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관에 전시한 최병훈 작가의 테이블. 천연 나무와 돌을 이용해 한국적 고인돌을 실내로 옮겨왔다.
에펠탑이 태극빛으로 물든 시간, 국립 샤요Chaillot 극장에서는 멋진 패션으로 음악에 대한 예를 갖춘 프랑스 관객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이자 한국 전통예술의 정점인 종묘제례악이 울려 퍼지기를 기다렸다. 그간 해외에서 짧은 형식으로 무대에 올린 적은 있지만 5백50년간 왕실의 제사 때 바치던 영험한 종묘제례악의 전편을 해외에서 연주한 건 이번이 처음. 죽은 왕을 그리는 장대한 연주와 전에 들어보지 못한 독특한 동양 악기의 음색에 샤요 극장에 앉은 관객은 밤하늘의 별이 된 왕을 따라 생과 사가 윤회하는 거대한 우주로 들어서는 듯한 신비로움을 경험했다.
같은 날, 루브르 박물관 서쪽에 자리한 프랑스 국립장식미술관(Mus e des Arts Decoratifs Paris). 1882년부터 프랑스 장식 예술사를 관통하는 다채로운 작품을 전시해 연간 60여만 명이 찾아오는 이 고풍스러운 미술관에 <코리아 나우Korea Now>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렸다. 한불 수교 1백30주년을 기념해 지금 이 순간 한국의 장식 예술 작품을 선보이는 특별전이 열리는 것을 파리 시민과 관광객에게 알리는 초대장이다.
장식미술관 중앙홀에서 펼쳐진 공예전은 장순각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가 공간 디자인을 맡았다. 중첩, 차정, 전통 창호, 문양, 빛의 농담 등 우리 전통 건축의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한국의 현대적 공간 감각이 국립장식미술관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어우러지도록 했다.
한국 문화의 다면성을 보여준 공예관
“프랑스인에게 한국을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정체성이란 단일한 것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공예가 사물이나 대상이 아닌, 그것으로 구현된 우리의 모습이라고 느껴요. 프랑스 국립장식미술관에서 원한 전시 주제가 ‘동시대, 한국, 공예’라는 것이었으니, 그들이 우리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건 지금의 물건이 아닌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공예전의 예술감독을 맡은 임미선 전 클레이아크미술관장은 이러한 평소 생각에 따라 전시 주제를 ‘유정有情(affection)’으로 정했다. 한국의 고유 정서인 정情을 마음이 아니라 그것을 가진 사람 자체로 해석한 것이다. 사람의 특징은 다양성이 아니라 다면성이 아니던가.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면을 지니고 있듯, 동시대를 뜻하는 지난 1백 년 동안 우리나라가 어떤 다양한 면을 갖추었는지를 여러 작가의 작품을 통해 알리는 것이 이 전시의 목표다.
1 루브르 박물관 등 중요 미술관이 모여 있는 파리 중심부 히볼리가의 국립장식미술관 외벽에 내걸린 전시 현수막.
2 한국의 현대 그래픽을 소개하는 그래픽디자인전에는 동시대 한국의 그래픽디자인을 살펴볼 수 있는 안상수, 박금준, 슬기&민 등 22인의 시각 창작물을 선보였다.
국립장식미술관 관람객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미술관 중앙홀. 공예전은 한양대 건축학과 장순각 교수가 한옥의 모티프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전시 공간에 작가 1백5명이 8백90여 점의 작품을 동시에 선보이는 방대한 규모로 관람객을 놀라게 한다. 한국 공예의 원형인 전통 작품은 물론 옻칠, 나전, 한지, 유기, 도자와 가구 등 다양한 전통 재료를 작업에 반영한 현대 공예가의 작품, 젊은 디자이너와 장인이 협업한 미래적 작품 등이 미술관 중앙홀 복도를 따라 군중처럼 도열했다. 이 작품을 동시에 관람하면서 관람객은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단편적 한국이 아니라, 한국 문화의 다면적 모습을 경험할 수 있다. 유정, 즉 ‘나와 같은 시대를 사는 한국 사람은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감상이 우리나라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프랑스 시민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다.
한국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이끌어낸 패션관
이영희, 김혜순, 이혜순, 김영석, 김영진, 앙드레 김, 진태옥, 이상봉, 준지 등 패션관에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복 및 패션 디자이너 24인이 2백70여 점의 작품을 전시해 패션과 트렌드에 민감한 파리지앵의 호응을 받고 있다. 이 역시 한국의 복식 문화를 설명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다.
1 공예관과 패션관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인 그래픽디자인관의 전시 공간은 세계에서 독창성을 인정 받은 한글을 모티프로 한 조명 등과 집기를 사용해 꾸몄다.
2 패션 브랜드 샤넬이 한복을 모티프로 컬래버레이션 한 작품.
패션관 입구에서 외규장각 의궤와 색동 한복 등 한국 색과 전통 의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물을 먼저 접한 관람객은 전시 동선을 따라가면서 이국적 패션뿐 아니라 한국인의 삶에 녹아든 철학까지 경험하게 된다. 청(선비 정신), 적(역동성과 염원), 황(고귀함과 부귀영화), 백(무소유와 신성), 흑(통섭과 지혜)의 색채로 나누어 전시하는 아름다운 한복을 통해 한국인이 살아온 마음가짐까지 엿볼 수 있게 한 전시 구성의 묘미다. “한국 패션 디자인의 뿌리인 한복의 선, 그로 인해 생긴 일상의 다양한 문화 그리고 우리 삶의 정서를 보여주고, 한국 문화가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와 어떻게 다른지 관람객이 스스로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라는 서영희 예술감독의 희망처럼 패션관을 찾은 많은 파리지앵이 처음 보는 한복의 실루엣에 감동했고, 생경한 촉감과 질감에 흥미와 경이로움을 표했다.
반면 서영희 예술감독은 열정과 샤머니즘을 표현한 이상봉 디자이너의 작품, 한복을 모티프로 한 스티브J&요니P 디자이너의 컨템퍼러리 패션, 아디다스와 협업한 준지 디자이너의 한복 등으로 한국인이 기대하는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을 프랑스에 소개하고자 했다. 패션과 트렌드에 빠르게 움직이는 프랑스에서 프랑스식으로 우리의 패션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 식으로 미래 패션을 이야기함으로써 세계인이 우리나라 특유의 복식 정서를 새로운 관점으로 느껴보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이처럼 다각적인 한국 복식 문화를 통해 오늘의 한국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한 전시에 호평이 쏟아져 영국 등 다른 국가에서 전시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1 노미자 작가의 부처님 모시던 가마를 재해석한 작품.
2 전통 한복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 모음. 김혜순, 설윤영 디자이너 등의 독특한 한복 모티프 작품을 전시해 전시장을 찾은 프랑스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우리 정신을 담은 그릇, 그래픽디자인전
의 마지막 전시관은 “한국 문화 독창성의 바탕은 한글이다”라는 올리비에 가베Olivier Gabet 프랑스 국립장식미술관장의 찬사가 담긴 곳, 그래픽디자인전이다. 광고그래픽관에서는 공예전이나 패션전에 비해서는 소규모이지만, 안상수, 박금준, 슬기와민 등 22인의 작가가 포스터, 서적 등을 통해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글 서체의 독특한 시각디자인을 선보인다. “한글은 우리 정신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시각디자인의 대표성과 다양성을 두루 보여주고 싶었다”는 최범 예술감독의 취지는 특히 한글을 시각디자인 모티프로 이끌어낸 선구자인 안상수 작가의 여러 작품을 통해 프랑스인에게 전달된다. 오랫동안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라는 자신의 교육기관에서 교장으로 일하는 안상수의 삶이 독특한 한글 시각디자인의 역사 자체이기 때문이다. 1882년 설립한 직후부터 예술가의 창작 활동 지원, 예술교육, 전문가 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립장식미술관에서 열린 전은 이렇듯 프랑스 사회에 한국 예술과 문화를 알리는 교육 현장 역할을 하고 있다. 흥미롭고 멋스럽게, 하지만 진중하게 전통과 미래가 만나는 세상의 한가운데서 동시대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이 전시는 2016년 1월 3일까지 열린다.
푸른빛 색채로 선비정신을 표현한 김정아 디자이너의 영조도포 작품.
- 한불 수교 1백30주년 상호 교류의 해 공식 전시 프랑스 국립장식미술관의 지금,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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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9일 밤 프랑스 파리. 에펠탑에서 한국의 태극기와 프랑스의 삼색기를 상징하는 조명 쇼가 펼쳐지자 시민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밤하늘 빛의 장관에 환호했다. 한불 수교 1백30주년을 맞아 ‘상호 교류의 해’가 시작됨을 알리는 점등식에 이어 국립 샤요 극장에서는 종묘제례악 공연이 열렸고 프랑스 국립장식미술관에서는 전시를 시작했다.#코리아나우 #프랑스국립장식미술관 #그래픽디자인전글 김민정 기자 | 사진 제공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