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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민정 삶의 결 속에 스며든 우주의 섭리

김민정 작가는 1962년 광주에서 출생했다.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91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밀라노의 브레라 아카데미Brera Academy of Fine Art에서 수학했다. 이후 이탈리아에 체류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왔으며, 최근 프랑스와 미국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민정 작가는 인쇄소를 운영하신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종이를 가지고 놀았다. 일곱 살 때부터 우현 장은정 선생에게 서예를 배웠고, 대학 진학 전까지 강영균 화백에게 수채화 수업을 받았다. 그렇게 숙명처럼 한지와 먹을 가까이하고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가 20대 후반의 나이에 뉴욕도, 파리도 아닌 밀라노행을 택한 건 다름 아닌 ‘서양미술의 근원’을 찾고 싶어서였다. “동양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대학에서 배운 것과는 다른 서양미술의 근원이 궁금했어요. 특히 회화가 꽃피었던 르네상스 미술의 근원지인 이탈리아를 떠올렸지요. 유학 전 유럽 여행에서 쓰레기통 하나까지도 아름다운 그들의 미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괴리감에 빠졌다. 그 어떤 것도 자기 것이 아닌 것만 같고, 그들이 잘하는 것을 아무리 따라 해도 결국엔 그들만큼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자괴감이었다. 그에 비해 한지는 작가에게 일종의 습관이었다. “사람들이 ‘23년이나 유럽에 살며 작품 활동을 했는데, 결국엔 한지를 가지고 이런 작품을 하느냐’고 많이들 묻습니다. 하지만 작가란 결국 자기 피부처럼 느껴지는 재료를 손에 쥐는 것 같아요. 종이 접고 딱지 치며 어려서부터 갖고 놀던 장난감을 지금까지도 놓지 않고 있으니까요. 놀이의 규칙을 알기에 그 관성이 지속되는 거지요.”

종로구 수송동의 OCI미술관에서 12월 27일까지 열리는 전시 <김민정: 결>은 지금껏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얻은 그가 24년 만에 고국에서 선보이는 첫 개인전이다. 최근작 한지 콜라주 작품 30여 점 중 2015년 신작인 ‘Dobae’ 시리즈는 초가집 흙벽에 종이를 바르던 기억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한 것들이다. 얇은 한지를 그을리고 태워 작은 구멍을 내고 그 각각의 조각을 겹쳐 이어 붙였다. “그을리고 태운다는 건 저에게 다시 생각하고, 다시 생명을 주는 걸 의미해요. 어릴 때 시험을 보고 나면 어머니께서 시험지를 태우곤 했어요. 다음에 더 잘 보라는 의미였지요. 태운다는 건 완전 소멸이 아닌, 그다음의 어떤 것을 그리며 그것을 기원하는 마음이에요. 일종의 ‘윤회’를 의미하지요.” 김민정 작가는 2015년을 살고 있는 우리 몸속에 흐르는 피와 세포에 1백 년 전, 1천 년 전 우리 조상의 그것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2015년, 남프랑스에서 지내며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작가의 정신에도 바로 그 조상의 역사가 각인되어 있는 듯했다. “1998년인가, 그림을 그리다가 순간적으로 종이를 약간 태워보았어요.불을 이용하면서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죠. 저절로 숨을 조절하고 호흡을 통제하게 되는데 마치 원시인이 된 것 같은 해방감과 자유로움이 느껴졌어요. 자연과의 교감이랄까, 일종의 명상이지요.”

‘Story’,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137x200cm, 2009


이번에 전시하는 30여 점 대부분이 저채도의 무채색 작품이지만, 마음의 즐거움이 넘치고 행복한 때엔 ‘색’이 더 당긴다. 작은 색지 조각을 이어 붙여나갈 때도 흑백을 연상하며 작업하는 그이지만, 색을 쓴다는 건 ‘혹惑’을 위한 것이기에 ‘오방색’을 다 쓴다. 그의 작품 중 ‘비움의 꽉 참’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뜻처럼 정반합의 원리를 추구한 것이다. 표지 작품 ‘The Street’(2010) 역시 이러한 색의 조화를 골몰히 생각한 끝에 태어난 작품. 작가가 한지를 잘라서 한쪽 면을 태운다는 건 그쪽을 비운다는 것이고, 그 바로 옆에 또 한지를 붙이는 건 그 비움을 다시 채운다는 뜻이다. 그래서 분명 사각 프레임 안의 면적이 색채감 있는 한지로 꽉 차 있는데도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모든 작가가 작품을 하는 의도는 다르지만, 저는 세상의 ‘도道’와 ‘질서’를 시각화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질서란 보이지 않지만 늘 ‘있는 것’이지 않나요?”

전시가 막을 내리면 작가는 현재 머무는 남프랑스의 생폴드방스Saint-Paul de Vence로 돌아간다. 내년 4월에는 LA에서 개인전을, 5월에는 베를린의 모든 화랑이 참가하는 베를린 아트 위크에 참가한다. 끝없이 일정이 이어지는 나날이지만 작가는 아티스트로서 소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지난여름은 연어가 많이 나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Reykjavik에서 보냈는데, 그곳의 청량하고 아름다운 풍광이 굳은살 아래 새살이 올라오듯 재충전하는 시간을 선물했다.

김민정 작가는 “예술가란 하늘 아래 없던 철학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종의 철학자”라고 말했다. 그의 작품을 응시하면 무한한 시공간 한가운데 작가가 그만의 질서로 묶어놓은 투명한 매듭이 보이는 듯하다. 마치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에 드문드문 빛나는 별자리 같다. 인간의 피부처럼 얇고 찢어지기 쉬운 한지로 무한대의 영속성을 표현한 작가야말로 자신이 창조해낸 세계의 철학자가 아닐까. 겹겹이 쌓은 한지 사이사이가 우리가 미처 가늠할 수 없는 ‘삶의 결’이고 ‘시간의 틈’인 것만 같다.

#김민정 #한지예술 #dobae #the street
글 유주희 기자 | 사진 김동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