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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문순우 내 요리 안에 음악이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몇 가지 방법. ‘좋은 영화’를 보면 일주일이 즐겁고, 음악회에서 ‘좋은 음악’을 들으면 한 달 동안 행복하다. 또 ‘좋은 그림’을 집안에 걸어놓으면 평생을 기분 좋게 살 수 있다. 아티스트 문순우 씨의 말대로라면, ‘좋은 요리’를 맛보는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란다. 좋은 요리 안에는 이 모든 예술의 코드가 전부 다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요리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예술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일 테다. 바로 이 남자 문순우 씨가 요리의 즐거움에 푹 빠져 살 수밖에 없는 이유다.

1 작업실 입구에 공들여 꾸민 아늑한 주방. 손 뻗치면 닿을 만한 사정거리 안에 그의 요리 애장품들이 가득하다. 방금 불에서 내린 프라이팬을 들고 온화한 미소를 짓는 이가 바로 문순우 씨다.
2 바비큐 그릴 위에서 스위트 칠리 소스를 바른 홍합과 킹크랩이 지글지글 맛있게 구워지고 있다. 그릴에 구운 해산물은 오늘 문순우 씨가 소개할 4가지 요리의 베이스.

“먹을 만해요? 내 음식은 처음엔 맛이 없어. 그런데 먹다 보면 조금 나아지고, 다 먹고 나면 뒤가 깔끔해요. 맛을 낼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 맛을 내는 방법은 간단하고 쉬워. 조미료를 넣으면 맛이 나지. 그렇지만 그건 절대 쓰면 안 돼. 땅콩이나 잣을 넣어도 맛이 나지만, 그건 원재료의 본질적인 맛을 눌러버리거든. 그래서 요리가 힘든 거예요.”

올리브 오일에 새우껍질을 바싹 볶아 만든 문순우식 소스에 버무린 오징어먹물 스파게티가 오늘의 메뉴. 구운 새우와 아스파라거스, 크레송, 붉은 양파, 파프리카를 곁들이고 레드와인 한 잔. 거기에 문짝만 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아리아가 샐러드드레싱처럼 식탁 주위를 감싼다.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파스타 소스와 신선한 채소의 맛을 제대로 느끼고 있을 즈음, “이제 맛이 좀 있지? 처음부터 맛있는 음식은 먹다 보면 맛이 떨어지는 법이에요”라며 확인 멘트가 날아든다. 자신의 요리를 ‘뒤가 편한 음식’이라고 이야기하는 이 사람은 바로 화가이며 사진가인 문순우 씨다. 그의 요리에 대한 느낌 한마디, 편안하면서도 격格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차려준 첫 번째 점심을 맛본 이곳은 경기도 이천에 자리잡은 그의 작업실이다. 전자제품 재활용센터의 커다랗고 볼품없는 창고 하나를 통째로 빌린 뒤 작년 여름 3개월 동안 비지땀을 흘리며 두 손으로 직접 개조해 완성했다. 테이블, 문, 선반, 벽, 도구 걸이, 조명, 장식 등 기본 설비부터 작은 장식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작업실에 ‘올인’했다. 가장 의욕적으로 신경 써서 꾸민 공간은 주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주방은 그리 넓지 않지만 여느 식당 요리 시스템 부럽지 않다. 화력 센 업소용 가스레인지와 후드는 기본, 오븐과 식기세척기, 대형 바비큐 그릴, 비행기에서나 봤던 대형 보온 기계 등 구석구석 신기하고 기능적이고 멋스러운 물건들이 꽉 들어차 있다. 문순우 씨는 겉보기에는 요리와 그다지 친할 것 같지 않은 ‘남자다운’ 외모지만 평소 요리를 즐길 뿐 아니라 때로는 몰입하기도 한다. 친한 지인들과 함께 작업실에서 파티를 자주 하는데, 혼자서도 40~50인분의 음식은 거뜬히 준비할 수 있다. ‘요리’는 지금껏 그가 추구하는 예술 세계의 한 분야다.

1 적채 위에 올린 연어스테이크 레드 와인에 소금, 통후추, 페퍼민트를 넣고 20시간 이상 숙성시킨 연어를 와인째로 끓여 지방을 제거한다. 팬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연어를 굽다가 거의 익을 무렵 바질을 뿌려 마무리한다.
2 구운 새우 베이컨말이 흰후추와 페퍼민트를 넣은 화이트 와인에 10시간 이상 숙성시킨 새우를 찜통에 넣어 반만 익을 정도로 찐다. 그 새우에 베이컨을 말고 꼬치로 고정시킨 뒤 그릴에 바싹 굽는다.
3 그릴에 구운 킹크랩과 홍합 킹크랩은 스위트 칠리에 로즈메리, 페퍼민트, 올리브 오일, 치즈, 마늘, 건고추, 레드 와인, 소금을 섞은 소스에, 홍합은 스위트 칠리, 바질, 올리브 오일, 레드 와인을 섞은 소스에 발라 굽는 게 포인트.
4 새우껍질소스 오징어먹물 스파게티 올리브 오일에 새우껍질과 머리, 꼬리를 넣고 짙은 갈색이 날 때까지 볶는다. 우러난 기름에 마늘편, 건고추, 바질을 넣어 볶다가 향이 배어나면 익힌 먹물 스파게티를 넣는다.

문순우의 ‘요리’는 ‘맛’있고 ‘멋’있다 문순우 씨는 정식으로 요리를 배운 적은 없다. 나이 마흔에 유학 간 프랑스에서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깨 너머 배우고 스스로 공부해 익힌 게 전부다. 한데 그가 만든 요리는 정말 ‘맛’있고 ‘멋’있다. 고급 요리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요리를 제대로 만들 수 없다는 지론에 따라 그는 특급 호텔과 고급 레스토랑을 수없이 탐닉했었다. 하지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거다’ 싶은 음식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딜 가나 스테이크 맛이 똑같고 파스타 맛이 똑같은 것을 이 예술가가 어찌 이해할 수 있으리. 기계에서 찍어낸 것처럼 모든 음식의 맛이 천편일률적이어서 ‘느낌’이 없었다. 이것이 그가 요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이유다.“나라면 한번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요리를 만드는 데도 당위성이나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이렇게 요리를 만들었냐고 물으면 자기 나름의 답이 있어야지. ‘그냥 맛있으니까’는 답이 안 돼요. 뭐는 맛이 없나? 아이스크림도 맛있고, 빵도 맛있지…. 그것보다 한 단계 우위에 놓인 이유가 필요하다고. 나 혼자만 맛있는 건 요리가 아니에요. 상대방을 파악하고 이해해서 만들어낸 음식으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진짜 요리지.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이 ‘이 사람이 나를 알아주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아 행복할 때 요리의 진정한 맛이 나는 거라고.”

예컨대 바로 어제 환갑을 맞았던 문순우 씨를 위해 누군가가 특별히 음식을 만들었다 치자. 이때 나이 예순인 점에 착안해 60가지 재료를 써서 요리했다든지 아니면 60년 된 와인을 내놓는다든지 하는 설명과 함께 요리를 내놓는다면, 이런 게 진정 맛있고 감동을 주는 요리라는 말이다. 여기서 양념의 맛이나 정확한 레시피 같은 건 별 의미가 없다. 경지에 이른 요리사는 자신이 간을 보지 않아도 감각으로 맛을 느끼게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문순우의 요리에는 어떤 감동적인 맛이 숨어 있을까. 그의 요리를 제대로 알려면 우선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사진가 문순우로 더 잘 알려진 그는 대학에서는 회화를 전공했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진가는 아니었지만 몇 년 전 인사동에서 열린 사진전에서 일본의 세계적인 컬렉션 회사인 차이트 포토zeit-foto가 그의 작품을 무려 여덟 점이나 구입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얼마 전까지 삼청동에서 재즈 바를 운영했던 재즈 마니아이며, 콘트라베이스 연주도 한다. 그리고 오디오 평론을 했던 오디오 전문가이기도 하다. (예술가 문순우가 더 궁금하다면 <행복> 2004년 1월 ‘라이프 & 스타일’을 참조하길).

그는 모든 예술은 수평적이고, 그 기반은 ‘음악’에 있다고 말한다. 예술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점, 선, 면의 개념이 가장 확실한 것이 음악이기 때문이란다. 음악을 아는 사람은 그림을 읽을 줄 알고, 그림을 느끼는 사람은 음악을 볼 줄 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술가에게 장르의 편식이란 있을 수 없다. 요리 역시 음악에서 시작된 예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여긴다.

1 생각날 때마다 요리 아이디어와 레시피를 적어놓은 요리 노트.
2 와인과 시가를 즐길 수 있어 행복하다는 그. 와인 액세서리는 종류별로 다양하게 갖고 있다. 얼마 전 파리 여행에서 구입한 수제 스크류 드라이버는 요즘 그가 가장 아끼는 물건.
3 여행 중 운좋게 싼값에 나온 ‘오네이도’ 커트러리를 발견했다. 당장에 1백 세트를 구입해 잘 사용하고 있다. 4 주방 창가에 걸려 있는 각종 바비큐 도구들.
5 어린이에게 ‘ 집’에 대한 꿈을 심어주고 싶어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형상들을 하나씩 풀어낸 작업. 흙을 주물러 집을 지은 뒤 가마에 구운 것.
6 주방에는 업소용 고화력 가스레인지를 설치했다. 시의 적절한 화력 조절은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기본 중의 기본.

“사람들이 요리가 창조적이라고, 예술이라고 말할 때 난 처음엔 웃었어요. 요리는 예술이 아닌 줄 알았지. 그런데 내가 해보니까, 같은 재료를 주고 백 명한테 시키면 백 개의 맛이 다 다르잖아. 요리도 음악처럼 점, 선, 면의 요소를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맛에도 높낮이가 있지. 베이스가 되는 짠맛부터 높은 신맛까지. 재미있지 않아요? 예술이 뭐야? 예술은 문화고, 문화는 생활이지. 생활의 기본은 의식주잖아. 나는 ‘식食’이 제일 앞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장 격格이 높은 게 ‘식’이거든. 그리고 ‘음식’과 ‘요리’는 분명히 달라. 태초부터 있었던 관념적인 먹을 것이 ‘음식’이고, 같은 재료를 가지고 창조적인 작업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게 바로 ‘요리’인 거야.”


자신의 작품 앞에 선 문순우 씨. 4명의 여자를 그린 작품은 전쟁 시 공항에서 항공기를 유도할 때 쓰는 사인 보드에 그린 것. 대형 스피커는 직접 조립해 만들었다.

베토벤도 좋아했을 만한 요리? 음식의 컬러는 사람과의 관계를 좌우한다. 그는 초대되는 손님의 취향과 상태에 따라 음식의 색을 맞춘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위해서는 적양파나 연어처럼 붉은색 재료를 주로 사용해 요리한다. 붉은색은 적극적이고 강렬한 기운을 지녀 처음 만난 관계에서의 서먹함을 덜어주고 식욕을 촉진시킨다. 감기에 걸린 이에게는 따뜻한 기운을 지닌 노란색 재료로 만든 요리를 내놓는다. 그날 마실 와인을 이용해 요리 궁합을 맞추는 것도 그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 와인마다 산酸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인데, 함께 먹는 요리와 산의 향미가 같아야 맛이 조화롭다.

음식을 그릇에 담을 때도 1인분의 양이 5온스(약 150g 정도)를 넘지 않는다. 이제는 손에 딱 한 번 잡으면 5온스에서 오차가 거의 없다. 서양사람 1인 기준이 7온스(약 200g 정도)인 것에 비하면 약간 부족한 듯하지만 ‘조금 더 먹었으면…’ 싶을 때 진짜 맛이 있고, 매력이 있는 거라고. 무엇보다 문순우식 요리의 원칙은 저지방 다이어트식, 요즘 유행하는 ‘웰빙’ 스타일이다.

“해물 요리에는 버터를 쓰면 안 돼. 나는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오일만 쓰고 버터나 마가린, 식용유는 전혀 안 써요. 내 요리에는 튀김도 없어. 올리브 오일 두른 팬에 돈가스를 올려 한쪽 면을 바싹 익히고 반대편을 살짝만 익히면 담백한 ‘문순우식 구운 돈가스’가 되지. 몸에 안 좋은 것들을 알면서도 맛으로 먹는 사람들이 많아요. 고소한 맛을 내려면 잣이나 땅콩을 갈아 넣으면 되지만 지방흡수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난 안 좋아해. 새우요리는 꼬리까지 다 먹어야 좋은 건데, 사람들이 잘 안 먹잖아요. 그래서 새우껍질과 꼬리까지 바싹 볶아서 파스타 소스를 개발했지.” 재즈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코드가 바뀌었듯 예술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한다. 요리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문순우 씨는, 쇤베르크나 번스타인 같은 현대 음악가들이 재즈의 형식을 빌리지 않고는 작곡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베토벤 역시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의 음악에 재즈를 섭취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예술에서 역사성과 시대성은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그러고 보니 문순우 씨의 요리가 담고 있는 코드 역시 요즘 시대성과 통한다. 저지방 웰빙, 소식小食, 감성 자극, 행복, 컬러테라피 그리고 재즈…. 그러니 ‘예술가 문순우’가 만든 요리, 베토벤이 맛보았다면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을까.

이제 막 환갑이 된 그에게 꿈이 무어냐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더 늙어서 일흔이 넘으면 낮에는 그림이나 사진 작업을 하고, 저녁에는 딱 한 팀만을 위해 맛있고 멋있는 요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란다. 하루에 한 팀만 예약 받아 미리 상담을 통해 손님이 좋아하는 것을 파악하고 그 사람을 위해 와인 선별부터 테이블 세팅, 코스 요리까지 제대로 차려 격을 살리고 싶단다. 와인 마시고 시가를 피우며 음식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하다는 문순우 씨. 앞으로 그의 인생이라는 접시에는 누구를 위한 요리가 어떤 음악과 함께 담겨져 문순우식 예술로 소화될까.

요리 고수들이 혀를 내두른 사연
파리 유학부터 시작된 55년간의 외국 생활로 인해 나는 김치 없이도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요. 그 시절엔 김치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한국에 와서 한식당에 가면 친구들이 ‘이 김치가 맛있네, 저 된장이 맛이 없네’ 하는데도 나는 도무지 감이 없더라고요. 하지만 서양 음식은 먹었다 하면 즉시 느낌이 오지요. 내 입맛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닌데 문순우 씨가 만든 요리는 왜 그렇게 내 입맛에 딱 맞는지,

“바로 이맛이야!” 했습니다. 그이는 기질이 참 재미있고, 뭐 하나를 해도 깊이 있게 하는 친구예요. 요리할 때도 재료 구입이며 조리 과정, 그런 걸 어디서 그렇게 많이 배웠는지, 모르는 게 없고 아이디어도 풍부합니다. 하루는 이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 전직 대사였던 제 친구들 부부 10여 명을 불러 문순우 씨한테 요리를 부탁했죠. 짧은 시간 안에 ‘게 요리’를 착착 해내는데, 어쩌면 그렇게 맛이 있던지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어요. 대사 부인들은 요리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고수 중의 고수인데 말이죠. 이 친구 데리고 간 걸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릅니다.
―조상권 (광호 도자문화원 이사장)
구선숙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