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 작가(왼쪽)와 황성걸 교수. 책상 위 다섯 가지 풍선 모양 스피커는 컬러와 재질이 조금씩 다른 세라믹 소재라 소리를 듣기 이전에 ‘보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컬래버레이션이란 단어가 흔해진 시대다. 완전히 다른 분야가 만나 예상치 못한 결과물을 만드는 일은 이제 그다지 새로운 현상도 아니다. 종종 뻔해 보이는 것도 있지만, 협업으로 얻는 의외의 효과는 여전히 다채롭다. 상업적인 상품이 아트라는 옷을 입은 채 이미지를 격상시키기도 하고, 언뜻 합치될 것 같지 않은 완전히 다른 분야가 조화를 이뤄 보는 이에게 새로운 감상을 안겨주기도 한다. 도예가와 산업 디자이너로서 이미 다양한 기업과 협업을 하고 있는 김선미 작가와 황성걸 교수가 이번에 아주 색다른 작업을 시도했다. 진지하고 거창한 의미를 찾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일상 대화 속에서 시작했다. 사실 이 두 사람은 나이 차는 많지 않지만 이모와 육촌 조카인, 가족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다. 전공은 다르지만 홍익대 미술대학을 졸업한 동문이기도 한 이들은 언젠가 둘이 컬래버레이션을 하자는 얘기를 나눴고, 오랜 작품활동에서 오는 매너리즘과 한계를 깨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던 차에 공예와 산업디자인을 융합한 작품을 만들자는 데 뜻을 모았다.
처음엔 세라믹으로 만든 풍선 몸체 부분과 하단의 스탠드를 동일한 컬러로 고안했다. 하지만, 풍선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 블랙으로 처리했다.
행복_풍선 모양 스피커를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황성걸_산업디자인 제품은 대량생산을 염두에 두다 보니 도예 작품과는 많이 달라요. 두 분야의 장점을 골라 융합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상업적이지 않고 고귀한 도자기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생활 안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리빙 제품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 풍선 스피커 프로젝트를 시작한 거죠. 처음 아이디어를 낼 때부터 정말 재미있었어요.
김선미_전 클래식 음악 마니아예요. 20여 년 전 만든 대학 졸업 작품 중 하나도 스피커였을 정도로 소리에 대한 호감과 열망이 강한 편이에요. 그때 졸업작품을 만들면서 나중에 다시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터라 이번에 황 교수와 협업하며 스피커를 제안한 거죠.
황성걸_풍선이라는 아이디어도 김선미 작가가 먼저 제안한 거예요.
김선미_풍선 하면 아이들이나 뭔가 즐거운 이미지가 떠올라요. 음악이 꼭 즐거울 때만 듣는 건 아니지만, 위트 있는 걸 만들고 싶었어요. 처음엔 이런 아이템이 있는 기업이나 전문 음향 시스템 메이커와 함께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우리의 첫 작업이니만큼 좀 더 재미있고 자유롭게 해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죠. 형태나 비례, 컬러 등 모든 부분에서 서로 의견을 공유하고, 기계적 디테일은 황 교수 의견을 위주로 반영하고… 처음 아이데이션하고 여러 사항을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어요.
김선미 작가의 여주 작업실에서 석고 틀 뜨는 작업에 직접 참여해 디자인을 연구하는 황성걸 교수와 팀원.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허물다
행복_전체 작업 과정은 어땠나요?
황성걸_두 분야를 조화롭게 융합하기 위해 접점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이 스피커 밑부분을 살짝 건드려보세요. 움직이는 플로팅 형태예요. 이건 다분히 산업디자인스러운 아이디어거든요. 그런데 위쪽 본체 부분의 도자기를 부각시키면서 조화를 이루도록 신경을 써야 했죠. 이런 사항들을 결정한 후부터는 수월했어요. 풍선 모양 부분은 도자기를 바로 빚은 게 아니라 3D로 시뮬레이션한 후 크기나 비율 등을 조정하며 정했고요. 그 후 경기도 여주 작업실에 내려가 석고 틀 찍는 작업 과정까지 모두 함께 했어요.
김선미_도자기 부분은 슬립 캐스팅Slip casting이라는 기법으로 만든 거예요. 석고 틀에 녹은 초콜릿 농도 정도의 걸쭉한 흙물을 붓고 굳혀 만드는 방식으로 아주 깔끔한 형태를 완성할 수 있죠. 첫 작업과 똑같은 형태의 제품을 또 만들어내야 할 때 자주 쓰는 방식이에요.
황성걸_이 형태와 크기에 딱 맞는 디테일을 만들려면 여러 가지 계산을 염두에 둬야 해요. 굽고 나면 크기가 줄어들기도 하니 그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기도 하고, 풍선 꼭지 부분을 붙이면 또 다른 변수가 생길 수도 있고… . 아래 스탠드 부분은 산업디자인 주문 방식으로 만든 것입니다. 알루미늄을 애너다이징anodizing 방식으로 처리한 것인데 이 부분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알루미늄 소재라 지나치게 견고해 보이면 풍선 도자기와 안 어울릴 수도 있으니까요. 디자인도 처음엔 각진 모양으로 생각했다가 모서리를 둥그스름하게 바꾼 거예요. 각진 형태는 콘트라스트가 너무 강할 수 있고, 반면 아예 둥근 형태는 개성이 없어지고 풍선과 너무 똑같아 보일 수도 있거든요. 주인공인 풍선을 부각시키면서도 잘 어우러지게 하기 위해 마음고생 좀 했어요.
김선미 작가는 형태의 통일성과 깔끔한 실루엣을 위해 슬립 캐스팅 방식으로 도자기를 빚었다.
행복_도예와 산업디자인은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김선미_제가 하는 작업은 좀 더 자유롭게 만들어도 용납이 되죠. 그런데 산업 디자인 제품을 만들 때는 아주 작은 오차도 없어야 하더라고요. 도자기는 고온의 불에서 견뎌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과정 중에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많이 생겨요. 이번 작업도 풍선 도자기를 열여덟 개 정도 만들었는데, 터지거나 찌그러진 것도 있어요. 그런데 각자 관점이 다르니 나는 망쳤다고 생각하는 것도 황 교수 팀에서는 좋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흙 맛을 살리려고 하다가 어설퍼 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스피커라는 제품을 완성하는 것에 가장 주안점을 두었죠.
행복_도자기 느낌을 살리면서 소리를 내야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황성걸_지금 완성한 다섯 가지 재질과 컬러의 스피커는 모두 소리가 달라요. 두께와 재료, 마감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소리도 달라지죠. 그런 점이 고민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게 묘미인 것 같아요. 정교한 음을 추구한다기보다 세라믹의 맛을 살린, 색다른 스피커인 거죠. 향후 이 느낌을 유지하면 서 더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한 연구를 해야겠지만요.
김선미_오디오 부분에서 전문 매커니즘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이 풍선 스피커만의 매력이 있어요. 저희의 첫 의도도 ‘소리를 본다’라는 느낌을 주는 거예요. 첫눈엔 ‘이게 뭘까?’ 하는 궁금증을 안겨주다가 스피커라는 사실을 알면 재밌게 느끼는 오브제인 거죠.
황성걸_거실이나 오디오룸이 아닌 다이닝룸 같은 공간에도 어울리는 스피커라고 생각해요. 일반 스피커처럼 방향성을 고려한 디자인이 아니다 보니 식탁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도 부담스러워 보이지 않고 세라믹이라 한층 친숙하고. 물론 아직 프로토타입이라 양산할 경우 보완해야 할 점이 많겠죠.
김선미_향후 양산을 하더라도 소량으로 만들고 싶어요. 판화 작품처럼 1백점 중 몇 번째 에디션인지 알 수 있게 하고 작가 사인도 들어가는 식이죠. 실용적인 기능성을 갖춘 아트 상품이 되면 좋겠어요.
황성걸_접근 방식이나 작품 분위기를 봤을 때 현대판 팝아트 같다고 생각해요. 탁월한 밸런스를 갖춘 작품이기도 하고요. 만약 저 혼자 이런 제품을 만들었다면 일반 산업디자인 제품이 나왔을 거예요.
(왼쪽)풍선 부분의 형태와 비례 등을 조율, 검토하는 모습.
(오른쪽)다양한 풍선 컬러와 꼭지 부분 형태를 결정하기 위해 시뮬레이션하는 과정.
협업의 의미
행복_각자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가족이라 더 기억에 남는 일도 많았을 것 같아요.
김선미_황 교수와는 연륜과 경험치는 다르지만 확실한 공감대가 있어요. 아무래도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니까요. 전 아날로그 예찬론자거든요. 점점 첨단으로 발전하는 기계가 무서울 때도 있어요. 물건 하나도 정서적 느낌이 나는 게 좋고요.
풍선과 어울릴 스탠드의 다양한 옵션을 테스트하고 있다.
행복_협업하며 서로 보완되는 점은 어떤 게 있었나요?
김선미_황 교수는 그저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는 디테일을 잘 잡아내요. 반대로 그런 부분에만 사로잡혀 있을 때 제가 그걸 깨뜨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요. 전 즉흥적 감각에 의해 작업하는 스타일이고, 황 교수는 모든 작업에 세세한 계획을 세우고 절차를 중요시하지요. 그런 점에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예전에는 계획성 있게 작업을 한다거나 과정을 기록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릇만 해도 포장을 잘하면 훨씬 좋아 보이는 효과가 있거든요. 지금은 한 가지가 아닌 모든 분야가 같이 움직여야 하는 시대잖아요. 필요성을 깨달아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함께 하는 작업 과정을 지켜보는 자체가 많은 도움이 되었을뿐더러 서로 보완할 수 있어 좋았어요.
황성걸_도자기 작업은 한 명의 작가가 모든 과정을 책임지고 작품을 만들지만, 산업디자인은 팀을 구성해 조직적으로 움직여요. 디렉터가 제안을 해도 팀원이 반대 의견을 내놓아 바뀔 수도 있죠. 그런 상반되는 점이 흥미로운 경계인 것 같아요.
김선미_맞아요, 저는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해 하는 작업이라 협업할 때마다 신선한 자극을 받아요. 물리적 시간과 목표가 정해져 있으니 개인적으로 작업할 때만큼 자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과정조차 흥미롭고 결과물에 보람을 느낄 때가 많아요. 저 같은 작가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고 생기를 돌게 하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해요.
황성걸_제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대기업과 함께 일하면 너무 진지하고 경직된 경우가 많거든요. 전략적이어야 하고, 사업적 측면도 신경 써야 하며, 소비자의 요구 사항도 반영해야 하죠. 그런데 이번 작업은 좀 색달랐어요. 우리가 좀 더 편하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었죠. 팀원인 세 명의 연구원도 이 과정에 너무 흥미롭게 몰입하더라고요. 산업디자인과 공예가 크로스오버된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특히 여주 작업실 갈 때는 수학여행 가는 기분이었어요. 기업과 협업할 땐 의견을 발표하고 관철시켜야 하니 소리를 지르며 얘기할 때도 많은데, 그에 비하면 정말 평화롭고 흥미로운 작업이었죠. 연구원들도 더 큰 애착을 느끼는 것 같아요.
하단의 스탠드 부분 형태도 풍선 디자인과 세라믹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와 논의를 거쳐 결정했다. 각지거나 둥그런 모양이 아닌, 모서리 부분을 둥그스름하게 처리한 것.
얘기를 나누는 사이 풍선 스피커에서 조용한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유명 메이커의 오디오 시스템에서 느끼는 웅장함이나 화려함엔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꼭 하나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 있는 두 아티스트의 협업작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붙어서만은 아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들이 공유한 즐거움에 감화되는 듯했다.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예쁜 꿈도 꾸던’ 어린 시절이 생각날 것 같기도 하고, 상상력을 자극할 것 같기도, 또 무심한 일상이 조금은 신선해질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들은 함께 탄생시킨 첫 결과물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오랜만에 “심장을 뛰게 하는” 작업이었다고 말하는 황성걸 교수의 말에 깊은 공감을 표현하던 김선미 작가가 다시 한 번 즐거운 기억을 더듬었다. “추억거리를 만들자는 우리의 첫 번째 의도는 이룬 셈이에요. 저와 황교수뿐 아니라 이 작업을 도와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과의 양나영, 김수민, 박규상 연구원과 제 작업실의 이진혁 실장까지, 이번 작업을 위해 모인 스태프들의 이름을 빼놓지 않고 말하고 싶네요. 함께 유쾌한 추억을 공유하게 되었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저희에겐 그 어떤 것보다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 도예가와 산업 디자이너의 협업 풍선 스피커에 추억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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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을 빚는 도예가 김선미, 산업 전반에 걸쳐 기능적 디자인을 생산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홍익대 산업디자인과 교수 황성걸. 이 두 아티스트가 머리와 마음을 맞대어 아주 흥미로운 작품을 탄생시켰다. 세라믹 소재로 만든 풍선 스피커가 그 주인공. 세라믹 소재지만 전형적 도자기는 아니고, 스피커지만 기계적 속성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 작품은 눈과 귀로 느끼는 물성이나 소리만이 전부가 아니다. ‘추억’을 빚어냈기 때문이다.#풍선스피커 #김선미 #황성걸 #도자기스피커글 이정주 | 사진 김동오 | 사진 제공 김선미, 황성걸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