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숲과 졸졸 흐르는 냇물을 벗 삼아 은밀하고 고요하게 존재하는 시마네 현 오다시 오오모리 마을 전경.
뉴욕, 파리, 밀라노, 도쿄 등 웬만한 도시와 관광지는 거의 다녀봤기에 조금 색다른 여행지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찰나, 일본 시마네 현으로 가는 출장이 잡혔다. “일본 사람조차도 시마네 현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말할 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인기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구나 흔히 선택하는 대중적 관광지가 아니라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정보를 좇고 좇아 의도적으로 찾아오는 낙원이랄까?
옛것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고 젊고 세련된 감각을 덧댄 생활용품 브랜드 군겐도 본점.
이처럼 숨은 보석 같은 시마네 현이 더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기사를 쓰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곳이 너무 알려져 북적거리는 관광지로 변모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애착이 깊은 곳이다. 시마네 현은 일본 열도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른 후, 한 시간가량 지나니 시마네현 요나고 공항에 도착했다. 도쿄보다 훨씬 가까운 셈이다. 근처 마쓰에 지역부터 둘러볼 수도 있지만 주요 촬영지로 결정한 오다시 오오모리 마을로 곧바로 이동했다. 차로 두 시간 반가량 들어가니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에서 본 듯한 평화로운 마을이 나타났다.
재봉틀 형상의 목조각 아래 나무 판에 이름을 새겨 넣은 군겐도 간판.
주인공 자매가 숲의 요정을 만난 그런 시골 마을! 나무로 지은 고택이 대나무 숲과 들꽃 등 대자연을 병풍 삼아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을 전체 인구가 4백 명에 소학교 전체 학생이 열 명 남짓이라니 얼마나 규모가 작은 마을인지 짐작이 간다. 일본에 그 흔한 가라오케는커녕 편의점도 없다. 대체 이런 시골에서 무엇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이 들겠지만, 결론은 ‘그저 즐겁다’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는 나의 모든 감각이 평소와 달리 들뜨고 곤두서는 걸 느꼈다. 블록버스터 급 공연을 보거나 롤러코스터를 탈 때 느끼는 흥분과는 차원이 다른, 마음 깊은 곳에서의 울림이었다.
군겐도 본점에서 만난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일종의 ‘걱정 인형’이다.
위대한 유산
사람이든 사물이든 현재 모습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어떠한 부침을 겪었는지 알아야 한다. 4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오오모리 마을이 위치한 시마네 현 오다시는 지금의 평화와 고요와는 백팔십도로 다른 모습이었다. 17세기 초,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에 달하는 양을 채굴하던 세계적 은광이었다니 얼마나 번성한 곳이었을까? 더군다나 당시엔 근접한 교토가 수도였던 만큼 이곳은 지배와 행정의 중심지였다. 무사가 대대로 은광을 경영하고 영내를 지배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권력을 거머쥔 무사의 저택은 얼마나 으리으리했겠는가! 그렇게 활기차던 도시는 채굴을 중단한 후 성장을 멈추었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의 마을 주민은 조상이 남긴 ‘유네스코 세계유산’(2007년 지정)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보존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의상부터 자수용품, 주방 도구, 침구까지 생활 전반엔 걸친 양질의 디자인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군겐도 본점 내부 전경.
옛것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건 말처럼 그리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다. 때의 보존이란 그저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방치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옛것의 틀과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 그것이 후세에 낡고 필요 없는 것이 아닌, 더 가까이 찾고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마네 현은 전통적 마을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옛날로 돌아간 듯한 분위기 속에서 도드라지지 않게 현대적 카페나 공방 등이 자리해 아기자기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완벽하게 복원하고 보존해온 무사와 상인의 대저택도 직접 구경할 수 있는데, 마치 과거로 시간 이동을 한 듯한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웃는 인상이 포근하고 마음이 넉넉한 군겐도 창립자이자 디자이너인 마츠바토미 여사.
잊을 수 없는 마을 사람
뿌리의 생명력과 가치를 이어가려는 이러한 마을의 보존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 마츠바 토미를 직접 만난 건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그녀는 이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일본 전역에 삼십여 곳의 매장을 열 만큼 성장한 디자인 그룹 군겐도의 디자이너다. 버려진 것, 불에 타서 형태를 잃어버린 것, 깨져서 기능을 상실한 것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오오모리 마을엔 집마다 대문에 대나무 통을 화병 삼아 꽃을 꽂은 장식이 인상적이다.
무너져 내린 무사 가옥을 10여 년에 걸쳐 가꾸고 일구어 아름답게 탈바꿈한 게스트 하우스(여기를 보고자 일본인도 전국에서 찾아올 정도이며, 숙박은 올 하반기까지 예약이 차 있단다)부터 깨진 유리창의 틈을 따라 청동을 메워 새로운 작품으로 승화한 솜씨, 버려진 바닥재로 만든 근사한 부엌 테이블 등 그의 손길로 소생한 사물은 무궁무진하다. 그의 감각과 안목으로 만들고 모은 군겐도 내 상품을 구경하고 쇼핑하는 데 하루 종일 시간을 할애해도 모자랄 정도!
‘류겐지마부’라는 광산의 갱도 입구로서 시마네 현 대표 관광지 중 하나다. 이와미긴잔 지구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로, 직접 동굴 안으로 들어가 견학할 수 있다.
오오모리에서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인연은 <행복> 촬영 팀이 묵은 숙소 ‘유즈리하’의 나카무라 사장이다. 첫째 날, 지배인이이 호텔의 사장은 의수와 의족 등을 만드는 신체 보정 기기 사업가라고 소개했을 때 ‘호텔 자산가가 웬 의료 기기 사업을?’ 하며 의아하게 생각해 흘려들었다. 그런데 체크아웃하던 날, 한국에서 온 손님을 직접 배웅하러 온 나카무라 사장의 말은 숙연함을 느끼게 했다. “전 세계로부터 신체 보정 기기를 제작하기 위해 직접 방문한 약자들이 편안하게 머물 곳을 마련해주기 위해 숙소를 지은 겁니다.” 그제야 찾아보니, 실제 ‘나카무라 브레이스’는 전 세계인에게 감사 편지를 가장 많이 받는 회사로 유명하단다.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옛 모습 그대로의 우체통.
산골 마을에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희망의 본보기’이기도 하고! 또 한 명은 두부 가게 사장님이다. 머무는 동안 매일 아침 나선 산책길에 어디선가 고소한 깨 볶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침이 고이게 했다. 직접 만드는 깨두부 직판장에서 나는 건데, 구멍가게 같은 이 작은 상점에서 일본 각지로 택배 배송을 한다고. 쫄깃한 푸딩 같은 식감에 고소하고 담백한 맛으로 다이어트 식사로도 일품이다. 3일 내내 한국에서 온 이방인 손님을 맞던 이 두부 가게 사장님은 마지막 날 우리가 떠난다고 하자 벽에 걸어 놓은 압화 장식 액자를 선물하는 따뜻한 인심을 보여주었다.
<행복> 촬영팀이 머무른 호텔 유즈리하의 아름다운 정원.
인생의 정답을 풀어낸 기분
삶에 ‘디지털’이라는 문명이 침입한 이후, 우리는 점점 빠른 속도에 익숙해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낸 후 답이 늦으면 답답하고, 일터에서도 빠르게 반응하는 게 일 잘하는 능력으로 치부되는 시대. 그래서 때로는 느리게 걷고 천천히 심호흡하고 싶다. 그렇게 아날로그 감성의 과거가 그립다면 이곳 오오모리 마을은 세상 최고의 지상 낙원이다. 눈앞에 펼쳐진 이름 모를 꽃과 열매와 나뭇잎에 매달린 달팽이를 보고, 냇물 소리와 청개구리ㆍ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느릿느릿 걷고, 직접 기른 식재료의 진미를 맛보는 것 만으로도 즐겁고 기쁘다. 나를 둘러싼 인연에 더 관심이 생기고 마음이 열리며, 그렇게 여유를 되찾는다. 사랑이 샘솟는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이렇듯 시마네 현에서 얻은 진귀한 경험과 생각은 가슴속에 단단히 자리해 마음의 축이 됐다. 그리고 자신감이 생겼다. 다시금 돌아온 일상이 아무리 정신없고 요동치더라도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시마네 현 대표 관광지
이와미긴잔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 세계 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은광과 관련한 유적으로, 풍부한 자연환경이 장관을 이룬다. www.visit-ohda.jp
군겐도 디자이너 마츠바 토미가 일군 리빙 브랜드 숍 본점. 슬로 라이프에 걸맞은 메뉴로 카페를 운영한다. 식재료는 모두 시마네 현 생산물로 특히 채소로 만든 하타케 카레나 검은콩 치즈 케이크 같은 전통 메뉴를 맛볼 수 있다. www.gungendo.co.jp
유노쓰 온천 1천3백 년 전에 발견해 약효가 유명한 온천으로 번성한 곳. 이와미긴잔 외항으로 번영했던 유노쓰 지역은 중요 전통 건축물 보존지구로 선정된 유일한 온천 마을로 지금도 높은 약효로 입욕자가 끊이지 않는다.
야키모노노사토 서일본 최대급 도기촌으로, 에도시대 중기에 복원한 길이 30m, 15단의 거대한 노보리 가마 2기가 눈길을 끈다.
마쓰에 성 ‘작은 교토’라 부르는 마쓰에 지역에 위치한 성으로,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에도시대의 건축 구조인 천수를 유지하고 있다. www.matsue-tourism.or.jp
아다치 미술관 미국의 일본 정원 전문지가 11년 연속 베스트 정원 1위로 꼽은 정원을 보유한 미술관. 일본 전통 미학을 반영한 미술관 구조는 관람 공간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느끼게 한다. www.adachi-museum.or.jp.
취재 협조 브라이트 스푼(02-755-5888, japaninside.co.kr), 시마네현 상공노동부 관광진흥과
- 일본 시마네 현 오오모리 마을에서 소생의 기운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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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여느 시골과 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곳곳에 남아 있는 선조의 풍요로운 유산과 낡은 터전을 일구는 주민의 놀라운 저력을 느끼고 나니, 이 숲 속 작은 마을은 세상에 둘도 없는 목적지처럼 여겨졌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와 또 오고 싶은 곳. 새로운 생각을 일깨우고 삶의 기쁨을 찾게 하는 치유와 소생의 도시, 일본 시마네 현에서의 평화로운 여정.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