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현 작가는 1970년생으로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순수 미술 석사 과정을 마쳤다. 창동 스튜디오와 베를린 퀸슬러 하우스 베타니엔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했다. 2011년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로 선정되었고, 2013년 <에르메스 미술상>전과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5> 전에 참여했다.
사진일까, 그림일까? 아니면 표본 그대로일까?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생김새의 식물들 앞에서 알쏭달쏭해진다. 그렇다면 어디서 왔을까? 뜻밖에도 한눈에 어여쁜 이 식물들의 고향은 난지도다. 지난해 여름 현대미술 작가 나현이 난지도의 노을공원과 하늘공원을 다니며 채집한 ‘귀화 식물’들이다. 지난해 12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열린 <식물채집-난지도: 바벨탑 프로젝트>전은 원래 우리나라에 살지 않는 귀화 식물 미국자리공, 개망초, 큰금궤화, 백묘국 등 60점을 전시한 것으로, 작가가 2012년부터 진행해온 ‘바벨탑 프로젝트’의 연장선 상에 있다. 바벨탑 프로젝트는 독일 베를린에 있는 ‘악마의 산’과 서울의 ‘난지도’를 역사 유적으로 추정해 객관적인 기록들과 발굴 작업으로 작가의 뜻을 입증해나가는 과정이다.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결과가 아닌 ‘과정’을 중시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 “베를린 서쪽 끝에는 ‘악마의 산’이라고 부르는 인공 산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전쟁 폐기물과 쓰레기를 매립한 곳이지요. 서울의 서쪽 끝에도 쓰레기 산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난지도고요.”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바벨탑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조금 더 높이, 더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한 인간의 오만함에 분노한 신은 그때만 해도 하나였던 언어를 여럿으로 분리하는 저주를 내렸고, 그때부터 인간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돼 불신과 오해 속에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졌다는 이야기다. 나현 작가는 베를린 악마의 산과 서울 난지도를 ‘바벨탑의 유적’이라 보고, <식물채집-난지도: 바벨탑 프로젝트>전을 통해 난지도에 새로 서식하게 된 귀화 식물종을 바벨탑 이후 새로 생겨난 언어의 또 다른 은유로 표현했다.
2015년 여름, 작가는 식물학자와 화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난지도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을 다니며 관찰했고, 인생에서 가장 멋진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하는 행운을 만났다. “눈에 잘 띄지 않게 숨어 있는데, 크기가 굉장히 컸어요. 보통 네 잎 클로버는 비례가 잘 맞지 않거나 어설픈 형태를 띠기 마련인데, 그건 정말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춘 네 잎 클로버였지요.”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이번 달 표지작 ‘클로버’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사진일까, 그림일까? 아니면 표본 그대로일까? 정답은 ‘모두 다’이다. 작가는 채집한 식물들을 공들여 건조하고, 압화하는 과정을 거쳐 사진으로 찍고 프린트했다. 그리고 그 위에 드로잉을 더했다. 채집과 사진과 드로잉 과정을 거치면서 작가가 이 귀화 식물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건 무엇일까? 그는 왜 굳이 힘들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60여 점이나 되는 작품을 완성했을까? “흔히 예술을 가리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하지만, 저는 예술이란 그저 재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무엇을 재현하느냐의 문제인 거지요. 귀화 식물을 찾아내 채집하고, 사진 찍고, 프린트한 종이 위에 드로잉을 더한 건 어디까지나 작가로서 저의 선택입니다.” 나현 작가는 재현이야말로 예술의 큰 기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숲에 살고 있지만, 잠시 숲을 떠나 안과 밖의 경계에서 객관적 시선으로 숲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인 것이다.
‘미국나팔꽃’,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위에 혼합재료, 108×77cm, 2015
그동안 역사나 민족을 배경으로 한 다소 심오한 주제로 <실종>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 등을 선보인 작가이기에 <식물채집-난지도: 바벨탑 프로젝트>전은 작가가 보여준 프로젝트 중에서 ‘파격적’이라 할 만하다. 일단 예쁘기 때문이다. “숨은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 누구에게나 친근한 아름다움인 ‘꽃’이라는 점에선 파격적이라 할 만하죠.” 그동안 미술계에서 나현 작가를 따라다닌 말은 ‘어렵다’ ‘불친절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중’ 혹은 ‘관객’이란 보이지 않는 실체라고 생각한다. “재작년에 거의 지구 반 바퀴를 돌며 작업했어요. 서울에서 ‘어렵다’고 받아들인 주제가 뉴욕이나 베를린에서는 아닐 수도 있죠. 힌두교를 믿는 인도 뉴델리 사람들은 ‘바벨탑’의 개념 자체를 모르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나의 관객이 되는 걸까요?”
나현 작가는 현대미술이 때로 불친절하고 난해하게 느껴지는 건 작가마다 다른 문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이 어떤 작가의 문법을 통째로 이해한다면, 그건 기적에 가깝다. 그 전에 ‘아, 이 작가는 이런 문법을 사용하는구나’라는 정도의 이해로도 충분하다. 나현 작가가 <식물채집-난지도: 바벨탑 프로젝트>전에 전시한 60점의 귀화 식물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세상에 흩뿌려진 수만 가지의 ‘다름’을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