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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유물과 성북동 정원의 만남 우리 옛돌 박물관
우리 선조는 도심의 강가를 조망하는 언덕을 명당이라 여겼고, 유럽과 북미 도시의 산 중턱에는 유명 기업가와 셀러브리티가 사는 고급 저택 단지가 있다. 서울에서는 북악산 자락의 성북동이 그런 곳. 천신일 우리옛돌문화재단 이사장은 자신의 성북동 사유지 5천5백여 평에 건평 1천 평의 건물을 신축해 우리옛돌박물관을 만들었다. 그가 석조 유물의 예술성을 아름다운 자연에서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소풍으로 모든 시민을 초대했다.

성북동 우리옛돌박물관으로 소풍 가는 길. 역사적 가치가 높은 석조 유물을 감상하는 곳이지만, 고급 주택가의 멋진 저택을 구경하며 도심이라고 믿기 어려운 북악산 푸른 숲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니 소풍 가듯 설레는 마음으로 박물관에 도착한다. 석조 유물인 기우제단이 놓인 박물관 정원에서 저 멀리 잠실의 빌딩까지 서울의 풍광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니,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소망하면 맑은 하늘도 비를 내려줄 것만 같다. 이처럼 우리의 옛 석조 유물은 선조의 삶 속에서 자연과 사람을 잇는 소통과 염원의 매개가 되었다.

우리옛돌박물관은 5천여 평의 성북동 숲을 거닐며 진귀한 석조 유물을 감상할 수 있는 도심 속 거대한 문화 정원이다.

청년 사업가와 석조 유물의 인연

천신일 우리옛돌문화재단 이사장과 석물의 만남에는 1979년의 우연으로 시작해 석조 유물에 대한 부부의 애정과 사회적 사명감까지 더해진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43년 부산에서 태어난 천신일 이사장은 대학 졸업 후 1974년 ㈜제철화학을 설립해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는 우리나라 경제의 태동기로, 해외에서 많은 바이어가 찾아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외국인이 좋아하는 가장 융숭한 대접은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청년 사업가이던 천신일 이사장은 바이어를 맞이할 공간을 단장하려고 인사동의 골동품점을 종종 찾았다. 그러는 사이 자연스레 고서화와 백자에 관심이 생겼고, 골동품점을 돌아보며 옛 물건을 구경하는 것이 청년의 즐거움이 되었다.

1979년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인사동의 골동품점을 찾은 그는 가게 주인이 우리나라 석조 유물 사진이 들어 있는 앨범을 펼쳐놓고 일본인과 값을 흥정하는 모습을 보았다. 흥분한 그가 전통 유물을 일본인에게 팔아넘기지 말라며 가게 주인의 멱살을 잡자, 그 주인이 하는 말이 충격이었다.

“ ‘물건을 파는 사람은 그저 값을 더 많이 주는 사람에게 파는 것이 이치’라고 하니 할 말이 없더군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럼 그 일본인 대신 내가 다 사겠다’고 말해버렸지요. 모두 27점이었는데, 당시 돈으로 1억 7천5백만 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가격을 들으니 놀라서 손이 떨렸습니다. 깎아달라고 사정 사정해 1억 5천만 원에 샀지요.”

그의 부인은 잘했다고 남편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부창부수의 집 마당에 전에 없던 석물이 놓였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니 시간과 날씨가 변화할 때마다 석물이 표현하는 느낌이 달랐다. ㈜세중여행과 나모인터랙티브 합병으로 사업이 나날이 번창할수록 석조 유물에 대한 그의 사랑도 더 깊어졌다.

“1997년 11월, 우연히 신문에서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우리 옛돌 조각의 힘> 이라는 전통 석조 유물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기사를 보고 전시장을 찾아갔어요. 젊은 세대에게 우리 문화를 알려줘야 한다는 좋은 취지로 이화여대와 개인소장품을 모아 전시를 열었는데,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즉시 김홍남 이화여대 박물관 관장에게 면담을 요청해 10여 년간 석조 유물을 모아왔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당장 보러 가자고 하더군요. 우리 집에 와서 석조 유물을 본 김홍남 관장은 이화여대에서 모든 학문적 도움을 제공할 테니 박물관을 만들라고 강력히 권유했습니다. 처음부터 사욕으로 모은 것이 아니었고, 많은 시민이 우리 석조 유물에 관심을 가지고 가치를 깨닫는다면 석조 유물이 해외로 밀반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2000년, 그간 모은 석조 유물을 분류하고 전시해 경기도 용인에 ‘세중옛돌박물관’을 개관했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변하는 석조 유물의 아름다움과 특성을 가장 잘 아는 천신일 이사장 부부, 그리고 김홍남 이화여대 박물관장과 나 선화(현 문화재청장) 이화여대 박물관 학예연구관이 힘을 합쳐 박물관 지도를 그린 스티로폼 위에 유물 모형을 일일이 배치해보길 수차례 반복하는 정성을 들여 완성한 전시 공간이다.


1 동자관 전경. 동자석 중에는 노인 얼굴도 보이는데, 이는 17세기 이후 동자석과 문인석이 혼합되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2 염화미소, 즉 ‘꽃을 들고 미소를 띤다’라는 의미의 이 불상은 폐건하는 한 사찰의 석조 유물을 옮겨와 보전했다. 3, 4 곳곳에 진귀한 석조 유물이 놓인 숲은 시민의 문화 감상과 휴식을 위한 도심 속 거대한 정원이다. 
5 민불. 민간에서 제작한 불상으로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6 40여 년간 모은 석조 유물을 시민과 함께 나누고, 석조 유물 환수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천신일 우리옛돌문화재단 이사장. 
일본에서 되찾아온 우리 석조 유물
학자들에게 세중옛돌박물관의 방대한 컬렉션은 유물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김홍남 이화여대 박물관장, 김정옥 문예진흥원장, 김병종 서울미대 교수, 이태호(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전남대 박물관장, 김의광 목인박물관장, 장남원(현 이화여대 박물관장) 이화여대 박물관 학예연구관 등 20여 명이 뜻을 모아 ‘돌사랑모임’을 만들 었고, 천신일 이사장과 함께 전국의 석조 유물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인 탐구를 시작했다. 천신일 이사장은 박물관 학예사와 함께 해외로 출장을 갈 때마다 수소문해 우리 석조 유물의 해외 밀반출 현황 자료를 만들었다.

“우리 옛돌 조각에는 수복강녕, 길상에 대한 염원은 물론, 무병장수, 다산, 창조와 번영 등 마을과 개인이 소망하는 여러 메시지가 담겨 있어요. 예를 들어 문인석ㆍ장군석ㆍ석수ㆍ향로석ㆍ장명등 등은 능묘를 수호하는 조각물로, 능묘 주인의 지위와 염원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예술 조각품입니다. 반면, 전문가 대신 마을의 솜씨 좋은 주민이 만든 벅수는 그 마을 사람들의 소망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지요. 이처럼 석조 유물은 예술적으로도 사회 문화 연구에도 중요한데, 그간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 해외로 많이 반출되었습니다. 우리 박물관의 목표 중 하나는 해외에 흩어진 석조 유물을 다시 환수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천신일 이사장은 그간 모은 석조 유물 중에서도 지난 2001년 일본에서 환수한 문인석, 장군석, 동자석 등을 모아놓은 ‘환수 유물관’의 문인석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관람객 이 박물관 로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환수 유물관부터 관람하도록 동선을 배치한 것도 이 때문이다.

환수 유물관의 전시물은 그가 2000년 나고야 미에 현에 사는 구사카 마모루라는 수집가가 한국의 석조 유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오랜 시간 온갖 설득과 우여곡 절 끝에 되찾아온 유물이다.

구사카 씨는 천신일 이사장에게 당시 거래 가격의 여섯 배가 넘는 터무니없는 비용 지불을 요구했다. 돌려줄 의향이 없다는 뜻이었다. 천신일 이사장은 여러 번의 설득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던 구사카 씨를 한국으로 초대했다. 세중옛돌박물관을 보여주며 석조 유물이 우리나라 국민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화재인지를 환기시켜주고 싶어서였다. 지병이 있던 그를 위해 서울의 유명한 한의원으로 안내해 진맥을 받게 하고 한약을 지어주는 정성을 들였다. 또 김치를 좋아한다는 그를 위해 천신일 이사장의 부인이 직접 담근 김치를 일본으로 보내기도 여러 번 했다. 이처럼 부부가 구사카 씨를 설득하고 감동시키는 갖은 노력 끝에 6개월 만에 그가 보유한 70점의 석조 유물 중 16점은 값을 치르고 매입 했고, 54점은 기증을 받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 성과를 기 념하는 행사를 일본과 국내에서 열었다. 당시 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 관장과 이수성 (사)한국민속박물관 회장, 김종규 (사)박물관협회장은 물론 국내 문화부 기자들이 참가했으며, 일본 NHK 방송에 생중계되기도 했다.

“석조 유물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지고 오는 것도 아주 어려웠습니다. 기중기까지 동원해 한 점씩 나무 상자를 만들어 컨테이너에 넣어야 했지요. 석조 유물은 특히 목 부분이 취약해요. 석물의 목이 부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목 부분에 스펀지를 대고 이중, 삼중으로 감싼 다음 다시 전체를 안전하게 포장해 나무 상자에 넣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문화재 환수 작업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는 문화재 보전에 대한 개인과 정부의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 어렵게 환수하는 것보다 유출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정부에 1백 년 이상 된 석조 유물 반출 금지법을 제안했다. 또한 용인보다 접근성이 좋은 서울 시내에 석조 유물 박물관을 건립하기로 다짐했다. 국민이 석조 유물을 가까이에서 자주 보고 감상해야 문화재 보전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성북동에 보유하고 있던 사유지 5천5백 평에 누구나 방문해 관람하고 휴식할 수 있는 ‘우리옛돌박물관’을 지었고,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석조 유물을 선별해 용인에서 성북동으로 옮겨왔다.

또 이화여대 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에도 석조 유물 여러 점을 기증해 국민이 우수한 석조 유물을 보다 자주 접할 기회를 제공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자연사박물관 한국 갤러리와 일본 와세다 대학교 등에 석조 유물을 영구 대여해 해외에 우리나라 석조유물을 알리려는 노력도 이어가고 있다.


성북동의 아름다운 석조 유물 박물관 
북악산 자락에 들어선 우리옛돌박물관에는 고급 저택이 많은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도록 지은 3층 건물에 다섯개 전시실을 마련했다. 환수 유물관에는 일본인 수집가에게 환수한 70점의 석조 유물 중 문인석 47점이 도열해 있다. 손에 홀을 든 공복公服 차림의 문인석은 신라시대에 능묘 제도가 정비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 능묘 제도의 변천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적 자료다. 

환수 유물관의 입구에는 왕릉을 수호하는 신령한 소나무를 피사체로 삼은 배병우 사진가의 소나무 사진 작품이 문인석과 함께 관람객을 맞이한다. 칠레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 영국 스톤헨지 석상처럼 한국에도 독특한 돌 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보다 깊이 인식시키기 위해 실내에 거대한 문인 석상을 한데 모아 웅장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원래 문인석은 짝을 이루어 능묘를 지킨다. 하지만 일본으로 반출될 당시 짝이 있었을 문인석이 대부분 짝을 잃은 채 한국으로 돌아와 문화재 보전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도교에서는 신선 곁에서 시중을 들고, 불교에서는 부처나 보살을 모시며, 유교에서는 무덤 주인의 심부름을 하는 아이인 동자의 석상을 모은 ‘동자관’은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 가운데 자리한다. 전시된 산수화는 우리나라 산수화를 대표하는 4대 작가인 심산 노수현과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의재 허백련의 작품이다. 

‘벅수관’에서는 옛 서민의 익살과 재치를 느낄 수 있다. 벅수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장승을 이르던 단어로, 마을 입구나 길가에 사람의 얼굴을 본뜬 벅수를 세우면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이나 잡귀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벅수는 전문 석공이 아닌 마을에서 솜씨 좋은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만들었기 때문에 서민의 창의성이 더해져 조형적으로도 미적으로도 더욱 다채로운 형태를 보인다. 선조들의 삶과 생활에 담긴 익살과 해학을 느낄 수 있다. 


1 부인 전경자 여사가 수집한 관동지방의 자수 보자기. 2 부인의 수집품을 전시한 자수관 전경. 부부가 서로의 취향과 취미를 존중하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고, 부인은 남편의 요청에 자신의 수집품 중 가장 아끼는 것을 자수관에 내어주었다. 3 우리 선조가 전통 혼례에 사용하던 기러기와 기러기 보자기. 
4 김환기의 ‘무제’는 작가의 작품이 순수한 추상으로 변화되던 때의 실험적 변화를 보여주는 1960년대 작품으로, 천신일 이사장이 아끼는 소장품이다. 5 (주)제철화학의 성공에 대한 감사로 포항공대에 학교 부지를 기증하기도 한 천신일 이사장이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의 딸인 박유아 화가에게 특별히 요청해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야생화 만발한 정원의 유물 산책
1층부터 4층 옥외 공간까지 이어지는 멋스러운 경사 공간인 ‘무병장수의 길’은 천천히 걸으면서 길 양쪽의 독특한 석조 유물을 감상하게 설계했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물고기, 길상의 대표 동물인 양과 거북, 연꽃 등을 전시해 유모차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관람객도 산책을 겸해서 편안하게 유물을 감상할 수 있다.

석조 유물 외에도 우리나라 옛 여인들의 미감과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자수와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대표하는 회화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우리옛돌박물관의 큰 매력이다. 풍미 깊은 커피와 차를 즐길 수 있는 카페를 겸한 ‘자수관’은 천신일 이사장의 부인인 전경자 여사가 오랫동안 모은 규방 문화의 자수 작품과 장신구를 선보인다. 수복강녕을 기원하며 수놓은 아름답고 섬세한 자수 작품이 주를 이루고, 특히 쉽게 볼 수 없는 강원도 자수 보자기 컬렉션이 눈길을 끈다.

3층 ‘기획 전시관’은 개관 기념 특별전으로 천신일 이사장의 소장품 중 김환기 작가의 구아슈 작품 모음부터 김종학, 김창열, 권옥연, 남관, 류병채, 변종하, 유영국, 이대원, 이우환의 작품을 전시했다. 이곳만 둘러보아도 한국 근현대  미술의 부흥기 작품을 총망라해 감상할 수 있다. 5천 평이 넘는 숲 속 정원은 그 옛날 자연 곳곳에 놓여 있던 석조 유물 본연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평소 조경에 관심이 많은 천신일 이사장이 우리나라 야생화 1만 2천여 점을 배치해 정원이 곧 한 점의 산수화가 되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오감 만족’ ‘제주도 푸른 밤’ ‘염화 미소’ ‘승승장구의 길’ 등 석조 유물의 종류와 용도에 따라 스토리텔링이 깃든 길이 이어져 아이도 어른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자녀를 동반한 관람객은 전망이 아름다운 정원 어디에서든 편안히 휴식할 수 있도록 박물관에서 돗자리를 무료로 대여해준다. 실내는 물론 야외 전시관의 모든 길은 유모차나 휠체어가 다닐 수 있게 조성했다.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초등학생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 수호신 벅수 만들기, 족자 만들기, 러닝스톤Running, Learning Stone 등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는 성인 관람객은 물론, 온 가족이 참여해 석조 유물을 이해하고 서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문화 체험 이벤트도 진행한다.

또 더욱 다양한 시민이 석조 유물을 감상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경관과 조망이 빼어난 5천여 평 정원의 일부는 결혼식이나 뜻깊은 행사에 대여하고, 박물관 전경을 가장 멋스러운 풍광으로 렌즈에 담는 아마추어 혹은 프로 사진작가에게 해외여행권을 시상하는 사진 공모전 도 개최한다. 이처럼 시민이 우리 옛돌을 가까이에서 친숙하게 느끼는 기회를 제공해 오랜 세월에도 견고함과 내구성, 활용성과 예술성을 잃지 않은 석조 유물이 미래 세대에도 변치 않는 모습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옛돌문화재단이 품은 견고한 소망이다.


★ <행복> 독자를 초대합니다.
일시 6월 30일(목) 오후 2시
인원 10명 장소 우리옛돌박물관 참가비 1만 원
신청 방법 <행복> 홈페이지 ‘오픈 하우스’ 코너에 참가하고 싶은 이유를 적어 신청해주세요.


취재협조 우리옛돌박물관 

#옛돌 박물관 #석조유물 #천신일 이사장
글 김민정 | 사진 이경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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