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의 한적한 주택 단지에 위치한 정재일 작곡가의 집. 작업실 한쪽에 자신의 예술 작업에 영향을 준 무용가 피나 바우슈의 사진을 놓았다.
매년 여름 국내에 거대한 클래식 팬덤을 형성하는 디토 페스티벌. 올여름 프로그램 중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은 괴테의 시이자 슈베르트의 가곡이기도 한 <마왕>이었다. 피아니스트 지용, 더블 베이스 연주가 성민제, 작곡가 정재일이 페스티벌의 전체 주제인 슈베르트의 작품 중에서도 <마왕>을 선택해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풀어냈다. 그중 유일하게 클래식 전공자가 아닌 데다 디토 페스티벌에 올해 처음 참여한 작곡가 정재일. 아픈 아들을 안고 가슴 저미며 어둠 속에서 말을 달리는 <마왕>의 줄거리처럼 정재일이 편곡한 ‘마왕 시나위’는 관객을 숨 가쁘게 마왕의 망토로 휘감아버렸다.
한 기자는 “혁명적이다”라고 했고, “음악인데 무용을 보는 착각이 들었다” “연주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연주하는데 공연장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저 작곡가가 지구에 사는 사람인가?” “어떤 영혼이 연주자의 몸을 잠시 빌린 것 같았다”라는 소감이 디토 페스티벌의 관객으로부터 온라인으로 번져나갔다.
소년, 프로 음악가가 되다
“클래식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슈베르트 작품도 이번에 제대로 들어보게 되었어요. 평소 ‘전통음악을 지키자. 현대음악과 전통음악을 믹스해보자’는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마왕>의 편곡에 국악을 접목한 건 제가 관객으로 즐겁게 향유하는 작품 중에 전통 예술이 많고, 그 분야에 친구도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아요.”
김포의 한적한 산자락 아래 주택지 골목의 맨 끝. 산을 향하는 오솔길이 담장을 대신하고 천장이 높아 마음껏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해도 멧비둘기 외에는 눈 흘기는 이가 없는 그의 작업실 겸 집에서 작곡가 정재일을 만났다. 은은한 햇살이 실내로 스며들었고 손님을 위해 커피를 내오는 그의 움직임이 편안했으며 수줍고 예의 바른 어조 속에 음악가로서의 명료한 생각이 담겨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라는 찬사를 받는 작업을 선보인 지가 벌써 20여 년째라니, 이 수줍은 청년의 나이테는 대체 몇 겹일까?
“다른 아이처럼 네 살 때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말았다 하다가 제 의지로 기타를 치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즈음입니다. 얼마 전 타계한 김광한 DJ가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록 음악에 빠져 기타를 샀어요. 돈을 받고 음악을 연주하는 프로 연주가가 된 건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죠.”
열세 살,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정재일은 1990년대 초반, 음악 좀 한다면 누구나 알던 월간지 <핫 뮤직>에 록 밴드 세션을 찾는 광고를 냈다(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므로 이 잡지 뒷면의 구인 광고란이 음악가를 이어주는 소셜 네트워크 역할을 했다). 여러 통의 전화가 왔지만 그의 나이를 알고는 전화를 끊거나 육두문자를 날리기 일쑤. 안 되겠다 싶어서 다른 사람이 낸 구인 광고를 보고 아예 연습실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휘문고등학교 근처의 한 연습실을 찾아갔는데 당시 고등학생이던 장민승과 최희철(장민승은 유명 현대미술가로, 올해 에르메스 미술재단 미술상을 받았다. 최희철은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연주하는 유명 베이시스트다)이 기회를 주었고, 그들과 함께 생애 첫 밴드를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신문에서 재즈 아카데미라는 제대로 된 음악교육기관이 생긴다는 기사를 본 어머니가 정식으로 배워보라고 권유해 처음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 재즈 아카데미의 연습실에서 기타를 치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는 “어, 괜찮게 치네”라고 말했다.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 한상원이었다. 한상원은 얼마 뒤 그 소년을 자신의 밴드에 베이스 기타 연주가로 부르는 파격적 결정을 했고, 매일 베이스 기타를 피나게 연습한 정재일은 그리하여 열다섯 살에 한상원의 밴드에서 돈을 받고 연주하는 진짜 프로 음악가가 되었다.
아, 세상에 이런 게 있다니!
베이스 기타, 기타, 피아노, 드럼, 노래, 작곡과 편곡까지 대략 한 달 정도만 시간을 주면 탁월한 연주가로 변하는 아이에 대한 소문이 음악계에 퍼졌고, 전설 같은 형들과 인연이 이어졌다. 열입곱 살에는 그룹 긱스(이적-리드 보컬, 한상원-기타, 정재일-베이스 기타, 정원영과 강호정-건반, 이상민-드럼 등 국내 최고 대중 음악가가 모인 그룹이다)의 멤버로 활동했다. 가수 이적은 “존경하는 뮤지션, 일반 한국의 뮤지션과는 수준이 다르다”라고 소년 정재일을 표현했다. 가수이자 피아노 연주가인 노영심은 “그가 음악을 들려주면 음악보다 존재가 느껴졌다”라고 했으며, 가수 정원영은 “베이스, 기타, 드럼, 피아노 등을 압도적으로 연주하는 건 우리나라에서 재일이밖에 없을 것. 재일이 때문에 우리나라 음악 수준이 높아질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이적, 정재영, 윤상, 김동률, 정원영, 유희열, 원일 등이 그가 청소년기에 예술적 유대를 맺은 형들이다.
기타리스트 한상원이 집에 찾아와 그의 재능을 가족에게 알려준 덕분에 고등학교 진학 대신 열일곱 살에 검정고시를 봐 음악만 하는 인생이 시작됐다. “사람들 말처럼 제가 재능이 넘치거나 천재는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에 빠져들었고 운도 굉장히 좋았어요. 제 일을 도와주는 우리 회사 대표님도 원래 사운드 디자이너예요. 2005년부터 제가 만든 모든 음악의 믹싱과 마스터링을 해주시죠. 군대에서 가수 박효신과 둘이서 졸병 시절부터 화장실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함께 하며 정이 들고 음악적 교류를 한 것 등 어릴 때 부터 좋은 뮤지션들과 맺은 파트너십이 가장 큰 행운이에요.”
성장기 내내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한 그의 음악 세계를 뒤흔든 사춘기는 사람이 아닌 연극과 무용에서 찾아 왔다. 아마추어 밴드를 하던 중학교 1학년 때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원일예술 감독과 함께 종묘제례악을 보러 다니며 무대 예술이 내는 ‘우주적 소리’에 대한 막연한 감동을 알고 있었다. 2000년, 그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역시 원일 예술 감독이 꼭 보라고 권한 전설적 무용가 피나 바우슈의 내한 공연 <카네이션>을 관람하면서 그 우주가 다시 열렸다. 아이고, 세상에 이런 게 있다니!
“피나 바우슈의 공연처럼 두 시간 넘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었어요. 압도적으로 저를 쥐고 있었다고 할까요? 긴 시간 동안 무대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게 공연장 분위기가 되는 것의 감동이 어마어마했어요. 분명 제가 아는 음악을 썼는데도 전혀 다른 생명력을 내니까 새로웠죠. 그때부터 저는 음악이 전부가 아닌 사람으로 변했어요.”
그는 여러 악기를 전문가 이상 수준으로 연주하지만 우리나라 전통악기를 배우지 못한 게 몹시 아쉽다고 했다. 전통악기는 한번 시작하면 너무 깊이 빠져들 것 같아 매력적이고 또 두렵다.
예술을 할 이유를 깨닫다
그날 공연장에서 본 것은 음악도 무용도 연극도 아닌, 그저 ‘아름다운 것’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음악을 시작했기 때문에 예술을 하는 철학적 기반이 없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어요. 음악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고 싶었고, 음악 외에도 아름다운 것을 더 알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재일은 매우 성실한 예술 소비자로 살고 있다. 미성년자였지만 수입이 있는 프로 뮤지션이니 수많은 공연 관람 비용도 스스로 충당할 수 있었다.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어 몽골과 탄자니아로 혼자서 배낭여행도 떠났다. 유럽의 도시를 돌아다니며 연주와 공연도 보러 다녔다.
“혼자서 간 여행지는 몽골이었어요. 흡수골 호수의 사진을 보고는 전라도 크기라는 그곳에 가보고 싶었죠. 울란바토르에서 우연히 EBS 다큐멘터리 팀을 만났고, GPS에 의존해 독수리를 좇아다니는 그분들을 따라다녔어요. 당시 열아홉 살이던 저는 그토록 끝없이 하늘하고 땅만 펼쳐진 대자연을 본 적이 없었어요. 자연, 언어, 생활 방식 등 모든 것이 새롭고 감동적이었죠.”
원일 예술 감독과 종묘제례악을 보면서 가졌던 전통 예술에 대한 관심이 몽골에서 다른 민족의 예술을 보면서 더욱 강렬한 동경으로 변했다. 오늘날 모든 음악이 각 나라의 전통에서 나왔으니 그것도 다 알고 싶었다.
열아홉 살 때 한 두 번째 여행은 킬리만자로 산에 오르고 싶어서 탄자니아와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났다. 김포공항이 국제공항이던 시절이다. 막상 고산병 때문에 킬리만자로 산 정상까지 가지 못했지만, 산을 오를 때 도 와주던 포터를 따라 아프리카 곳곳을 다녔다.
“숲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서 따라가보니 작은 교회에서 성가대가 연습을 하고 있었죠. 동양인을 보자 목사님이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그들이 부르던 성가는 여태껏 제가 들어본 음악 중 가장 거룩했습니다. 무신론자인데도 눈물을 펑펑 흘렸지요. 그건 음악이 아니라 그분께 드리는 마음이었어요.”
킬리만자로 산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숲 속 교회에서의 경험이, 포터의 집에 따라가 모래 위에 나무 기둥 하나만 세운 집에서 밀가루 부침개를 얻어먹은 시간이 더 찬란하고 강렬하게 가슴에 새겨졌다. 서울과 연습실밖에 모르던 소년에게 넓은 세상과 그들의 전통은 놀랍고도 큰 충격이었다.
천재를 파멸에서 구원하는 손길
서른 살에는 군대에 갔다. 제대 후에는 대중음악보다 연극, 무용, 영화 등의 분야에서 작곡하거나 음악 감독으로 활약했다. 열아홉 살 때 예술을 하는 철학적 이유를 찾을 필요를 느꼈고, 20대 전체를 전 세계 예술을 소비하고 여행하며 보낸 자연스러운 인과다.
“군대에서 2년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돌아보니 4~5분에 끝내야 하는 대중음악 작업이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악은 모든 예술 장르와 친할 수 있으니까 전역하면 내가 해보고 싶은 걸 하자고 결심했죠.”
군 생활을 마치니 다음 해에 혹은 그 이후에 무대에 올릴 음악 작업 요청도 걱정 없이 수락할 수 있어서 다채로운 작업이 가능했다. “새로운 분야지만 매우 열려 있는 사람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즐거웠어요. 대신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건 아이디어가 많아서라기보다 세상에 음악 외에도 아름다운 게 많기 때문입니다. 예술의 핵심인 음악은 무엇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고 영화, 연극, 무용, 미술까지 음악이 쓰일 수 있는 곳은 무한합니다. 내 음악이 다른 예술과 합쳐져서 아름다운 무엇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내가 여기서 파멸하는구나 하는 걱정은 어쩔 수 없죠. 지금도 그래요. 새로운 작업을 할 때마다 매번 파멸할 것 같아요.”
파멸할 듯한 창작의 고통과 천재라는 찬사의 모순 같은 공존. 그 혼란에서 그가 실족하지 않게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세 가지다. 우선 음주, 그중에서도 아침에 하는 음주가 그를 돌본다. 특히 집주인과 하는 음주가 제일 즐겁다(그는 장민승 작가의 별채에 산다. 그 옛날 음악 잡지를 보고 찾아가 첫 밴드를 함께 한 인연이 형제애로 이어지고 있다). 고작해야 맥주 한두 캔, 와인 한두 잔 마시지만 좋아하는 형이자 존경하는 예술가인 장민승 작가와 무한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더없이 즐겁다. 이런 교감으로 이 두 예술가는 2012년 겨울을 보낸 각자의 느낌을 사진과 음악으로 표현한 라는 전시를 열어 예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장민승 작가에게 올해 에르메스 미술재단 미술상을 안겨준 전에도 정재일 작곡가가 파트너로 참여했다. 또 두 사람은 2014년 함양군 공공 미술 기관의 제안으로 1천1백 년 전 최치원이 조성한 우리 역사 최초의 인공림인 ‘상림’을 공감각적 예술 작품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두 예술가가 상림을 관찰하고 기록한 후 작업한 영상과 음악을 애플리케이션에 담아 독특한 방식의 공공 예술로, 숲을 산책하는 사람이 주요 포인트에 도착하면 예술가가 숲에서 느낀 정서가 정재일 작곡가의 음악으로 전해지는 형식이다.
정재일을 구원하는 또 하나의 손길은 아이러니하게도 ‘데드라인’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도 피나 바우슈도 같은 고백을 했다고 하지 않는가. 음악의 영감을 찾으려고 헤매는 대신 일상에서 하염없이 생각만 거듭하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파멸하기 직전에 작품이 터져 나오는 경우가 많다.
“대중음악은 제가 조금 늦게 작업하면 앨범을 조금 늦게 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공연 예술은 안 되죠. 제가 음악을 늦게 주면 다른 사람이 연습을 하지 못하거나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되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요.”
세 번째 방법은 학습이다. 피나 바우슈의 공연을 본 이후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마비되지 않을 것’이 그의 인생 목표가 되지 않았는가. “사실은 마비되지 않는 삶을 살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있으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니 항상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려는 마음이 살아 있으면 좋겠어요.”
“아름다움이란 대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는 이런 답을 이어갔다. “어떤 것을 경험했을 때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고 예전과는 다른 마음을 갖게 해주는 감정이 아름다움인 것 같아요. 보통 유년기에서 20대 초중반까지는 그런 감정을 잘 느끼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마음이 닫히는 사람을 많이 봤어요. 이 마음이 마비되면 공식에 따라 결과물을 내놓는 ‘업자’가 될 테니 이것이 예술가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지점인 것 같아요.”
현재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하는 세계적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음악 감독을 맡은 것처럼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것도 그가 마비되지 않는 노하우다. 새 장르에서는 늘 초보니 긴장하고 잘하는 사람을 볼 수 있어서 즐겁다. 슈베르트의 <마왕>을 편곡할 때처럼 새로운 도전엔 더 큰 파멸의 불안이 따르지만, 다행히 지난 20여 년을 돌이켜보건대 그가 지나간 자리엔 파멸 대신 정재일이라는 음악가의 이름만 새로운 획으로 새겨져왔다.
음악 작업을 하는 시간 외에는 공연을 관람하고 여행하는 것을 즐긴다. 9월 13일까지 잠실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하는 록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음악 감독을 맡아 수요일과 일요일에는 공연장으로 출근해 밴드 지휘를 한다. 그가 지휘하는 날만 공연을 예매하는 관객이 많고, 공연이 끝났는데도 그를 보려고 무대 앞으로 관객이 모여드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바리 어밴던드, 가장 정재일다운 음악
“아버지, 마왕이 보이지 않으세요? 망토를 두르고 왕관을 쓴 마왕요.” “아들아, 그건 그저 엷게 퍼져 있는 안개란다.” 하지만 <마왕>의 텍스트처럼 여러 분야에서 이름이 나는 것은 정작 음악가 자신에게는 엷게 퍼진 안개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든다.
“인생의 꿈은 많은 사람이 정재일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아, 이 작품을 한 사람’ 하면서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장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눈을 감고 걷는 기분이 들어요. 대학교에서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면 이런 기분이 안 들까 하는 생각도 해보죠. 눈 감고 걷는 기분이 조금 더 걷혔으면 하는 게 매일매일의 꿈이에요.”
평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정재일 감독은 자신이 참여하는 일과 더불어 온전히 자신이 신나서 하는 작품을 늘려갈 계획이다. 2014년에 발표하고 공연한 한승석과 정재일의 ‘바리 abandoned’가 좋은 예다. 소리꾼 한승석이 창을, 정재일이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하고 극작가 배삼식이 노랫말을 쓴 라이브 콘서트 형식의 공연 ‘바리 abandoned’는 우리나라의 여성 설화 ‘바리공주 이야기’ 를 줄거리로 한 작품. 동서양을 넘나드는 서사적 형태와 연주를 선보이는 이 앨범으로 그는 2015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재즈&크로스오버 음반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도 수시로 국내와 해외 공연을 이어가는데, 한강 변에 피아노를 가져다놓고 한승석과 정재일이 신나게 연주하는 장면을 찍은 ‘바리abandoned’의 라이브 영상 ‘빨래Ⅱ’(포털 사이트에 공개됐다)를 보면 천재라고 불리는 두 예술가가 장르를 초월해 신나게 음악을 주고받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음악 한 곡으로 민초들의 인간사를 다 돌아보는 듯한 서사와 삶의 감동이나 원동력을 찾기 원한다면 예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찾으려면 먼저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처음에 느낌이 오지 않더라도 한 번 더 곱씹고 찾아다녀보세요. 하지만 요즘은 스트리밍 시스템이라서 음악의 인트로만 듣고 꺼버리는데, 여러 번 듣는 것이 좋은 예술을 발견하는 방법입니다. 입체성이 느껴져 ‘즐기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구나. 이것이 예술이구나!’ 하는 감탄의 흥이 절로 나는 영상이다.
매일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정재일은 지금도 꾸준히 학습하는 삶을 살고 있다. 좋은 예술대학교의 학부 신입생으로 들어가기에는 나이 제한을 훌쩍 넘어버린 서른넷의 청년. 그러니 학교에 다니는 대신 올 연말쯤엔 오랫동안 생각해온대로 한국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 살아보려고 한다. 베를린과 도쿄 중 현재 유력한 후보지는 베를린이다. 유럽은 음악의 뿌리가 있는 곳인 데다 지난 수년간 유럽 공연장을 돌아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다르구나’ 하는 문화적 자극을 많이 받았고 무엇보다 베를린이 다른 도시에 비해 생활비가 적게 든다는 현실적 장점도 고려했다.
“아름다운 것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그들의 삶과 공연을 매일 옆에서 보는 것, 그런 게 유학 아닐까요? 작곡가로서 경력이 나름 20여 년이 되어 가니 이제 진짜 채워야 하는 시기가 온 것 같아요. 다시 채우지 않으면 더 멀리 더 오래 걸어갈 수 없으니 이제는 주유를 해야 할 시기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다 보면 눈을 감고 걷는 기분이 걷히겠지요?”
“타고난 것을 거의 다 써가는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특유의 조용하고 수줍은 목소리로 “채우면서 동시에 써버린 것이다”라는 현답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학습하고 여행하면서 성장한다. 유년기에는 분명 활짝 열려 있었을 내 가슴에서 채우는 것보다 써버리는 것이 많아진 건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혹시 당신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데 눈을 감은 채 걷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천재 음악가 정재일처럼 충실한 예술 소비자가 되어보시라. 그 언젠가 채움이 소모를 앞지르는 순간에 심봉사가 눈을 뜨듯, 바리공주의 아버지가 회생하듯 당신도 다시금 눈이 뜨일 것이다. 그리하여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끼며 마음이 움직이는 바로 그 순간이 아름다운 것의 본질이다. 천재 작곡가 정재일은 이 사실을 열아홉에 깨달아 예술을 하는 이유로 삼았다. 그리고 여전히 성실하게 채워나가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 작곡가 정재일 아름다운 것에 마비되지 않고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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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에 아마추어 밴드를 시작했고 열다섯 살에 돈을 받고 연주하는 연주가가 되었다. 기타, 베이스 기타, 피아노, 드럼 등을 자유자재로 연주하고 작곡과 편곡에 능하며 공연 예술의 음악 감독으로 많은 상을 받은 지 벌써 20여 년.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젊은이를 천재 음악가라 부른다. 작곡가 정재일의 이야기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