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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교장 날개, 우리도 멋지게 날 수 있나요?
안상수체를 디자인해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새 지평을 연 시각 디자이너 안상수, 그가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의 교장을 뜻하는 ‘날개’가 되었다. 어디로든 자유롭게 날도록 도와줄 날개, 그가 짓는 학교에는 새로운 세상을 애짓고 멋지으려는 거장의 바람이 담겨 있다.

안집의 통로에서. 배경의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홀려라 홀리리로다’라는 문장이다.
초고속 열차의 특실에 탄 남자가 있었다. 곧 도착 할 종착역엔 대양 같은 안락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쏜살같이 달리는 기차가 목적지를 눈앞에 둔 2012년, 여태 앉아 창밖 세상을 관조하던 이 남자가 자신의 짐을 챙겨 앞으로 나섰다. 특실의 다른 승객들은 지척에 있는 목적지에 명성이 기다린다며 그를 만류했다. 나란히 앉아 있던 동료는 여기에서 내리면 먼 길을 돌아와야 하는데, 그런 인생이 만족스러울 수 있겠느냐며 그의 마음을 붙들었다. 

하지만 종착역에 다다르기 전에 내려야 한다고 10여 년 동안 마음을 다잡았던 그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도록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고, 아쉽고 두려운 마음의 깃을 당겨 결국 낯선 플랫폼에 내려섰다. 60세, 안정된 인생이 보장된 한국 최고 미술대학 교수직의 정년을 불과 2년 앞둔 때 초고속 열차에서 내린 그의 이름은 안상수. 세종대왕이 원리를 창제한 한글에 ‘안상수체’라는 새로운 시각적 유형을 덧입혀 세계적 명성을 누려온 시각 디자이너다.


60세, 특실에서 내린 교수
“제 나이가 쉰이 되던 2002년에 중국에서 연구년을 보냈습니다. 모처럼 삶의 휴지기를 보내면서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중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공적 가치도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런 시간을 보내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엔 그간 꼭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생명평화순례를 하며 5년동안 전국을 걷고 있던 도법 스님도 그중 한 명이었죠. 그분이 경남 김해를 지날 때쯤 8월의 무더위에 김해로 찾아가 평야와 마을을 함께 걸었습니다. 앞사람과 멀찌감치 떨어져 침묵하며 그 시간이 내 삶에 새로운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회 제도권의 상층부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그의 주변에는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온 총명한 학생과 국내외 문화 예술계의 화려한 명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침묵하며 전국 곳곳을 걸어보니 “이런 다양한 사람들의 기반 위에 세상이 서 있는 것이었지!”라는 깨달음을 다시금 얻게 되었다.

“거기에서부터 생각의 씨가 자랐던 것 같습니다. 디자인 교육이란 게 창의 교육인데 틀에 박힌 제도권 교육에는 분명 빈 곳이 있었지요. 작고 단순하고 동아시아적 가치를 지니고 지구적 생각을 하는 디자인 학교, 일방적 가르침보다는 스승과 배우미가 대화를 하는 네트워크로 교육을 하는 학교를 디자인해보고 싶었어요. 마음에 두고 살았던 걸 결행하기에 60세란 나이도 늦지 않아요. 재작년에 상파울루에서 열린 AGI 강연에서 내 나이 60세에 ‘학교를 디자인’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소개 해 박수를 받았어요. 이제는 꼬마 자동차라도 내가 판단해서 직접 자동차를 모는 사람이 되었죠.”

그가 탑승한 꼬마 자동차는 ‘파티PaTI’라는 줄임말로 부르는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다. 경기도 문화 협동조합의 1호인 디자인 학교로, 시각 디자이너 안상수와 뜻을 같이하는 여러 스승이 출자해 조합을 만들고, 총회를 열어 함께 디자인해가는 교육 협동 조합이다. 파티에는 4년제 학부 과정인 ‘한배곳’과 대학원 과정인 2년제 ‘더배곳’이라는 심화 과정이 있지만, 디자인 대학을 상징하는 멋들어진 건축물의 학교 본부는 따로 없다. 파티가 생각하는 학교란 ‘3 무無’와 ‘3ㅅ’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3무無’와 ‘3ㅅ’의 디자인 학교
우선 3무無란 무재산, 무경쟁, 무권위를 뜻한다. 1년에 겨우 20명의 신입생이 들어오는 협동조합 배곳이니 학생 수업료로는 학교 건물과 재산을 늘릴 방도가 없다. “큰 대학은 과밀할 정도로 건물을 많이 짓습니다. 저도 사옥을 지어봤는데 정말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이처럼 학교가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 하드웨어에 집중하면, 그 분야 능력자가 학교를 이끌게 돼요. 그러면 교육이라는 본령에 배분하는 에너지가 확실히 줄어들지요. 학교가 재산이라는 중요한 고리에 대해 신경을 덜 쓰게 되면 그 에너지를 결국 두 가지 과제에 배분하게 됩니다. 교육 내용을 충실하게 하는 것과 좋은 사람을 들이는 것이지요. 어떤 좋은 스승과 배우미가 만나 우리 교육을 어떤 방식으로 일구어갈 것인가가 학교의 핵심 관심사가 되는 것이죠. 교회가 기독교가 아니듯 학교 건물이 교육은 아닙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 스승과 배우미, 그 사이를 메우는 교육 내용이 학교의 본령이지요. 만약 학교 건물이 없으면 다른 시설을 공유하면 됩니다. 이 곳 파주출판도시는 그런 협력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에요.”

파티의 배우미들은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를 큰집으로, 안그라픽스 사옥을 안집으로, 두성종이 빌딩을 두성집으로, ‘동네부엌 천천히’ 협동조합을 식당으로, 열화당의 책 박물관을 도서관으로, 활판공방을 작업실로 이용한다. 1백50 여 개 출판사와 문화 시설이 들어선 파주출판도시 전체의 살아 있는 문화 공간이 강의실이니 캠퍼스 규모와 면면이 여느 미술대학 못지않게 훌륭하다.

이처럼 겉멋을 부리지 않고 주변의 네트워크 시설을 이용하는 것은 안상수 교수가 꿈꿔온 네트워크 학교 디자인의 시작점이다. 가장 먼저 문을 연 파티를 시작으로 명필름 영화학교가 생겼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문화인들이 동참해 승효상 건축학교 둥숭학당, 네이버 넥스트, 아름지기 온지음, 임동창 풍류학교,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 힐스 등의 학교와 어깨동무를 하며 가고 있다.

파티의 큰집으로 사용하는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앞에서. 특유의 점프슈트 차림에 언제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유쾌한 날개는 한쪽 눈을 가린 사람을 찍는 빛박이(사진) 프로젝트를 오랫동안 이어오고 있다.
재산이 없는 학교에 들어오려는 신입생 20명은 무경쟁 원칙에 따라 해마다 이틀 간의 즐거운 워크숍을 통해 입학 사정을 한다. 올해는 지망생들이 팀을 나누고 머리를 맞대 특이하고 재미있는 놀이를 고안했고, 각 팀과 스승들이 돌아가며 모든 게임을 직접 해보았다. 외부에서 초청한 놀이 전문가, 스승, 재학생이 입학 사정관으로 게임에 참여해 놀이하고 차담(차를 나누며 하는 깊은 대화)한 후에 다 같이 의논해 최종 합격자를 선발했다. 불합격한 학생도 특별한 문화 경험과 즐거운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입학 사정 프로그램이다.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안상수 교수를 ‘날개’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것은 무권위의 원칙을 상징한다. 날개는 안상수 교수가 ‘교장은 그저 배우미들이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스승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스스로 만든 이름이다. 날개를 비롯해 국내외 유명 문화계 인사가 모인 파티의 스승은 배우미가 미래의 길을 찾아가는 데 동행하는 길동무 스승이다. 이곳에는 월요일 오전 10시에 디자인 개론, 수요일 오후 3시에 색채학 수업 등의 방식으로 시간표를 짜는 기존 대학의 모듈 학제가 없다. 대신 파티는 한 스승이 여러 주를 연이어 맡아 워크숍 방식으로 수업하는 블록 시스템을 운영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특히 외국에서 큰 스승이 찾아오기에 좋다. 스위스 바젤디자인학교, 베이징 중앙미술 학원, 런던 왕립예술학교, 독일 데사우 바우하우스 재단, 베이징 뤼징런 페이퍼 로그, 도쿄 타입숍-G 등과 해외 네트워크를 맺어 이곳의 유명 교수와 명사가 파티를 찾아와 긴 시간 동안 배우미와 함께하며 자신의 지식과 지혜로 길을 이끌어 준다. 헬무트 슈미트 교수에게 영문 타이포그래피를, 모리츠 츠빔퍼 교수에게 빛깔과 이미지를, 마이클 레너 교수에게 픽토그래픽 이미지를, 니이지마 미노루 디자이너에게 글꼴과 빛깔을 배우는 등 세계적 석학 그룹이 파티의 워크숍을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외로 네트워크 교육이 뿌리를 확장하면서 스위스 바젤디자인학교와 학위 교환 과정이 생겼 다. 파티는 한국에서는 대안 학교지만 파티 한배곳 4년과 바젤 학부 과정 1년을 마치면 바젤디자인학교 학사 학위를, 파티 더배곳 2년과 바젤 석사 과정 1년을 마치면 바젤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 올 여름이면 파티의 배우미가 처음으로 바젤디자인학교의 학위를 받게 된다. 얼마 전에는 프랑스 장식미술 학교에서도 학위 교류 제안을 받았다. 파티의 ‘3무 無’ 철학 덕분에 교육을 디자인하는 프로젝트에 생각지 못한 멋과 새로운 길이 더해지고 있다.


50세, 겨우 어머니의 말로 알게 된 디자인
이처럼 해외 유수의 미술 학교가 신생 디자인 학교인 파티에 큰 관심과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동아시아의 역사와 지혜, 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디자인 문화를 애짓는다는 파티의 독특한 디자인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파티가 디자인 교육에서 3무無와 함께 중요시 여기는 ‘3ㅅ’이란 사람(홍익인간), 손 (생각하는 손), 세종(한글 얼)을 뜻한다. 이러한 교육 철학은 국내 최고의 시각 디자이너지만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지천명인 50세가 되어서야 겨우 어머니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었던 날개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했다.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는 그가 디자인을 한글로 바라보며 깨우친 ‘멋지음을 함께 익히는 배곳(학교)’이다. “옛날에 화두話頭라는 말을 알게 되었어요. 사찰에서 스님이 내가 어디서 왔는가를 늘 돌아보며 생각에 집중하는 것이 화두인데, 나는 살면서 어떤 사고思考에 집중할까를 생각해보았어요. 제가 디자인이라는 말을 오랫동안 사용해왔는데 디자인이라는 게 무엇인가요? 남의 나라 것을 공부해서 알고 외워서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그게 진정 내 힘으로 한 건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 생각을 물고 살기로 했습니다. 10년쯤 지나니 어느 날 디자인이라는 말이 멋이라는 말로 제 세포 속으로 쑥 들어왔어요. ‘짓다’라는 한글도 주목하게 되었고, 그 말을 늘 되씹다 보니 디자인이 비로소 ‘멋지음’이라는 어머니의 말로 바뀌어 제게 들어왔습니다. 쉰이 넘어서야 비로소 그렇게 되었지요.”

가장 먼저 그에게 찾아온 ‘멋’이라는 말은 그가 이전에도 수없이 사용하던 단어였다. 심지어 <멋>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멋이라는 글을 쓰고 제호 디자인을 하며 필사적으로 그 단어를 사용하던 시절에는 그냥 지나쳐버린 말이 어느 날 디자인 대신 멋이라는 말로 그의 내면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참 후에 ‘짓다’라는 말도 찾아왔다. “결국 멋을 짓는 것이 디자인이었죠. 명사가 아니라 동사고 짓는 건 그냥 만드는 게 아니라 정성이 들어가는 겁니다. 어머니가 밥을 지을 때는 사랑스러운 아들, 딸, 부군을 위해 마음과 정성, 손맛을 담아 짓지요. 가족의 체질과 생활 방식에 최적화된 밥을 짓는 건 오직 어머니 한 사람뿐입니다. 옷도 그렇고 의식주가 다 짓는 것이지요. 이 말은 숨결새별이라는 한글 화가와 대화를 하면서 감명을 받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한글로 사는 분이고, 그분 자체가 한글인데 ‘한글로 보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말을 하셨죠. 한돌이라는 친구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수색이라는 동네가 우리말로는 물빛입니다. ‘수색에서 만나 점심 먹자’라는 말을 한글로 표현하면 ‘물빛에서 만나서 낮밥하자’로 바뀝니다. 느낌이 다르지 않은가요? 이처럼 디자인을 ‘짓는다’라는 말로 보니 비로소 세상이 달라 보였지요.”


최범 스승이 ‘파티는 동물원 밖 동물을 기르는 곳. 바로 야생동물을 길러내는 배곳’ 이라 얘기했습니다. 끝나고 한 배우미가 와서 물었어요. “야성이 뭔가요?” 잠깐 생각하다 야성을 참을성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야성을 가진 동물은 참을성이 끈질깁니다. 몇 날 며칠 배고픔을 참고 추위를 참고 먹이를 찾아 나섭니다. 날카로운 발톱은 숨기고 사냥감을 기다리지요. 제 힘 기르는 어려움도 참아내고 외로움도 무서움도 참고 참아냅니다. 그 참아내었던 힘이 몸 뼈 살 속에 쌓이고 쌓여 그것이 넘쳐 나는 날… 그 야성은 비로소 빛납니다. 야성은 참을성입니다. _ 2015. 11. 15 파티생각. 51


책상을 만들고 여행을 하며 멋짓는 배우미
멋짓기를 하려면 우선 한글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멋짓는 손이 곧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도록 ‘생각하는 손’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파티에 입학한 배우미는 가장 먼저 ‘내 공간 멋짓기’라는 작업 공간 워크숍을 통해 자신이 4년 동안 사용할 책상을 직접 만드는 것부터 배움의 과정을 시작한다. 재개발 지역에서 버린 가구를 수거해온 후 서울시의 문래동 작업 시설을 한 달가량 빌려서 각자 원하는 재료를 골라 4년 동안 사용할 자기만의 책상을 직접 짓는 워크숍이다. 4년의 배움 과정 동안 파티의 배우미들은 물감도 스스로 만들어 쓴다. 학생 식당인 ‘동네부엌 천천히’에서는 슬로푸드로 식사를 한 후 자신의 그릇을 직접 닦아야 한다. 이처럼 생각을 짓기 전에 몸부터 움직여 배우미가 스스로 자신의 멋짓는 길을 찾도록 돕는 것이 파티 교육 체계의 방향이다.

기존 미술대학과 달리 모든 공부를 몸으로부터 시작한다는 특이한 교육 체계는 교양 수업에 해당하는 파티 인문 수업의 첫 과목이 한의사에게 배우는 ‘동의학’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인문 수업은 동의학, 시, 철학, 중용, 동양 미학, 동아시아 사상, 우주론, 곤충학, 경제학, 독서와 글쓰기 등의 과목을 개설합니다. 돌이켜보면 무슨 일을 하건 사람은 몸의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그래서 파티에서는 대학 영어, 대학 국어 같은 것을 배우는 대신 우리 몸에 대해 다 같이 공부합니다. 우리 사회가 머리 위주의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몸을 많이 억압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다시 고민해서 인문 프로그램을 파티 방식으로 구성했습니다.”

배우미들의 시쳇말로 여행을 ‘빡세게’ 하는 것도 중요한 교육 방향이다. 1학년에는 4월이면 지리산에 가서 2주를 머문다. 여행은 아름다운 풍광을 보는 것도 좋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고 오랫동안 걷기도 한다. 수시로 전국을 여행하고 외국에도 간다. 작년에는 스승과 배우미들이 배낭을 메고 중국으로 가서 암각화를 찾아다니는 특별한 여행을 했다. “굉장히 짜릿한 여행이었어요. 하루 종일 사막을 가로질러서 바위에 쓰인 글 하나를 찾았죠. 4만 년 전에 새긴 글이 마치 어제 새긴 것같이 생생했어요. 모두 큰 감동을 받았지요.” 이런 여행은 배우미들에게 뜻하지 않은 생각과 길이 되어준다. “얼마 전 지방 여행에서 배우미 몇 명이 천연 소금을 만드는 장인을 만났나 봐요. 장인이 정성 들여 만든 귀한 소금이 널리 알려지지 못해 형편이 어려워진 사정을 알고 도움을 요청하기에 학교에서 배우미들에게 조건 없이 자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 돈으로 소금을 산 배우미들은 ‘탐방상사’라는 상호를 짓더니 그 소금에 대한 글을 쓰고 포장을 멋 지음 해서 SNS로 판매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스승들도 자신의 SNS에 공유하며 탐방상사의 활동을 격려했지요. 그런데 장사가 무척 잘돼요. 학교에서 빌린 돈을 벌써 다 갚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탐방상사의 배우미들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멋짓게 되었어요. 훗날이 아주 기대됩니다.”

다른 미술대학과 달리 미술 입시 학원을 다녀본 학생이 거의 없는 파티의 배우미들은 이처럼 몸을 사용하고 여행을 하고 국내외 훌륭한 스승과 오랜 시간 워크숍을 하면서 대부분 자신의 멋짓는 길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각 배우미에게 깃든 인생 이야기도 다양하다. 오토바이 수리를 하다가 여자 친구를 따라 파티의 입학 워크숍에 왔던 한 배우미의 예가 대표적이다. 낯선 환경 때문인지 합격을 하고도 6개월 만에 학교를 떠난 그 배우미는 몇 개월 만에 다시 돌아 오더니 혼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오토바이가 있어 기동력을 갖춘 그에게 스승들은 파주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보라고 권유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파주를 누비던 그는 몇 개월이 지나니 자신의 시선을 덧입힌 사진을 찍기 시작해 스승들을 놀라게 했다. 협동조합의 일원인 파주신문에 칼럼을 실을 수 있게 연결해주었더니 사진과 더불어 글도 쓰기 시작했는데, 자신도 스승도 몰랐던 그의 빛박이(사진)와 글쓰기 감각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다.

배우미가 폐품을 이용해 자신을 위해 만든 책상을 놓은 파티의 교실. 날개의 한글 서체와 배우미의 책상이 어우러져 그들만의 자유로운 창작 공간이 되었다.
지금 파티 한배곳 3학년엔 배우미가 열네 명 있습니다. 파티는 3학년 봄 학기부터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수업을 열고 임정희, 김건태 두 스승이 이끌고 있습니다. “모두 자기가 살아갈 직업을 제 스스로 만들라. 제 삶을 멋지어보라. 편집 디자이너, 영상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그런 직능 직업 말고 제 자신이 멋짓는 스스로의 직업, 그것이 졸전 주제다”라고 김건태 스승이 말했습니다. 열네 개의 민들레 홀씨,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그 홀씨들 퍼져 어느 흙 속에 뿌리내리고 다시 민들레꽃을 피우는 상상. _ 2015. 12. 2 파티생각. 52


껍데기만 지은 파티 새 집
“학생은 스승과 같이 학교를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배우미가 더 앞서갈 때도 많아요. 배우미가 원하면 교무 회의에 참석할 수도 있고, 배우미가 좋은 의견을 제안하면 그 자리에서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학교의 모든 공식 교신은 페이스북이나 구글독스로 하기 때문에 누구나 학교 소식과 사정을 알 수 있지요. 저는 교육학자가 아닙니다. 대신 ‘교육은 당신이 이 세상을 바꾸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다’ 라는 넬슨 만델라의 말을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고 있었어요. 디자인 교육은 그 자체가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는 그 자체가 디자인 프로젝트예요. 제가 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과 같이 합니다. 그래야 멋짓는 힘이 생기니까요.”

날개는 새해가 되자 날개집의 벽 한쪽에 ‘도리불언桃李不言’이라는 글씨를 크게 써서 걸었다. ‘도리불언 하자성혜下自成蹊’를 뜻하는 말로 복숭아나무와 자두 나무는 요란한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아래에 사람이 모여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파티에는 얼마 전 파주출판도시 끝자락에 생각지 못한 새 집을 지을 기회가 찾아왔다. 날개와 건축가 김인철이 머리를 맞대어 고심한 끝에 껍데기만 있는 빈 집을 지었다. 한 칸에 한 명씩 배우미가 새로운 건축가와 팀을 이루어 자신이 쓸 공간을 직접 지을 계획으로, 지금 가보면 쓸쓸한 건물이지만 올봄이면 건물 속에 새 공간과 새 길이 열리게 된다. 외형은 화려하지 않지만 덕분에 사람이 모여 저절로 공간이 열리고 길이 생기는 새 집,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 같은 파티만의 새로운 이상향이 그곳이다.

“요즘은 세상이 크게 바뀌는 변곡점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1970~1980년대에는 사회가 급성장하는 시대를 정신없이 살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이 많이 바뀌었는데, 웬일인지 사회 체제만 관성처럼 기존 방식에 머물러 있어요. 그래서 기존 사회 체제에 속한 사람은 압박감을 굉장히 많이 느낍니다. 저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한 압박감을 심하게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지요. 그런데 이제는 그 느낌이 다른 기분으로 전이되었어요. 여태까지 해 온 일 중 가장 어려운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게 또 지금까지 느껴본 기분 중 가장 짜릿해요. 60대에 이런 짜릿함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복이지요.”

날개가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듣고 달리는 기차에서 내린 그때는 실제로 많은 사회학자와 과학자가 실증을 내세워 주장한 세상의 변곡점이었다. 뉴욕의 멋진 상점과 도쿄의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뉴스가 며칠 전에 포털 사이트 뉴스난의 윗줄을 장식했다. 그곳에는 종업원 대신 인공지능 기계가 손님을 맞고 있었다. 마트에서도 컴퓨터로 하는 셀프 계산 기계가 계산원을 대신한 지 오래고, 은행 창구에도 사람보다 정확히 돈을 세는 로봇 은행원이 등장했다. 이처럼 단순하고 반복적인 프로세스로 해결되는 일은 이제 고속 열차보다 빠른 속도로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게 된다. 멋지고 웅장한 건물을 세운 세계의 유명 대학도 몇 년 내로 사라진다는 기사가 얼마 전부터 나오고 있다. 국경과 물리적 공간이 무색해진 초연결 사회에서 캠퍼스 규모와 편의는 더이상 경쟁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미래 세상에서 더욱 중요해진 것이 바로 콘텐츠다. 사람의 생각과 시야를 가리던 화려한 물적 디자인의 의미가 걷힐수록 깊고 진지한 사유와 정교한 손놀림이 빛을 발할 것이라고 많은 사회학자와 과학자가 해마다 역설하고 있지 않은가!

재산, 경쟁, 권위라는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어머니의 언어에서 멋을 체득하고 몸을 움직여 스스로 사유해 멋을 짓는 사람의 주변에는 새 길이 나고 사람이 모여 들 것이다. 이런 것이 미래 세상이 원하는 디자인이 아닐까. 60세의 날개는 달리는 열차의 특실에서 내려서는 결행으로, 마침내 도리불언이라는 진짜 멋을 지닌 물빛 세상에 도착했다. 파티처럼 짜릿한 배움과 경험을 하는 그곳에서 작은 복숭아나무, 자두나무가 자란다. 그 나무의 날갯짓으로 동아시아적 멋의 파장이 세상에 퍼져나가 우리 삶에 이롭고 멋스러운 길이 열리는 것, 이것이 날개와 파티가 마음속 깊이 품은 교육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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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민정 | 사진 이경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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