예술은 실험을 위한 실험 예술이야. 예술 형태 이전의 것을 실험하고 있는 거지.(한국일보, 1984년 친구 이경희와의 인터뷰 중)
최종범선생님은 미술사에 남을 위대한 예술가시죠? 백남준 남긴 남을 거야. 최종범 어떤 예술가로 남기를 원하시나요? 백남준 미디어 아티스트. 최종범 그냥 그렇게만 기억되면 섭섭하지 않으시겠어요? 백남준 그럼 어떡해.(2004년 10월 6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발췌)
백남준 + 갤러리 예 대표 김방은
천재 예술가의 삶이 남긴 마스터피스
백남준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인 ‘거북’의 에너지에 압도되어 <백남준 쇼>를 기획하게 되었다는 갤러리스트 김방은.
김방은 런던 에식스 유니버시티에서 갤러리 경영학을 전공했다. 1978년 예술 문화의 다양한 전달자를 표방하고 출범한 (고 이숙영 대표)예화랑의 현 대표로 아트 컬래버레이션을 통한 신개념의 갤러리 문화를 창조하는 갤러리스트다. 기업과 관객이 예술로 소통할 수 있는 컬처노믹스 프로젝트 등을 선보이고 있다.
백남준 자네가 기획한 <백남준 쇼>를 봤지. 관람객들에게 내 마스터피스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던데. 사람들이 정말 내 대표작을 모르나? 난 스놉snob이라 명성을 즐기는데. 하하. 돈은 없어도 명성은 있었다고.(2004년 10월 6일 마 지막 퍼포먼스 후 가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발췌)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내 대표작을 모른다고? 어쩌다 그렇게 된 것 같나?
김방은 대부분의 사람은, 특히 대중은 선생님의 작품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을 치열하게 연구한 전문가도, 심지어 선생님과 함께 작품 활동을 한 이들조차도 종당엔 입을 모으죠. “백남준을 모른다”라고. 선생님의 세계는 광대하고 심오하며 예측 불허하기 때문이죠. 미술에 관심 있는 이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다다익선’을 알지만, 일반 대중은 텔레비전을 쌓아놓았던 예술가 정도로 기억하는 것 같아요. 그동안 열린 선생님의 전시가 너무 미술 사조적인 해석으로 어렵게 설명되지 않았나 싶어요. 일반 대중은 미술 운동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거든요. 특히 요즘 젊은 층이 그렇고요.
백남준 자네는 내 마스터피스로 1993년에 만든 ‘거북’을 골랐더군. 사실 나는 인생의 가장 특별한 작품으로 ‘TV 부처’ ‘TV 정원’을 꼽는데 말이야.(2004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발췌) 하하. 내 마스터피스로 ‘거북’을 꼽은 이유가 있나? 김방은 ‘거북’만이 선생님의 마스터피스라 생각한 건 아니에요. 전시에 스토리를 넣고 싶어서 이 작품을 마스터피스로 더 부각시킨 면도 있습니다. ‘거북’에 디스 트릭 팀의 4D 영상 기술력이 곁들여진다면 멋진 작업으로 재탄생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고요. 선생님의 전성기 시절에 만든 ‘거북’이 내뿜는 에너지는 가히 선생님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가 뿜어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백남준 ‘거북’은 나에게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지. 사실 거북이라는 존재 자체가 존귀하다고 생각하거든. 거북은 공룡 시대부터 이미 현 상태로 생존해 있었고, 공룡이 이미 멸종되었으면서도 아직 기승스럽게 살고 있지. 개인個人으로 장수 長壽지. 쾌속히 문명을 만들고 동시에 지구 자체를 파멸시키는 인류와 정반대지. 따라서 거북은 인간 문화의 감속화, 장수화를 노리는 재순환(recycle) 정신 의 상징적 존재거든.(백남준의 , 1993년 중)자, 그럼 이 전시를 내게도 좀 자세히 설명해주게나. 방을 네 개로 나누고 ‘HOPE’ ‘NOSTALGIA’ ‘LOVE’ ‘INFINITY’ ‘IDEA’라고 이름을 붙여놨더군.
김방은 저는 관람객이 작품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해주길 바랐어요. 선생님은 매우 인간적이고 재미있는 분이시잖아요. 전시에 인간적인 백남준의 모습이 많이 묻어났으면 했죠. 미술관 전시처럼 연대기적으로 풀고 싶지 않았고,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영화처럼요. 마스터피스를 만들어가는 천재 예술가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전시, 그러면서 우리 삶도 생각해보는 전시로요. 첫 번 째 전시실 HOPE는 천재 예술가의 탄생, 선생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방이에요. NOSTALGIA는 선생님의 전성기 시절을 회상하면서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공간이고요. LOVE는 천재 예술가의 사랑을 전시장 가운데 펼쳐놓았죠. 선생님은 인류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잖아요. INFINITY에선 천재 예술가 삶의 영원함을 작품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삶과 죽음을 초월해 남겨진 예술을 말이죠. 이러한 천재 예술가의 삶을 통해 남겨진 마스터피스를 마지막 IDEA 전시실에서 만나는 게 이 전시의 스토리입니다.
백남준 나도 살아 있을 때 여러 테크니션, 아티스트와 함께 일하는 걸 좋아했지. 젊은 작가들과 연출팀이 이번 전시에 함께해서 기분이 좋더군.
김방은 미디어 아티스트 최종범은 프로젝션을 통해 자신의 영상 작업을 틀어 LOVE 전시실을 더욱 로맨틱하게 연출해주었죠. 화려하고 아름다운 영상들이 하나의 샹들리에가 되어 선생님의 아름다운 작품 ‘TV 첼로’ ‘TV 샹들리에’ 등과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전시장이 되었고요. IDEA 전시실은 미디어 아티스트의 창시자와 그를 잇는 차세대 영상팀 디스트릭 팀의 컬래버레이션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디스트릭 팀은 입체적 영상과 컬러, 사운드를 가미해 1993년도에 만든 선생님의 ‘거북’을 더욱 드라마틱한 공간 안에 숨 쉬도록 만들어주었죠. 그런데 선생님, 늘 궁금했어요. 선생님 예술의 최종 지향점은 무엇이었나요?
백남준 소통이지. 소통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메우는 미디어 자체야. 텔레비전, 전자회로의 네트워크는 불교, 도교의 인연과 같지. ‘인연’이란 말이 참 재미있거든. 인은 중심이고, 연은 가장자리야. 그러니까 우연과 필연이 결부된 관계야. 결국에는 모두 노자의 도와 같거든. 인간이란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해서 상생한다는 뜻이지.(1991년 철학자 황필호와의 대담 중) 예술도 마찬가지야. 나는 아이들이 작품에 자석을 가져다 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 정확히는 자석이 음극관에 닿는 순간, TV 속 이미지들이 기계의 것에서 벗어나 비로소 백남준의 예술, 그리고 인간의 것이 되는 거지. 그게 소통이야.
✔ 지금 백남준을 만나는 여섯 가지 방법
<백남준 :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관람자나 동업자가 아닌 백남준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바를 서술한 책으로,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되는 ‘백남준의 책’이라 할 만하다. 백남준의 인생과 작품을 지금까지의 어떤 도록이나 평론보다 더 상세하게 설명해 그의 예술 세계 바탕에 어떤 사상과 발상이 있었는지 살펴보게 한다. 백남준, 백남준아트센터.
<나의 사랑, 백남준> 항상 뭔가를 잃어버리고 다니는 덜렁이, 커피 반 설탕 반일 정도로 단것을 좋아하는 철부지, 늘 주위 사람을 웃게 만드는 재담꾼. ‘위대한 예술가’라는 이름에 가려진 ‘인간 백남준’의 모습을 살을 맞대고 산 아내 구보타 시게코가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의 작품이나 업적 또한 평생의 동반자 시각으로 들여다본 책. 구보타 시게코ㆍ남정호, 아르테.
<굿모닝, 미스터 백!> 김홍희 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이 백남준의 예술적 핵심을 미술사적으로 세밀히 정리했다. 백남준 삶의 여정과 작업, 만남과 헤어짐의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으며, 샤머니즘, 선 사상, 에로티시즘, 기술적 측면에 대한 연구까지 보완해 넣었다. 김홍희, 디자인하우스.
<나의 유치원 친구, 백남준> 백남준이 3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기자들 앞에서 “나의 유치원 친구를 만나고 싶다” 던 그 애국유치원 친구, 이경희가 본 인간 백남준의 이야기. 함께했던 추억, 극적인 재회 후 나눈 우정이 저자의 생생한 기억과 자료를 통해 드라마처럼 담겼다. 백남준의 재기 넘치는 손으로 거듭난 전시 리플릿, 엽서, 메모지 등 저자가 간직한 사물도 함께한다. 이경희, 디자인하우스
백남준 아트센터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의 바람인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을 구현하기 위해 백남준의 작품 세계에 대한 창조적이면서도 비판적 연구와 함께 동시대 예술의 이슈를 함께 선보이고 있다. 정지된 전시회가 아니라 미술관 곳곳에서 수시로 행위예술이 벌어지고 관객과 상호소통하는 작품을 전시한다. 세계 유일의 미디어 아트 전문 기관이기도 하다. 백남준의 작품 ‘달은 가장 오래된 TV’ ‘TV 부처’ ‘TV 정원’ <굿모닝 미스터 오웰> ‘삼원소’ 등 대표작 67점과 42점의 드로잉, 40여 년간 작업한 비디오테이프 2천2백85점 등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위치. 문의 031-201-8500
백남준쇼 전시 <백남준 쇼> 백남준 서거 10주기 특별전이자 백남준의 생일인 7월 20일에 개막해 ‘백남준의 컴백 쇼’임을 표방한 대중적 전시. 백남준의 작품 1백점, 임영균 작가가 찍은 백남준 사진 43점 등 총 1백43점을 통해 백남준 작가가 마스터피스를 완성하기 위해 걸어온 인생 여정을 재조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백남준이 살아 있다면 누구와 함께 어떤 작업을 할까’라는 상상에서 시작해 YG PLUS, D’STRICT 영상 팀, 미디어 아티스트 최종범 등 젊은 아티스트들과의 컬래버레이션이라는 흥미로운 결과물로 완성되었다. 10월 30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다. 문의 02-542-5543
사진 제공 임영균 자료 제공 갤러리 예(02-542-5543) 참고 도서 <나의 사랑_백남준>(구보타 시게코ㆍ남정호, 아르테), <굿모닝, 미스터 백!>(김홍희, 디자인하우스), <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이경희, 디자인하우스), <말에서 크리스토까지>(백남준, 백남준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