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분만 걸어 나가면 탁 트인 밀밭을 가로질러 달릴 수 있다. 승부가 뻔한 부부 달리기 시합을 즐기는 곳.
부부 생활기록부
생애 첫 독립 생활이자 타지 생활인 만큼 별별 의욕이 차고 넘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인들은 타향살이의 적적함을 달래줄 요량으로 이따금 연락을 해오는데, 오히려 내가 띄엄띄엄이라 핀잔을 듣기도 한다. 사정은 대체로 이렇다. 처음 보는 식재료들로 요리 실험하느라, 코딱지만한 상자 텃밭으로 생태 학습하느라, 통신도 잘 안 잡히는 숲에서 뛰느라, 하루에 네댓 시간은 홈 오피스를 가동하느라, 다시 주거 모드로 돌아와서는 해도 티가 안 나지만 안 하면 티가 확 나는 집안일을 하느라, ‘칸트’처럼 정확히 저녁 6시 5분 전이면 집에 들어서는 짝꿍과 먹을 저녁밥을 짓느라, 피트니스센터에서 씩씩대느라, 주말엔 나가서 주중에 한가득 쌓인 관심사를 해결하느라, 매달 한두 번은 불쑥 여행을 다녀오느라, 그렇게 꽉 채운 한 달을 지금처럼 <행복>에 기록하느라…. 구구하게 늘어놓자니 어쩐지 더 멋쩍어진다. 이 중 가사 영역에 해당하는 몇몇 항목은 생짜 초보와 다름없이 여전히 더디고 허둥댄다. 짝꿍과의 공동생활 항목을 꼽자면 운동, 요리, 여행이 되겠다. 합숙 1년 차 생활기록부를 만들어볼까 싶어 순서도 정했는데 좋아서 하는 것,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로 하게 되는 것은 몇 번이고 얘기할 수 있으니 힘들어도 꾹 참고 하는 것부터 기록해본다.
근력 운동을 하러 일주일에 세 번 가는 헬스클럽. 중량을 높이는 날엔 혹시 모를 부상을 대비해 곁에 지켜 서서 거든다.
각성의 순간
짝꿍은 어릴 때부터 수영, 스피드 스케이팅과 크리켓까지 신체 발달에 좋다는 운동은 고루 익히며 자연 가까이에서 자랐다. 꼬마 때는 수영 대회도 나가고 방과 후에는 바닷가에서 뛰어놀다 취미 삼아 라이프가드 자격증도 땄다. 물가를 참 좋아하지만 맥주병인 내게 아주 바람직한 짝이다.
그는 몇 년째 한결같이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동네 숲에서 꼬박 10km를 달리고 온다. (연재하는 책이 <멘즈헬스>가 아니어서 감히 하는 말이지만) 주변 지인에게 곧잘 PT 지도 편달을 부탁받는 것을 보면 겉보기에 꽤 옹골찬 몸인 것 같다. 가파른 산에서 아슬아슬하게 산악자전거를 타는 취미 빼고는 나무랄 데 없는 루틴이다.
반면 나는 땀 흘리는 즐거움은 잘 모르고 지냈다. 게다가 체력 관리에 대해서는 지각의 수준이 정말 형편없었는데, 카페인 범벅의 에너지 드링크 한 캔이면 철야 업무도 하고 클러빙clubbing도 즐길 수 있다며 심야에 깨어 있는 것을 은근히 자랑삼기도 했다. 군것질을 해도 체중에 변화가 없는 것을 뿌듯해하면서 늘 소화제를 달고 사는 것은 의식하지 못했다. 툭하면 취침을 미루고 일할 수 있는 것을 체력의 지표쯤으로 여기던 시절. 그러던 어느 날 결국 탈이 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절에 따라 익어가는 과실을 감상하는 즐거움과 좋은 이웃을 사귈 수 있다는 것이 조깅의 매력.
한 번만 더
출국을 반년 앞두고 다짜고짜 운동을 시작했다. 수면 습관도 바로잡아 남들 잘 때 나도 잤다. 이런 변화를 가장 반긴 사람은 당연히 짝꿍이다. 얼마나 벼르고 있었던지 내가 독일에 도착하기도 전에 피트니스센터 회원으로 등록해둔 것은 물론이고 그가 짜놓은 부위별 운동 프로그램들을 사전 숙지해야 했다. 지금까지 약속대로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주 3일 웨이트트레이닝은 빼먹지 않는다. 둘 중 누구 하나가 호기 부리며 중량을 높이는 날엔 뒤에 지키고 서서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 버겁겠다 싶은 순간 바로 거든다. 중력을 거스르느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애잔함마저 들 때가 있는데, 부엌에서 소꿉장난하며 다지는 부부애와는 다른 차원의 유대감이 생기는 모양이다. 물론 마지못해 끌려 나오는 날도 있다. 웨이트를 들어 올리다 슬쩍 횟수를 건너뛸 폼을 잡으면 귀신같이 나타나 숫자를 세는 통에 세트를 다 채우고야 만다. 어쭙잖은 엄살도 안 통하고 에누리도 없다. “아주 잘하고 있어. 한 번만 더!” 같은 독려가 전부인데도 꺼져가는 기운이 다시 스멀스멀 오르는 것을 보면 꽤 신통한 기합이긴 한가 보다.
이쯤에서 극적인 신체 변화나 효험 같은 것을 짚고 가면 좋겠지만, 식단 조절까지 하는 고강도 트레이닝이 아니기도 하고 운동법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준은 더더욱 아니어서 길게 할 말은 없다. 다만 내 몸의 힘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미미하나마 생활에 뜻밖의 변화가 생겼다. 아침에 일어날 때 침대에 손을 짚지 않고 바로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거나, 집에서 전철역까지의 거리 1km를 주파할 때 더 이상 거친 숨소리를 내지 않는다든가, 하다못해 재활용 분리수거를 하러 나갈 때도 가사 효율이 향상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현재 스코어 최장 기간 규칙적인 운동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여름철 수영장 몸매를 가꾸는 것보다 백배쯤 중요한 것은 70대가 되어서도 꾸준히 운동할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것. 여세를 몰아 내년엔 테니스를 시작해볼 참이다.
중세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오묘한 분위기의 이곳은 주로 봄가을에 자주 찾는다. 승마와 골프 같은 스포츠 클럽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산책하는 삶
몇 분만 걸어 나가면 자연이 펼쳐지는 동네는 달리기를 부추긴다. 날이 좋은 주말 이른 아침엔 눈곱만 떼고 나와 가까운 숲에서 뛴다. 지난봄 새롭게 발견한 아지트가 한 군데 더 있는데, 두 세기 전에 지은 농가들의 밭과 과수원, 오래된 승마 클럽과 골프장이 한데 모여 있는 인근 마을이다. 중세와 현재가 묘하게 공존하는 이곳의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5백 년 전의 우물터를 지나며 물 긷는 상상을 하거나 길가에서 호젓하게 말 타는 여인들을 마주칠 때면 조깅하다 타임 워프라도 한 느낌이다. 어느 봄날엔 들판에 파랗게 영근 이삭이 눈에 들어와 한참을 들여다봤다. 가을이 오려면 아직 한참인데 볼 때마다 성급하게 노르스름해진다 싶어 사서 걱정을 했다. 수확할 때가 되어서야 내가 매번 가로지르던 그 밭이 보리밭임을 알았다. 글로 배운 자연과는 그렇게 천천히 안면을 트는 중이다. 운동 효과라면 역시 기대할 것이 못 된다. 쭉 내달리지를 못하고 온갖 것을 살펴보겠다고 멈춰 서기 일쑤다.
전원주택 구역에 들어서면 월터 할아버지를 자주 마주친다. 미국에서 온 그는 장거리 연애로 결혼에 골인, 동네 거주 30년 차 이웃이다. 우리는 장거리 연애와 타향살이라는 공통점으로 금세 가까워졌다. 월터 할아버지는 우리가 번화가와는 거리가 먼 이곳에 신혼살림을 차린 점을 퍽 기특해한다. 지금은 운영하던 회사를 정리하고 가족과 반려견 ‘로테’와 시간을 충분히 보내지만 그도 한창 일할 때엔 지척에 이런 자연을 두고도 자주 나오지 못한 모양이다. 미스터 월터에게 자주 듣는 말로 생활기록부 1편을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다. “친구들!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더라도 숲과 산책이 빠져서는 안 돼!”
사진을 찍고 글을 쓴 소니아는 외국계 기업에서 홍보, 기획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종횡무진하던 커리어우먼. 장거리 연애를 거쳐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막 시작했다. 타지에서 부부로 살아가는 기쁨, 생활의 지혜를 터득해가는 과정이 서툴지만 즐겁다. 여행과 요리, 집 꾸밈 등 그녀의 창의적인 시선으로 포착한 일상 ‘소니아의 스틸 라이프’는 인스타그램 (@sonia_mindathome)에 매일 업데이트되니 참고해볼 것.
- 하루아침에 말고 매일매일 관성의 힘
-
집과 살림을 그림같이 가꾸고 사는 것은 연재를 통해 익히 봐왔지만 타지 생활에서 건강관리를 빼놓을 수는 없을 터. 멀리서 몸 건강은 잘 챙기고 있는지 안부를 물었더니 <행복>에 웬 스포츠 화보들을 보내왔다. 재독 부부의 여섯 번째 에피소드는 땀 흘리는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소니아의스틸라이프 #재독부부글과 사진 김소현(Sonia)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