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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보영 일상의 표정

이보영 작가는 1985년생으로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와 미술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지금까지 아홉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고, 80회 이상 그룹전에 참가했다. 2014년 전라북도 해외 지원 사업 공모에 당선되어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전시를 했고, 현재 전북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8월의 어느 날 오후 1시.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짙고 푸르게 빛나는 초록빛 마당을 지나 이보영 작가의 작업실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깨끗이 빨아 말려 거꾸로 촘촘히 걸어놓은 붓. 새끼손가락보다 얇은 것부터 검지보다 두꺼운 것까지, 커다란 화폭을 오밀조밀 채우는 그의 섬세한 붓질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작업실 벽면을 가득 채운 작품들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아파트’다.

“‘아파트’라는 공간에 관심을 가진 건 대학 졸업 작품을 준비하면서부터예요. 무엇을 그려야 할지 막막해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죠. 그러던 어느 날, 지은 지 오래된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 안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봤죠.” 초반에는 사진으로 찍은 아파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 그러다 조금씩 의자, 화분, 우산 같은 일상 사물에 상상 속 이미지를 재조합해 그려 넣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아파트를 수묵으로만 단조롭게 그려서 삭막하고 단절된 공간을 표현했다면, 요즘은 아기자기한 사물에 다양한 색을 입혀 표현하고 있어요. 초기에 그린 아파트를 보면 네모난 칸마다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아주 세밀한 묘사를 하기도 했지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어떤 통로가 필요하죠.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소통을 허하는 ‘창’이라는 장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어떤 숲’, 한지에 먹, 채색, 116.8×91cm, 2015
‘창’과 ‘초록’ 그리고 ‘기린’은 이보영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다. 처음 아파트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 열면 소통하고 닫으면 단절되는 기능을 하는 창은 가장 중요한 소재였다. 기린은 초식동물의 온순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이용해 서로 단절된 타인의 공간을 쉽게 두드릴 수 있는 오브제로서 그리기 시작했다. 작가는 점점 높아만 가는 아파트 숲을 바라보며 진짜 자연의 숲을 거니는 목이 긴 기린을 떠올렸다. 그리고 도시의 단절을 상징하는 아파트라는 공간 안에서도 푸르름이 싹텄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무나 잎, 녹색의 자연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표지작 ‘In natural’(작품의 일부) 역시 ‘창’ 대신 화분안에 일상 사물들을 그려 넣어 화분에서 식물이 자라나듯 아파트라는 공간에서도 꿈과 희망이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이보영 작가의 작품 안에 담긴 초록은 싱그럽고 정답다. 물감과 분채를 섞어 그때마다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초록은 한지에 스며들면서 일정한 온기를 유지한다. “저도 모르게 제 머릿속에 정해진 초록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일부러 계산해서 색을 만들어내지 않는데도 색을 섞고 보면 다 비슷해요. 그때마다 물감을 다르게 섞는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늘 비슷하게 나와서 일부러 다양한 초록색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색을 섞기도 해요.” 한국화를 전공한 이보영 작가는 한지가 지닌 따스함을 좋아한다. “지금까지는 한국화 재료로 작업하는 게 재미있어요. 제 성향과도 잘 맞는 것 같고요. 서양화 재료에 비해 다루기 조심스러운 면이 있지만, 한지에 물감이 스며드는 그 따뜻한 느낌이 좋아요. 한번 잘못 그리면 수정할 수가 없어서 선을 그릴 땐 숨을 참아야 하지만요.(웃음)” 새로운 재료,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이보영 작가는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싶다고 말한다. 작품이란 곧 작가가 살아온 삶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전공하게 되고, 지금까지 각종 전시를 준비하며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과 변화에 대한 부담이 심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지금 내가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하자는 생각을 해요. 작가로서의 의무감으로 지금 하고 싶은 걸 접고 다른 작업에 뛰어든다면 나중에 미련이 남을 테니까요.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결혼을 하거나 생활환경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삶의 무게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이보영 작가는 최근 입체 작업에 도전하고 있다. 지난봄 선보인 초대전 <숲_ 일상표정>은 그림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꺼내는 첫 번째 시도였다. “제 키만한 기린을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들었어요. 조소를 전공한 지인에게 도움을 받아 처음 시도한 작업인데, 나중에는 손이 떨릴 정도로 힘들었죠. 평면에서 입체로 넘어가는 첫 번째 작업을 끝낸 셈이에요.” 다음 개인전 역시 평면 작업과 입체 작업을 한 공간에 들인 형태로 구상하고 있다. “요즘 제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소품을 스컬피sculpey로 조금씩 만들어보고 있어요. 그렇게 평면 속 사물을 하나씩 입체로 꺼내오는 거죠. 천장이 높은 넓은 전시장에 그림과 입체로 만든 사물을 함께 놓고 마치 집 안에서 창을 통해 자연을 바라보는 느낌으로 관람할 수 있는 전시를 해보고 싶어요.”

유난히 덥고 뜨거웠던 한여름 대낮의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길, 이보영 작가의 작업실과 멀지 않은 길목에 서 있는 오래된 저층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동글동글한 서체로 쓰인 ‘기린 맨션’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내 표정도 동그래졌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대학 졸업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골목을 걸었을 10여 년 전의 이보영 작가도 ‘기린 맨션’을 발견하고 셔터를 눌렀을까. 천천히 자기만의 보폭으로 삶을 한 걸음 한 걸음 밟아가고 있는 이보영 작가와 그의 그림 속 목이 길고 어여쁜 기린의 모습이 겹쳐 보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글 유주희 기자 | 사진 이창화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