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묘사한 여러 장면 중 가장 완벽한 것을 꼽는다면 세계인의 고전 <성경>에서 주인공이 “다 이루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바로 그 장면이 아닐까. 남이 보기에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는가를 떠나 오직 자신만 아는 시간과 경험의 퇴적이 숭고할 정도로 차올라 후회나 아쉬움의 갈증 없이 자신을 초월하고 영혼이 만족스러운 상태에서 저절로 나오는 탄성이라고 상상해 보지만, 사람의 생애에서 그 느낌을 누리기란 좀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수석 무용가와 발레 행정가
“은퇴가 제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한국과 독일에서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그저 박수를 ‘짝짝짝’ 치려고 하는 공연입니다. 그거면 돼요. 왜냐하면 풍부하게 살았으니까요. 마지막까지 무대에서 단 한 번의 콤플렉스도 느껴본 적 없고 그래서 후배들에게 제가 가진 것 이상으로 다 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자기가 실컷 해보고 실컷 만족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느낌이죠.”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현역 수석 발레리나인 강수진. 그는 2년 전 한국의 국립발레단 단장직 요청을 수락하면서 2015년 11월에 한국에서, 2016년 7월 슈투트가르트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발레 무대에서 은퇴한다고 세상에 알렸다. 일부러 그리 맞춘 것은 아니지만 2016년은 1967년생인 그가 한국 나이로 쉰이 되고, 3년 임기의 국립발레단 단장직 임기가 끝나는 해이며,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원으로 활동한 지 30년째 되는 해이니 그동안 발레리나 강수진으로 자신을 사랑해준 세계의 발레 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에 여러모로 적절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슈투트가르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발레단 단장이란 새롭고 복잡한 일을 하는 동시에 은퇴 공연까지 준비하는 건 너무 힘들 것이라고 지인들이 걱정했다. 하지만 발레리나 강수진에게 큰 사랑을 보내준 한국에, 발레리나 강수진을 만들어준 독일에 감사를 전하고 싶어 매일 이른 아침마다 짧은 시간에 고도의 집중력과 에너지를 쏟는 개인 연습을 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로 지내온 생활 방식 그대로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강점인 스토리 발레 작품은 내성적인 그에게 새로운 표현과 경험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비극의 주인공이었다가 말괄량이 아가씨로 변하기도 하며 무대 위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볼 수 있었다.
새벽 5시경 눈을 떠서 커피 머신과 사우나 스위치를 올리고, 20여 분 정도 사우나를 한 뒤 두 시간 동안 아침 트레이닝을 한다. 아침 식사와 샤워를 간단히 마치고 극장에 출근하면 다른 무용수들이 옷을 갈아입고 몸을 푸는 클래스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연습량과 격이 동료 무용수들과 현저한 차이가 나는 만큼 그의 기본기는 탄탄했고, 거기에 어릴 적 배운 한국무용의 선과 동양의 정서가 깃든 특유의 표현력까지 더해지니 그의 무대는 완벽했으며 독창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서전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에서 이를 “나를 먹여 살린 아침 트레이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클래스를 마치고 간단한 샐러드로 점심 식사를 한 후에는 본격적인 행정과 예술감독 업무를 한다.
처음 해보는 행정 업무지만 직원에게 물어 배운 것을 발레 연습하듯 밤늦게까지 학습해 어느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발레 행정가 무와 은퇴 공연을 준비하느라 생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집중력과 에너지를 쓰며 또 한 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오전 11시, 국립발레단 단원들의 클래스. 부임한 첫해에는 <베토벤 교향곡 7번>과 <봄의 제전>을 선택해 단원들에게 발레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팀워크와 테크닉 향상의 중요성을 깨우쳐주었고, 올해에는 코미디풍의 스토리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골라 단원 한 명 한 명의 테크닉과 표현력을 끌어올리고 있는 강수진 단장. 그가 한쪽 구석에 서서 단원들과 함께 클래스를 하고 있다. 슈투트가르트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에 일어나 트레이닝을 하고 고도로 집중한 개인 연습을 한껏 한 상태에서 젊은 후배들과 또다시 하는 클래스다. 자신의 동작을 연습하면서 세계 최고 발레리나의 연습 장면을 지켜볼 수 있으니 이 자체로도 훌륭한 교과서이지만, 후배들에게는 이 클래스가 마흔 아홉에도 여전히 현역인 세계 발레계의 살아 있는 전설에게 오늘의 첫 연습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값진 교훈일 테다.
1999년에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우스 여성 무용수상을, 2007년에는 독일의 카머탄체린 칭호를 받았다, 궁정 무용가로 선정되었고 존 프랭코상도 수상했다.
풍부한 인생 뒤 다 줄 수 있는 여유
“평생 한 분야에서 이름을 떨쳤어도 아쉬워하고, 그 느낌을 더 간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많이 봤어요. 하지만 마리카 선생님 같은 좋은 분은 저에게 그렇게 많은 걸 주셨는데도 바라는게 없으셨죠. 저와 남편 역시 선생님이든 부모든 줄 때는 그냥 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발레단원이나 자식이 그걸 받으면 그냥 그분들 것이고요. 받은 것을 어떻게 하는가는 그들의 선택이자 재능이에요. 많은 선생님 중에는 ‘내 제자, 내가 만든 제자’라고 말씀하는 분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돌려받을 생각을 하면 진정한 선생님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단원들의 손끝 움직임 하나까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의논하면서 강수진 단장은 후배들이 어제의 자기 자신을 한 단계 뛰어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전율을 느낀다. 누군가 알려준 것을 연습하고 또 연습해 자신의 것으로 승화할 때 그 무용수가 스스로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제자, 내가 만든 제자”라는 식의 말을 할 수가 없고, 성공한 무용수가 선생님과 영광을 나누는데도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인사면 서로의 마음이 충분히 전달된다. 또 발레 연습을 할 때 경쟁자를 의식하거나 오직 프리마돈나만 꿈꿀 필요도 없다. 하루하루 자신만 아는 목표를 세우고 매일 조금씩 뛰어넘으면 어느새 스스로 발전해 있을 것이다. 그 발전이 명예를 가져다준다는 이치를 모르면 화려한 테크닉에만 치중하다가 사라지기 쉽다.
강수진 단장은 인터뷰 중간에 “발레를 그만두면 정신의학자가 될 것 같아요”라는 농담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발레를 잘하는 소녀들이 모여 기숙사 생활을 하는 모나코의 왕립발레학교를 거쳐 세계 5대 발레단 중 하나로 세계적인 대회의 수상자들이 수두룩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수석 무용수가 되는 과정은 이처럼 인생의 이치를 알아가는 것이었다. 또 이런 이치를 이해하는 인격이 발레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세월이었다.
파트너와의 호흡과 팀워크는 발레의 중요 요소. 이번 은퇴 공연에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이자 그의 오랜 파트너인 제이슨 레일리가 함께 한다.
“세계 최고 발레단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최고수만 모여 있으니 시기와 질투하는 방식이 저마다 달라요. 이건 모든 나라 사람이 공통적으로 지닌 본능이죠. 하지만 어떤 식으로 가정교육을 받았는지, 어떤 선생님 밑에서 교육받았는지에 따라 그 본능을 다스리는 법을 알게 돼요. 그래서 교육이 중요합니다. 제자든 자녀든 공부만 시킬 게 아니라 인간성을 키우는 데도 시간을 들여야 해요. 발레 세계에서도 발레 테크닉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성품이 부족하면 언젠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단원과 함께 생활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주변 사람이 힘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장 힘들어요.”
이런 이유로 세계의 유명 발레 학교에서도 인성 교육을 중요시한다. 연습을 하는 중에도 누군가 들어오면 잠시 멈추고 인사를 하도록 가르치는 등 예절 교육을 한다. 한국무용을 하다가 선생님이 “발레 해볼 사람?” 하고 물을 때 손을 들어 중학교 2학년이라는 아주 늦은 나이에 발레를 시작한 그를 가능성만 보고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로 데려간 마리카 베소브라소바Marika Besobrasova 교장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레이스 켈리 왕비가 설립한 세계 최고의 발레 학교에 모인 소녀들에게 교장 선생님은 “발레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작업이기 때문에 진짜 훌륭한 발레 동작이 나오려면 그 전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2년, 감수성이 풍부하고 내성적이던 강수진 단장은 모나코에 도착하면서 언어, 음식, 문화는 물론 발레 스텝도 모르는 갓난아이가 되어버렸다. 발레 신동들의 놀림과 질투에 시달렸지만 밤마다 혼자 몰래 연습실에 가서 달밤의 혹독한 훈련으로 1년 만에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의 장학생이 되었고, 그해에는 뉴욕에서 열린 특별한 로잔 콩쿠르에서 1위를 해 세계 발레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그때 뉴욕 발레계의 화려한 제안이 밀려들었지만 마리카 교장 선생님은 그를 설득해 다시 모나코로 돌아오게 했다. 잠깐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랑받는 발레리나가 되려면 익혀야 할 게 아직도 많다는 가르침이었다.
발레단 선배인 남편은 강수진 단장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늘 연습만 하는 그에게서 인생의 중요한 과도기를 지나는 비장함과 결연함이 엿보여 오랜 기간 기다려주었다.
모나코로 돌아온 후 강수진 단장은 학생 중에는 처음으로 마리카 교장 선생님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도록 프랑스어와 영어 과외 공부를 시켰고, 주말이면 강수진 단장과 자신의 애견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모나코는 물론 유럽 각지의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데려가 예술 작품을 접하게 했다. 집에서 식사할 때도 정찬의 테이블 매너를 알려주었고, 그 유명한 호텔 드 파리의 레스토랑에 일부러 데려가 최고급 식문화를 경험하게 했다. 발레 거장의 집이라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제자들이 수시로 찾아왔으니 함께 살고 있던 강수진 단장은 전설적 예술가들이 대화하고 사교하는 것도 곁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으며 자연스레 그들의 생각과 철학도 배웠다. 세계적 발레리나가 갖추어야 할 면모와 예술을 대하는 바른 태도까지 알려주려는 마리카 ‘할머니’의 따뜻한 가정교육이자, 제자에게 바라는 것 없이 전부를 주려는 ‘교장 선생님’의 진심 어린 교육이었던 것이다.
오늘 하루와 성공한 인생
이후 강수진 단장은 열여덟 살에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최연소’라는 자랑스러운 타이틀을 달고 입단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야말로 세계 최고 무용수들이 그곳에 포진해 있었고, 가장 낮은 위치의 무용수가 맡는 배역인 군무만 하는 세월이 10년이나 지속됐다. 모나코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겨우 익혔는데 이제는 독일에서의 생활. 또다시 독일어라는 언어와 문화 장벽에 부딪혔고 무대에서 들러리만 하는 것 같아서 실의에 빠졌다. 모나코에서는 힘들고 생소해 먹지를 못했는데, 이곳에서는 지치고 두려워 오히려 폭식을 했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잘것없는 배역도 내가 만족할 만큼 최선을 다하면 주역과 진배없다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랬더니 다른 무용수가 아니라 어제보다 좀 더 나은 동작을 해야 하는 자기 자신이 경쟁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발레리나 강수진의 하루 경영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어제보다 점프를 1초라도 더 할 수 있는, 어제보다 어려운 동작을 한 번이라도 더 하는 오늘의 계획을 세우고 마음에 들 때까지 연습했다. 그런 계획을 해내는 하루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사람마다 행복을 정의하는 게 다 다릅니다. 그래서 제 인생 이야기가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하루 스물네 시간만 열심히 살면 그게 제일 행복해요. 어느 날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컨디션이 꽝이에요. 그런데도 저녁까지 할 일을 다 하고 살아남았으면 그걸로 충분하고 행복해요. 이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배운 거예요. 젊을 땐 하루 계획에 할 일을 더 많이 넣어서 그걸 못 해내면 우울하고 힘들었죠.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할 수 있을 만큼 하루 계획을 세운다면 다 해낼 수 있고, 그러면 만족스럽고 행복한 날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1986년에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한 이후 강수진 단장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트레이닝과 개인 연습을 하고 극장에서 밤 11시까지 연습을 거듭하면서 늘 어제보다 기량이 더 나아진 오늘의 발레리나로 변신했다. 동작과 테크닉만 어제보다 나아지는 게 아니라 표현과 감수성도 날마다 깨어났다. 그 사이 배역이 군무에서 하프 솔로, 솔로로 차근차근 올라갔고 1997년에 수석 무용수가 되었다. 슈투트가르트 시내를 다니는 버스에 그의 사진이 내걸렸고, 지금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만든 위대한 안무가 존 크랭코John Cranko의 작품 <오네긴Onegin>을 공연할 때는 반복 훈련으로 쌓은 탄탄한 테크닉이 그의 원래 성격인 수줍은 연기와 만나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 공연 이후 슈투트가르트의 꽃집에서는 노란색 난에 ‘수진 강’이라는 이름을 붙여 팔았고, 거리에서는 시민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으며 꼬마들이 뒤따라오곤 했다.
1986년에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했고 긴 군무 기간을 거쳐 1994년에 솔리스트로 선발되었다. 1997년부터 수석 무용수가 되었고 지금도 그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
서른두 살이 되던 1999년에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춘희(La Dame Camelias)>를 발레로 재해석한 <카멜리아 레이디>로 무용계의 아카데미 상인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ce’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을 수상해 절정을 맞았다. 옷을 거꾸로 입고 간 것도 모른 채 연습에 매진하며 어제의 자신보다 좀 더 나아진 오늘의 자신을 찾는 데 몰두한 열정에 대한 눈부신 화답이었다.
우주의 미물과 아주 특별한 사람
1999년, 인생의 최악의 순간도 그해에 찾아왔다. 긴 군무 생활을 견디고 ‘슈투트가르트의 강수진’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에게 당장 연습을 중단하지 않으면 발레를 못 하게 될 것이라는 의사의 선고가 내려진 것이다. 정강이뼈가 골절되어 1년 이상의 재활 치료가 필요하며, 그 기간에는 발레를 할 수 없다는 냉정하고 이성적 설명이었다. 젊은 도전자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발레단에서 다른 무용수는 은퇴를 생각하는 서른둘의 나이에 수석 무용수로 절정을 맞은 그는 자서전에서 그때의 기분을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억울했다”라고 표현할 만큼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사실 통증은 5년 전부터 있었지만, 아픈 발레리나에게는 배역을 주지 않을까봐 발레단에 알리지 않았다. 그 상태로 매일 혹독한 연습을 했고 주연이 되어 배역을 다 소화해내느라 그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연습을 해보려고 해도 비명이 나올 정도로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으니 최고 자리에서 맞닥뜨린 절벽 앞에서 죽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곁에는 “지금 치료하고 쉬면 1년 후에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는 50%의 희망이 있지만, 지금 계속 춤을 추면 앞으로 평생 춤을 추지 못할지도 모른다”라며 ‘내려놓음’의 가치를 알려준 남편이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남편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자신에게 혹독한 훈련을 시키던 발레 선배인 동시에 부상으로 발레를 중단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아내의 좌절이 얼마나 깊은지 가장 잘 이해하는 동료였으며, 내려놓는 마음이 좌절을 극복하는 치료법이라는 지혜를 알고 있는 인생의 선배이기도 했다. 유학을 오기 전 “수진아, 우주에서 보면 우리는 아주 작은 미물에 불과하단다”라고 늘 일러주시던 아버지와 삼촌의 가정교육도 도움이 되었다. 한국에서 “인생은 거기서 거기더라”고 “빈 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가는 게 인생”이라고 하시던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래, 우주에서 보면 이토록 작은 우리니 지금 이것을 내려놓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남편의 격려와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내려놓음을 받아들이자 그제야 혼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상태가 급격히 호전되면 무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연습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아픈 부위에 무리를 주지 않으려고 침대에 누워서도 매일 스트레칭과 발레 동작을 반복했고, 남편이 자신만을 위해 특별히 개발한 스트레칭법으로 꾸준히 재활 훈련을 했다.
한국에 와서 새로 가족이 된 강아지 써니와 함께. 은퇴 이후 남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상상은 그에게 흥미로운 기분이 들게 한다. 남편의 건강을 챙기는 데 더 신경 쓰고, 언젠가 이집트 사막에서 말을 탔는데 그 느낌이 좋아서 그런 취미 생활도 해보고 싶다.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넓은 바깥으로 나가면 우리는 마이크로보다 작은 존재라고 하시던 아버지 말씀을 생각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특별하다!’ 이 말을 이해하는 동시에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겁니다. 우주에서 볼 때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를 만큼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지만 내가 살아가고 있는 와중에는 ‘예스, 우리 모두는 섬바디somebody!’라고 생각하는 밸런스가 중요하지요. 젊을 때는 이걸 알아도 힘든 생각에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지만 많은 경험을 하면서 이것보다 더 나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만큼인 건 행운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죠.” 1년 뒤, 그가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탄탄한 테크닉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고 표현력과 연기는 이전보다 더욱 성숙해졌다. 그의 복귀 무대가 끝나자 관객은 예전보다 더 열렬한 박수를 보냈고, 2007년에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는 역사상 세 번째로 독일이 국가적으로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는 최고 예술가를 뜻하는 공식 칭호인 ‘카머탄체린Kammertanzerin 강수진’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신체와 동작의 밸런스가 중요하고, 연습을 하면서 이 밸런스를 키울 수 있어서 일반인에게도 인기가 높은 발레. 하지만 강수진 단장이 발견한 발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밸런스는 우주의 작은 존재지만 남과 다른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의 밸런스였다. 삶의 이치를 이해하는 이 생각이 강수진 단장을 경쟁자와 비슷해지는 대신 어제의 자신보다 더 나아지는 훈련으로 이끌었고, 그런 훈련의 결과는 손동작만 봐도 ‘강수진 발레’인지 알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발레를 만들어냈다. 바로 이 점이 발레리나 강수진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한 명의 특별한 발레리나, 세기의 발레리나라고 칭송받는 이유다.
“후배나 자녀에게 누구처럼 되어라, 누구와는 놀지 마라는 식으로 가르치는게 가장 치명적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닮고 싶은 발레리나가 없었어요. 어릴 때부터 누구 닮았다는 말을 듣는 것도 싫었죠. 뭐든 내가 되고 싶은 걸 찾는 재미에 살았고, 그러니 기존 작품이든 창작 작품이든 저한테는 다 똑같았어요. 스텝 하나하나를 내 것으로 만들면 되니까요.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니 제가 모두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는 없겠지만, 제 생각엔 ‘유니크’하게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누구처럼 되면 기억에 잘 남지 않지만 유니크한 사람은 기억하거든요. 남과 다르게 해보려고 하면 스스로 발전하게 되고 그런 사람이 오래 남게 되지요.”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기에 모든 발레 작품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단 하나의 콤플렉스도 마음에 남기지 않은 사람, 그래서 후배에게 바라는 것 없이 모든 걸 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예술가, 최선을 다해 마지막 공연을 하고도 ‘짝짝짝’ 경쾌한 박수 세 번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하는 사람. 그가 오는 11월 6일부터 8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존경하는 존 크랭코의 스토리 발레 작품 <오네긴>으로 발레 인생을 지켜봐준 한국 관객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의 생일인 내년 7월 22일, 슈투트가르트의 오페라극장에서 하는 마지막 공연으로 은퇴를 한다. “오늘 하루만 만족스럽게 살아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스스로 얻는 보람이 가장 큰 행복이다. 재미있는 게 없다고 핑계 대지 말고 무엇이든 일단 해보라. 그리고 혹시 무언가를 재미있게 느꼈다면 더 열심히 해서 당신 스스로 특별한 존재가 되어보라”는 인생의 지혜, 세기의 발레리나가 마지막으로 할 커튼콜에는 이 아름다운 인사가 담겨 있다.
-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 스스로 특별한 존재가 된 발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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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발레리나 강수진이 오는 11월 한국과 내년 7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그가 존경하는 안무가의 작품 <오네긴>으로 은퇴 공연을 한다. 열다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발레를 시작해 세계 최고 발레단에서 수석 무용수로 30년간 발레를 해온 그의 인생에는 스스로 피워낸 ‘수진 강’이라는 세상에 없는 꽃말이 새겨져 있다.#강수진 #오네긴 #슈투트가르트발레단글 김민정 기자 | 사진 민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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