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우뮤지움 동네미술관 옥상의 스튜디오. 아이들은 벽, 바닥 어디에든 마음껏 그림을 그린다.
멘토 건축가를 만나다
보물을 얻으려면 먼저 보물 지도를 구해야 한다. 보물 같은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보물 지도를 찾는 심정으로 한 건축가를 찾아갔다. 그녀를 만나러 여섯 시간의 비행 끝에 태국 민부리에 도착했다. 내가 만난 건축가, 빠따마 룬락윗Patama Roonrakwit은 태국과 일본에 있는 ‘CASE(Community Architects for Shelter and Environment)’ 건축사무소 소장이다. 나는 지금껏 빠따마처럼 사람 중심의 건축을 하는 이를 만난 적이 없다. 그녀를 만나기 전 예감했지만, 몇 마디 나누자마자 애타게 그리던 보물 지도를 찾았음을 확신했다. 내가 꿈꾸던 보물은 어린이에게 좋은 공간이 되는 미술관을 만드는 일. 2013년 싱가포르 비엔날레 출품작을 보았을 뿐 그녀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빠따마 소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헬로우뮤지움 동네미술관은 지금 모습과 달랐을 것이다.
빠따마의 건축설계 과정은 경제 논리로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올 만큼 긴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 하지만 빠따마는 이렇게 말한다. “건축가의 실수를 다시 되돌리는 데 사용해야 하는 비용과 시간이 내게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만들고, 그곳에 살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지요.” 금호동에 들어설 헬로우뮤지움의 주인공이 될 어린이들에 대한 사전 연구는 충분히 했고, 다만 연구 과정에서 발견한 니즈needs를 어떻게 공간에 반영할 것인가가 나의 미싱 링크였다. 빠따마와 함께 1백 년 된 민부리 옛 시장으로 걸었다. 상권이 붕괴된 폐허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가족과 아이들을 위해 빠따마는 놀이터와 도서관 그리고 공동 부엌을 만들었다. 빠따마의 도시 빈민을 위한 주택 건축, 어린이와 함께 만드는 놀이터 그리고 쓰나미 피해 지역 복구를 위한 보호소 짓기 프로젝트는 모두 커뮤니티 건축의 일환으로 만들었다. 마을에 도로를 만들기 전 주민들과 먼저 상의하고, 정부의 예산 지원이 아닌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직접 비용을 치르며 주인 의식을 가지고 함께 길을 만든다. 그의 건축은 높고 화려한 건물을 세우는 일과는 완전히 다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빠따마는 건축에서 지식이나 기술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람과 함께 디자인하는 과정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태국 민부리의 ‘CASE Studio’에서 상의 중인 빠따마 룬락윗 소장과 헬로우뮤지움 김이삭 관장.
금호동에 문을 연 헬로우뮤지움 분관은 ‘집 앞 놀이터 같은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지역의 스토리와 동네 아이들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공간이다. 빠따마와 미팅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미술관 큐레이터, 에듀케이터들과 미술관 주변을 돌아다니며 지도를 그렸다. 주민들의 동선을 알아야 정문과 간판의 위치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들은 공사 전 이 오래된 건물에 가장 먼저 초대됐다. 옥상에 수영장과 눈썰매장을 만들자는 수용하기 어려운 바람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이미 공간의 주인이 되어 미술관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어린이 수영장 말고 어른 수영장에 가고 싶어요.
어린이 미술관 말고, 그냥 미술관에 갈래요.” 그래서 헬로우뮤지움은 어린이미술관에서 동네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바닥에 눕고 싶고, 작가의 그림 위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 아이들의 바람이 헬로우뮤지움 동네 미술관에서 현실화됐다. 진정 어린이를 위한 좋은 공간이라면 유혹과 재미가 아닌 자유와 순수를 줘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도 보물을 찾는 일은 당분간 계속될 예정이다.
글 김이삭(헬로우뮤지움 관장)
헬로우뮤지움 동네미술관 1층에 전시 중인 홍장오 작가의 ‘146개 UFO’. 눕거나 앉아서 마음껏 만지며 놀 수 있는 놀이터 같은 공간.
금호동에 의한, 금호동을 위한
지난 8월 8일 성동구 금호동에 문을 연 국내 첫 ‘동네미술관’은 어린이미술관 헬로우뮤지움이 선보이는 동네미술관 프로젝트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2007년 헬로우뮤지움 개관 당시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다양한 전시 기획과 체험 프로그램으로 강남 지역의 학부모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지만 한계도 있었다. 김이삭 관장이 새로운 형태의 미술관 분관을 생각한 건 그 때문이다. “처음 헬로우뮤지움을 개관했을 때 목적과는 달리 헬로우뮤지움을 미술 학원이나 학교 교육을 돕는 선진 예술 교육 등 일종의 사교육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오해가 생겼어요.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아이들과 예술을 통해 소통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금호동에 ‘동네미술관’을 열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왜 금호동일까? 김이삭 관장은 금호동의 지역적 특색에 착안했다고 말한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갤러리는 거의 대부분 종로구와 강남구에 밀집해 있고, 굳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지 않고 유명 편집매장이나 부티크에서도 아티스트와 협업한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만, 이 또한 특정 지역이나 소비 계층에 해당하는 말이라는 것. “사실상 금호동은 문화적 불모지와도 같아요. 이 지역에서는 문화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지요. 하지만 금호동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간직한 동네예요. 사대문 밖 지역의 근대화 과정 모습을 고스란히 품은 곳이기도 하고요.” 김 관장이 금호동을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통계적으로 어린이와 가족 수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최근 재개발로 오래된 주택가와 아파트 단지가 뒤섞이면서 아이들이 놀던 골목길이나 공터 같은 공간들이 사라졌다. 김이삭 관장은 이런 지역에 어린이를 위한 쉼터이자 놀이터, 문화적 역할까지 동시에 할 수 있는 비영리 기관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사립 미술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지하 공간에 전시 중인 홍장오 작가의 ‘비행접시’.
사설 어린이미술관 운영 경험과 노하우는 있지만, 처음 동네미술관 건립을 추진하면서 비영리 기관으로서 취약점도 있었다. 미술관 운영과 관리, 유지를 위한 재정적 측면뿐 아니라 마케팅, 홍보 등 전략적 측면에서도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했다. 방법을 모색하던 중 김이삭 관장에게 ‘C프로그램’에서 연락이 왔다. C프로그램은 벤처 1세대 기업인들의 기부 펀드 프로그램. NXC 김정주 대표, 네이버 이사회 의장 이해진, 다음카카오 이사회 의장 김범수, 엔씨소프트 대표 김택진, 다음 창업자 이재웅 씨가 다음 세대를 위한 의미 있는 기부를 하자는 데 뜻을 모아 지난해 5월 설립한 회사다. “재정적 후원에 더해 전반적 경영 컨설팅에 대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마케팅ㆍ홍보 관련 많은 세부적 사항까지 함께 고민하면서 ‘파트너’가 되었지요.” 제 2, 3의 동네미술관도 C프로그램과 연계해 각 지역의 정체성에 입각해서 건립할 계획이다.
김이삭 관장이 역삼동에서 금호동으로 둥지를 옮기면서 가장 놀란 것은 우리 주변에 문화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미술관, 박물관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분이 이렇게나 많은 줄 몰랐지요. 미국의 박물관에서 일할 때 그곳의 주요 관객층은 시간적ㆍ경제적 여유가 있는 60대 이상의 백인 노년층이었는데, 조손 가정이 많은 금호동에 와서 보니 우리나라 실버 계층은 문화를 향유할 기회 자체가 너무 적었습니다.” 그래서 김 관장은 어린이뿐 아니라 노인에게도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문화적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동네 주민들을 위해 매주 수요일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오면 관람료 무료’ 정책을 시행 중이다. 관람료 역시 5천 원으로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했다. “우리 사회 전체가 얼마나 단절되어 있고, 큰 격차가 있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미술관의 개념 자체를 잘 모르는 관객을 대상으로 동네미술관을 운영한다는 건 관장인 저에게도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계기지요.”
헬로우뮤지움 동네미술관의 김이삭 관장.
어린이의 바람을 담은 재생 건축
1970년대에 지어 개인 병원으로 사용하다 수년간 비어 있던 2층짜리 건물이 지하, 1층과 2층, 제대로 된 옥상까지 갖춘 동네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는 정이삭 건축가의 재능 기부가 있었다. 또한 동네미술관답게 공간 구상을 위해 어린이의 생각과 의견을 듣고자 지난 5월, ‘어린이 건축 워크숍’을 열기도 했다. 대부분의 어린이가 미술관에 대해 “부자가 가는 곳”이라고 답하거나 개념이 없는 상태였지만 “애완견과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수영장이 있으면 좋겠다” 같은 재미있고 다양한 답변이 돌아왔다. 타깃 관객인 5~9세의 어린이뿐 아니라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이 쾌적한 공간에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현관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록 했다. 미술관 곳곳에 큰 창을 내어 외부와 단절되지 않는 공간을 추구했고, 스스로 동선을 선택하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작품 배치에 신경 썼다. “미술관을 운영해보니 하나의 넓은 공간은 기능적이지 못하더군요. 소규모 인원(5~10명)으로 관람 예약을 해서 편하게 바닥에 둘러앉아 작품을 보길 권해요. 2층의 체험 학습 스튜디오에서는 아이들이 만들기를 하는데, 재료가 많이 필요해 미술관 곳곳에 수납공간이 많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인 옥상은 열린 스튜디오, 예술 놀이터로 만들었다. 아이들이 지하와 1층, 2층에서 작가들의 상상력을 느끼고 체험한 후 옥상에 올라가 마음에 담아두었던 상상 속의 이미지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는 게 김 관장의 설명이다.
2층에 마련된 체험 학습 스튜디오. 아이들은 미리 준비해놓은 재료로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기를 한다.
강영민 작가의 하트 연작. ‘Star Pokes Heart’ ‘Fever’ ’Love is terror’.
9월 30일까지 열리는 개관전 <놀이시작>에 참여한 작가는 총 네명. 강영민 작가의 ‘Sleeping Heart’를 비롯한 하트 연작, 오유경 작가의 ‘움직이는 도시’, 홍장오 작가의 ‘비행접시’, 홍순명 작가의 ‘사소한 기념비’ 연작을 전시 중이다. 10월 초에는 어린이를 위한 아트 페어를 개최할 예정이다. 연말에는 <관계의 미학>이라는 전시를, 내년 8월에는 개관 1주년을 맞아 ‘한국구술사네트워크’와 함께 기획 전시를 구상 중이다. “역사나 언어로 정리되지 않은, 지역 주민들의 기억 속에 저장된 이야기를 토대로 작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보자는 기획이에요. 전시 서평이나 전시 방향에 대해서는 정신건강 전문의 하지현 박사에게 많은 자문을 받고 있지요.”
김이삭 관장은 지금까지의 미술관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을 어떻게 잘 보여주느냐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제는 지금,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중심을 찾아 그것을 작품으로 보여줄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 동시대 미술관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서구 문화 중심의 화이트 큐브 현대미술관에서 벗어나 다음 세대를 위한 넥스트 뮤지엄 형태를 추구하는 것. 단순히 대안적 공간으로 치부될 수 있는 동네미술관의 비전문적ㆍ자치적 성격에서 벗어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어린이미술관과 동네미술관을 만들어가는 것이 김이삭 관장의 목표이자 꿈이다.
- 집 앞 놀이터 같은 미술관
-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재개발 구역이 뒤섞인, 과거와 현재가 한데 어우러져 어느 때보다 역동적 에너지가 넘치는 금호동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미술관이 생겼다. 신발 벗고 들어가 누울 수 있는 미술관, 오감을 풀어놓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미술관, 할머니와 손자가 손잡고 갈 수 있는 미술관, 바로 헬로우뮤지움이 만든 첫 번째 동네미술관이다.#헬로우뮤지움 #동네미술관 #어린이건축워크숍 #김이삭글 유주희 기자 | 사진 민희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