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역사
우리나라 돌인 화강암은 조각하기에 까다롭고 어렵다. 금강역사는 도안 없이 석공의 감각으로 만들기에 우리나라 조각의 섬세함과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므로 많은 애착을 갖고 있다. 대체로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 신장 역할을 하며 ‘인왕역사’라고도 한다. 이 신은 여래의 비밀스러운 사적을 알고 5백 야차를 거느리면서 천불의 법을 수호한다고 알려져 있다.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형 두광이 있어 신성한 지혜를 갖추고 있음을 상징한다. 우리나라 금강역사상의 특징은 중국이나 일본의 금강역사와 달리 무섭다기보다 악의 없는 순진성을 읽을 수 있는 점이며, 석굴암 입구의 금강역사상이 가장 대표적이다.
○ 기우제단
사면에 용을 조각한 기우제단. 동양에서 용은 물의 신으로, 용을 조각한 석조물이나 용머리처럼 생긴 바위에 비를 염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단은 박물관에서 서울 시내 전경을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해 하늘과 가장 가까운 느낌이 들어 애정을 느끼는 유물이다.
○ 와불
누워 있는 불상으로 석가모니가 입적할 때의 모습을 새긴 열반상이다. 17톤의 자연 바위에 새긴 조각으로, 바위 면이 약간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으로 인한 마모가 거의 없어 원형이 잘 보존된 매우 귀한 석조 유물이다.
○ 동자석
동자석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서울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왕족과 고위 사대부의 무덤에 놓인 석조 유물이다. 무덤의 봉분 가장 가까운 곳에 한 쌍의 동자석을 세워 무덤 주인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하며, 엄숙한 묘역에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동자석의 조성 초기에는 불교 동자상 같은 장식적인 표현이 두드러지며 생동감이 강조된 모습이었으나, 서서히 단정한 모습의 유교적 시동상의 모습으로 형태가 변화했다. 17세기 이후로는 점차 문인석과 혼합되는 양상을 보이는 등 조선 후기로 갈수록 동자석 고유의 특징이 사라졌다.
○ 문인석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봉분 앞에 한 쌍식 세운 석조 유물. 우리옛돌박물관의 문인석을 자세히 보면 이 문인석을 제외하고 다른 것은 대부분 짝이 맞지 않는다. 처음에 일본으로 팔리거나 밀반출되었을 때는 짝을 이루고 있었지만, 일본에서 여기저기 팔려 다니면서 짝을 잃어버리고 혼자 돌아와 이곳을 지키고 있다. 문인석의 키는 제각각 다르다. 1474년 <성종실록>에 따르면 석인의 크기를 계급에 따라 제한했다. 대군은 185cm, 1~2품은 170cm, 3~6품은 155cm, 7품 이하ㆍ생원ㆍ진사 등은 140cm 정도의 석인만 세울 수 있었다. 맨 앞의 복두공복형 문인석이 가장 키가 크다. 발끝부터 보면 185cm 정도여서 왕족(대군)의 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 석양(젖을 먹는 새끼 양)
석양은 대부분 서 있거나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표현되었지만, 이 유물은 새끼를 품고 있는 어미 양의 모습으로 모성애를 나타낸 것이 특징이다. 또 무릎을 꿇고 젖을 먹는 새끼 양을 통해 예禮와 효孝를 아는 동물인 양을 잘 표현했다.
○ 벅수
벅수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장승을 부르는 명칭으로 순우리말이다. 장승은 나무로 만든 목장승과 돌로 만든 돌장승 두 가지가 있다. 목장승은 비바람에 쉽게 썩어 주기적으로 교체했기에 그 과정에서 원래의 모습에 다소 변화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돌장승은 한번 세우면 반영구적으로 전승되기에 조형성이나 미의식에 대해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다. 사람의 얼굴을 한 장승을 마을 입구에 세워두면 전염병을 퍼뜨리는 역신이나 잡귀들이 겁먹고 마을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믿었으며, 재화를 막고 복을 가져다주는 신비스러운 힘이 있다고 여겨 마을의 벅수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소원을 정성스레 빌었다. 또 벅수는 전문 장인이 아닌, 마을 주민 중에서 견문이 있거나 장승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제작한 것이기에 형태 또한 정형화되어 있지 않으며 주민들 공동의 요구에 따라 그때그때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 민초들의 삶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석조물이며, 그들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드러난 천진하고 해학적 표현 등이 특징이다.
○ 장군석
장군석(무인석)은 문인석과 함께 능묘 앞에 세우는 석조 유물로, 우리옛돌박물관의 대표 유물이다. 높이가 190cm이며 투구와 갑옷을 갖추고 칼을 들었다. 정면에 보이는 칼자루와 양어깨에는 도깨비 얼굴을 새겼는데, 장수에게 힘을 더하는 벽사진경의 상징 무늬다. 조선시대 <성종실록>에 따르면 왕의 형제인 대군의 능에는 길이 6척(185cm)의 석인상만 세울 수 있게 제한했다. 이 유물이 고려시대의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조선시대의 기록에 비추어 190cm가 넘는 큰 키와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 기법으로 보아 왕족의 능에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 천신일 이사장에게 듣는 석조 유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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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