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다시 찾고 싶은 여름 여행지
“난 언제나 나를 순수하게 해주는 곳으로 가고 싶다”던 생텍쥐페리의 말이 떠오르는 여름밤, 여섯 명의 여행자가 풀어놓은 잊지 못할 그 여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내가 만난 완벽한 세계, 바타네스

바타네스는 필리핀 최북단, 루손 섬과 대만 사이에 위치한 열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제도다. 강한 태풍이 자주 지나가기 때문에 ‘태풍의 섬’으로도 불린다. 이 섬에는 2만 명 정도가 사는데, 2000년대 초반까지 자급자족을 했다고 한다. 마을 최고 번화가에는 300~400m 정도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옷 가게와 채소 가게, 철물점, 구멍가게가 늘어서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한 마을이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곳을 만나게 된다. 더 이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오직 선의와 평화로움만 가득한 그런 곳. 지금까지 여행을 하며 그런 곳을 딱 두 번 만났는데, 10년 전 라오스 루앙프라방이 그랬고, 크로아티아 이스트라 반도에 숨은 작은 마을 모토분이 그랬다. 바타네스도 그런 곳이다. 바타네스에서 머무르는 일주일 동안 별달리 한 일은 없었다. 주민들과 이상하게 생긴 그물로 낚시를 하거나, ‘얌’이라는 고구마 비슷하게 생긴 뿌리 작물을 캐거나, 말보로 힐이라고 부르는 울퉁불퉁하게 생긴 언덕에서 소 치는 아이들과 놀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섬을 빙빙 돌거나, 스쿠버다이빙을 하면서 놀았다. 바타네스에서는 나를 비난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게다가 난 보름쯤은 신나게 놀 수 있는 자격 정도는 갖추었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으니까.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예요?”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주저 없이 “바타네스요”라고 대답한다. 꼭 “왜요?”라는 질문이 따라오는데 그때마다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바타네스에 머무는 동안 자동차나 양복, 구두를 사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령 하루 종일 질리도록 바다를 바라보거나 낯선 이국 사람들과 밤새 맥주잔을 기울이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이 일들의 효용을 도저히 질문자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_최갑수(시인, 여행 작가)


나만 알고 싶은, 경북 봉화 바래미마을

여행을 일로 하는 사람에게 여름휴가는 피하고 싶은 과제이자 로망이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 여름휴가는 꼭 가야만 하는 숙제가 되었다. 그러다 2년 전 기가 막힌 곳을 발견했다. 그곳은 바로 경북 봉화. 태백산맥에서 소백산맥이 뻗어 나오는 경북 오지 산간 지방에 위치한 이곳은 강원도 못지않은 청정함과 시원함이 매력적인 고장이다. 한 여름 2주만 제외하고는 그다지 덥지도 않다. 게다가 경북 유교문화권 아래에 있어 2백 년 이상 된 고택도 많다. 시원한 한옥 마루에서 뒹굴거리다 계곡에서 놀고 저녁 먹고 들어와 고택에서 또 뒹군다. 책 몇 권, 영화나 드라마까지 챙기면 완벽한 휴가다. 그곳 사람들이 좋다는 것이야 말로 진짜 비밀인데, 작년에 왔었다고 하니 찐 감자나 옥수수를 담은 접시를 방으로 가만히 넣어주시기도 한다. 고택 주인의 아침 밥상에 은근 슬쩍 숟가락 하나 더 올리기도 했다. 덧붙여 올여름엔 경북 봉화 말고 이런 여행지를 한두 곳 더 찾아볼까 한다. 아마 행선지는 지리산 부근의 어느 순박한 마을이 될 것이다. 어쨌든 찾게 되면 이번에도 절대 절대 소문내지 않을 작정이다. _김남경(<차없이 떠나는 주말여행 코스북> 저자)


낭만이 유예된 섬, 하와이

나는 휴양지 마니아다. 일없이 바다 놈팡이가 되어 파도 한 자락에 맥주 한 모금씩 마시며 유유자적 노니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 그런 고로 보라카이, 세부, 보홀, 파타야, 푸껫, 사이 판, 괌, 마요르카 등 바다를 낀 휴양지라면 꽤 많이 다녀봤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휴양지의 끝판왕은 바로 하와이다. 하와이가 내 마음속 휴양지의 최종 보스인 이유는 어린 시절 첫 번째 해외여행으로 ‘갈 뻔한’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아빠가 일로 하와이에 한 번 다녀오시고 나서 “이곳이 지상낙원!”이라 느끼셨단다. 아빠는 우리 가족 첫 해외여행지로 하와이를 점찍었고 나와 동생은 둘이 손 꼭 잡고 미국 대사관에 가서 긴장 넘치는 인터뷰를 통과해 겨우겨우 비자까지 만들었다(그때는 무비자로 하와이에 갈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떠나기 얼마 전 IMF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우리 가족의 첫 해외여행도 결국 좌초되었다. 난생처음 비행기 타고 외국 간다는 우리 남매의 꿈도 산산조각, 가족과 지상낙원에 간다는 부모님의 특급 낭만도 풍비박산이 났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은 고생 끝에 경제적 난관을 돌파해 오늘에 이르렀지만 어쩌다 보니 결국 하와이에는 가지 못했다. 각자의 생활이 생기며 시간 맞추기도 어려워졌고, 그 시절의 낙관과 패기를 상실한 요즘엔 ‘가족 하와이 여행’이라는 큰 지출을 감당하기도 벅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하와이 여행을 꿈꾼다. 휴양지 마니아임에도 아직까지 하와이에 가지 않은 건 하와이 여행만은 꼭 가족과 함께 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빠가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그 섬, 우리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그 섬으로 날아가 그 옛날 우리 모두의 좌초된 설렘을, 보상받고 이루지 못한 낭만을 꼭 이루고 싶다. _홍인혜(일러스트레이터,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아서> 저자)


자메이카의 레게 리듬이 필요해

자메이카를 생각하고 있다. 작년 겨울의 여행 이후로 줄곧. 세상에서 가장 너그러운 표정으로 “야-만!”을 외치던 사람들이 그리워서다. 레게 리듬에 맞춰 흐느적거리던 그들의 몸짓을 떠올린다. “One good thing about music, when it hits you, you feel no pain.” 카리브의 바닷가에 누워 밥 말리의 음악 하나만 흥얼거리면 천국이 따로 없는 세상. 럭셔리한 리조트가 밀집한 외지인들의 천국 몬테고베이보다는 서부 해안의 네그릴에 방을 빌리고 싶다. 야자나무 아래 알록달록 페인트가 칠해진 양철 지붕 집을 넉넉히 한 달 동안 말이다. 네그릴은 1970년대 히피들의 영혼이 스며든 자유로운 동네다. 자메이카에서 합법적인 마약인 간자Ganja의 향기가 산들바람처럼 불어대지만, 그것마저도 참으로 자메이카다운 멋으로 느껴진다. 네그릴에서 하고 싶은 일은 단순하다. 탄산음료 같은 물빛의 세븐마일 비치에 누워 뒹굴뒹굴하기. 누군가 “야-만!” 하고 말을 걸어올 테니 외로움 따윈 두렵지 않다. 배가 고프면 자메이칸의 솔 푸드 저크 치킨jerk chicken을 실컷 먹어야지. 릭스 카페의 절벽에 올라 용기 있게 바다에 몸을 던질 거다. 동네 아주머니가 보도블록에 앉아 땋아주는 싸구려 레게 머리도 꼭 해봐야겠다. 별이 뜨면 그을린 피부에 어울리는 원피스로 예쁘게 차려입고 네그릴에서 가장 핫한 술집 마가리타빌에 가고 싶다. 자메이칸 럼에 실컷 취해 레게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열심히 흔들며 춤도 춰볼 테다. 아, 이 글을 쓰다 보니 자메이카에 더 가고 싶어진다. 야-만! _함희선(<뚜르드몽드> 기자)


생트로페의 낭만

칸에서 서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생트로페는 휴가에 목숨 거는 프랑스인들이 워너비로 여기는 꿈의 바캉스 장소다. 인구 5천 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휴가철에는 하루 10 만 명, 해마다 5백만 명이 찾아온다. 2년 전 여름, 생트로페를 찾았다. 잉크를 푼 것 같은 푸른 바다와 그림 같은 저택과 호텔, 수백 대의 고급 요트는 여느 유럽 휴양지의 화려한 얼굴을 대변하는 듯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 작은 마을 특유의 편안함과 아늑함 때문이다. 항구 뒤 골목으로 들어서면 화사한 파스텔컬러의 집과 알록달록한 꽃나무, 건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인상파 화가의 그림 속 풍경처럼 아름답다. 생트로페가 유명해진 것은 1956년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가 출연한 영화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의 촬영지가 되면서부터다. 브리짓 바르도는 영화 촬영 후 생트로페의 매력에 빠져 이곳에 아예 둥지를 틀었다. 골목, 호텔 바, 갤러리 등은 그녀의 초상화와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다. 이곳엔 칸이나 니스 같은 휴양지와 달리 작지만 개성 있는 5성급 호텔이 즐비하다. 브리짓 바르도가 첫날밤을 보낸 호텔이자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즐겨 머물던 호텔 라 퐁슈La Ponche는 작지만 남프랑스적인 우아함을 간직한 호텔이다. 어부들의 집과 그들이 드나들던 바가 있던 건물 다섯 채를 이어 만든 호텔로, 사강이 머물던 방의 창문을 열면 코발트빛 지중해가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이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워 사강은 호텔 건너편에 아파트를 얻었다고 한다. 나는 별빛에 반사된 밤바다, 빛바랜 분홍색 집들과 불빛 속에 반짝이는 꽃들, 시공간을 초월한 듯 몽환적인 생트로페의 밤 풍경에 취했다. 왜 수많은 사람이 생트로페를 찾는지 알 것만 같았다. 올여름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다짐한다. 언젠가 이곳에서 내 인생 가장 값비싼 휴가를 보내겠다고. 사강이 머무른 그 방에서 밤바다를 바라보며 밤새도록 와인을 마시겠다고. 생트로페, 이곳이야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밀월여행을 떠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생에 한 번뿐인 낭만적인 추억을 남기기에 이만한 곳은 없다. _여하연(<더트래블러> 편집장)


베를린의 여름

한강공원에 나들이 갔다가 뜨거운 햇빛 아래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올해 여름은 또 어떻게 버티나’ 생각하다가 문득 베를린의 여름이 그리워졌다. 따뜻한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잔디밭을 채우고 그 위로 담요를 깔고 누워 일광욕을 즐기던 그때.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도톰한 카디건과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공원까지 걸었다. 하늘은 파란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진 듯했고, 그 하늘 위를 지나는 구름은 마치 솜사탕 같았다. 통일 이후, 베를린 사람들은 일자리가 많은 프랑크푸르트, 뮌헨 등 서독 지역으로 떠났고 ‘베를린 장벽’으로 대표되는 분단의 현장을 아티스트들에게 내주었다. 도시의 공백을 채워준 그들의 영혼 덕분에 몇 해 전부터 베를린은 전 세계에서 엄선한 ‘핫’한 도시 랭킹에서 빠지지 않는다. 베를린 도심에는 뉴욕 소호에 버금가는 감각적인 편집매장이 들어차 있다. 쇼핑을 즐기다 보면 직선에 아름다움을 더해 만든 네오 고딕 양식의 교회인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와 마주치는데, 그 풍경을 “티끌 하나 없이 닦인 쇼윈도에 반사된 네오 고딕 양식의 교회”라 표현하면 적당할까? 매주 도심 곳곳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은 일부러 길을 나서지 않아도 집 앞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사람들 틈에 서서 구운 소시지 위에 케첩과 카레 가루를 뿌려 먹는 독일 전통 간식 ‘커리 부르스트’를 들고 공연을 보노라면 이 도시는 잠시 머물다 갈 뿐인 여행자에게 마치 현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선물한다. 그 어느 해보다 뜨거울 것이라는 서울의 여름을 피해 베를린의 짙은 녹색 잔디 위에 다시 누우면 어떨까? 나뭇잎 그늘이 내 얼굴을 살포시 덮어주던 ‘베를린의 여름’이 그립다. _백종민(<한 달에 한 도시> 저자)


#여행지 #바타네스 #바래미마을 #하와이 #생트로페 #베를린 #자메이카
정리 유주희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