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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눈 맞춤] 두 개의 우주가 마주 보던 그때
두 사람이 4분간 눈을 떼지 않고 서로 바라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지난겨울 <뉴욕타임스>의 칼럼이 심리학자 아서 에런Arthor Aron의 ‘4분간 눈 맞춤을 하면 관계가 더욱 깊 어진다’는 신기한 이론을 소개했습니다. 그 내용이 궁금하면 유튜브에서 동영상 ‘How To Connect With Anyone’을 찾아보세요. 낯선 남녀, 네 번 데이트한 연인, 1년간 사귄 커플, 아기를 낳은 커플, 중년 부부, 55년을 함께 산 노부부의 실험이 나옵니다. 참가자들은 처음엔 눈 맞추기를 쑥스러워하지만, 서로 바라보며 시간이 흐르자 활짝 웃고, “아내와 눈 맞추는 게 이렇게 멋진 일인지 이제야 알았다”며 무릎을 치고, 상대와 예전처럼 입 맞추고 싶어하지요. 4분이 지나자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껴안고 손을 어루만지고 함께 춤추는 멋진 장면으로 끝나는 이 동영상은 5백만여 명이 시청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사랑하고 싶고, 관계를 회복하고 싶고, 더욱 아껴주고 싶은 누군가가 있나요? 그 사람과 조용히 눈 맞춰보세요. 가족은 물론 반려견과 내가 사는 도시까지, 우리가 주변과 눈 맞춤을 해야 하는 속 깊은 이유를 소개합니다.

© Marco Anelli, Marina with Ulay at MoMA, 2010

뉴욕 맨해튼 5번가에 위치한 뉴욕 현대미술관(MoMA). 2010년이었다. 분홍 벚꽃이 센트럴파크를 혼곤하게 물들이던 때, 자정이면 열혈 뉴요커들이 모마MoMA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노숙을 작정하고 미술관 담벼락을 따라 줄지어 자리를 잡았다. 밤이슬이 소름 돋게 하여도, 콘크리트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와도 그들을 막을 순 없었다. 한 달 넘도록 이어진 행렬이다. 목적은 단 하나, 21세기 최고의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 앞에 눈 맞추며 앉기 위해서다. 무엇을 찾고자 한 것일까?

2010년 3월 14일부터 5월 31일까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전시가 벌어졌다. 한 행위 예술가가 자신의 40여 년 예술 인생 회고전을 개최한 것이다. 순간에 벌어졌다 사라지는 행위 예술을 회고한다는 시도였다. 그 시도에 대한 답은 선발한 서른다섯 명의 예술가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작업을 재현하는 것과 기록된 영상을 통한 간접 체험을 하는 것으로 찾았다. 그리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심연에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는 그녀가 새 작업을 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한밤의 행렬은 바로 그 새 작품 로 향하는 기다림이다.

작가는 매일 아침 10시 30분부터 미술관 아트리움 중앙에 앉아 관객을 맞았다. 관객은 아무런 시간 제약 없이 작가 앞에 순서대로 앉는다. 5분, 20분, 한시간, 두 시간, 일곱 시간을 앉은 이들이 속출했다. 그는 75일 동안 7백16시간 30분을 1천5백45명과 마주했다. 물도 마시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관객과 함께했다. 8백50여만 명이 이곳을 찾았다. 이는 뉴욕 시민이 모두 왔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 숫자다.

서로 의자에 앉아 마주 보는 퍼포먼스는 삽시간에 미 대륙을 가로질러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로 대서특필되었다. 전 세계 미술 애호가의 이목도 끌어당겼다(당시 영상들을 현재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조회 수가 6천만이 넘는다).

회고전 마지막 날, 도저히 놓칠 수 없어 뉴욕으로 날아갔다. 눈으로, 몸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다 한들 이제 현대미술가들은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고행까지 하며 기록경기 같은 퍼포먼스를 해야 하나 싶은 뒤틀린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진실은 가장 단순하게 절제된 행동 속에서 개인 대 개인이라는 거대한 두 우주가 마주해 폭발하는 그야말로 장엄한 소통이었다. 마리나가 거울이 되어 관객의 내면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마주 앉은 이가 자신을 직시하도록 집중의 불을 지폈다. 간혹 가슴에 손을 대고 어깨를 움츠리는 마리나의 모습에서 상대의 고통까지 나누는 헌신을 보았다. 마주한 관객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보는 이들도 먹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해 11월과 다음 해 3월 마리나를 인터뷰했다.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위해 그 같은 고통의 시간을 준비했느냐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조건 없이 사랑을 준다는 아이디어죠. 평가하지 않는 사랑요. 그들의 영혼을 볼 수 있었어요. 오래 앉아 있을수록 더 깊은 마음 상태로 들어가고, 상대는 내 에너지를 더 많이 느낍니다. 그들과 나의 삶을 진정으로 바꿔내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럼, 마리나 앞에 앉고자 몰려든 엄청난 인파의 진실은 무엇일까? 마리나로부터 흥미로운 답이 돌아왔다.

“그곳이 뉴욕이라서 그래요. 넌더리 나는 도시라서요. 누구도 눈을 마주치지 않죠. 넋을 놓고 잰걸음에 휩쓸려 지하철을 타고 일터로 갔다가 집으로 가는걸 반복합니다. 현대인은 자연의 에너지와 연결된 끈을 놓쳐버렸습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도 관계가 끊겼어요. 테크놀로지와 스피드가 지배하는 도시에 살면서 자신의 내면과는 소통하지 않는 완전한 단절이죠. 예술가로서 그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어요. 우리는 과거도 미래도 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여기 있습니다. 현재야말로 우리가 관련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죠. 보세요.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증오가 벌어집니까. 자신에게서 철저하게 차단됐기 때문이에요. 우리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는 가능성에 대해 우리 스스로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뉴욕 도심의 인파는 서로 다른 별인 양 각자의 궤도로 움직인다. 어디 뉴욕뿐일까? 서울도 도쿄도 부유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깊은 불안이 서로를 밀쳐낸다. 그 속 짙은 외로움에 싸인 이들이 달려온 곳이 바로 마리나가 만들어놓은 소도蘇塗 같은 보호지대였다. 마리나에게는 잊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다. 그녀에 대해 말을 꺼내자 금세 마리나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이른 아침이었어요. 자그마한 여인이 포대기에 아기를 감싸 안고 내 앞에 앉았습니다. 눈을 마주하는데, 제 온몸으로 아주 진한 통증이 올라왔습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짙고 검푸른 슬픔이었지요. 아프고 또 아팠습니다. 여인은 아기 머리를 덮은 포대기를 젖히더군요. 아기 머리에 길고 깊숙한 흉터가 선명하게 파여 있었습니다.”

1년 후, 모마에서 마리나 앞에 앉았던 사람들의 사진을 담은 책이 나왔다. 아기를 안고 왔던 그 여인도 책을 보았는지, 어느 날 마리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딸은 8개월이었습니다. 뇌종양을 앓고 있었고, 그날 아침 의사가 항암 치료를 멈추겠다고 했습니다. 딸이 곧 죽을 거라고.”

그녀는 곧장 미술관으로 온 것이었다. 사랑으로 허락된 그 자리, 그 시간에 머물고 싶어서. 결국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기는 떠났다. 하지만 얼마 후 그녀와 다시 만난 자리에서 마리나는 행복을 찾은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녀는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예술은 재화(commodity)가 아니라, 오직 에너지(energy)다”라고 했다. 돈의 힘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의 본성을 살려내는 길이다. 그 길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호랑이보다 약한 이빨로 문명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겐 서로 공감하며 돕는 본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눈 마주하며 나눈 그 정성 말이다.

마리나가 보여주었듯, 한 사람과 온전히 소통을 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도, 복잡한 장치도 필요하지 않다. 눈을 마주하고 침묵하면 된다. 그리고 이 평범한 일은 평론가들에 의해 뉴밀레니엄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선정되었고, 마리나는 2014년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꼽혔다.

글을 쓴 안희경은 재미 저널리스트로, 8년 동안 불교방송 PD로 일하며 시사·교양·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2002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서구에 부는 성찰적 기운과 대안 활동을 소개하는 글을 써왔다. 최근에는 치열해지는 생존 경쟁과 불안에 휩싸이는 삶의 조건을 조명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 <문명, 그 길을 묻다-우리는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2015),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2014),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2013) 등을 펴냈다.

안희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