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함께 살던 집에 혼자 남아 밥을 짓고 마당을 쓸고 빨래를 해 넌다. 그러나 일상의 사사를 끝내면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몰려온다. 절로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른다. 특히 손님들이 다녀가고 혼자 남았을 때 그렇다. 밥을 먹다가, 빨래를 개다가, 한밤중에 자다 깨어서, 새벽 산책길에, 운전 중에, 시장에서 양배추를 사다가 왈칵왈칵 눈물이 치솟는다.
아내의 병을 안 것은 재작년 5월, 우리가 8년 동안의 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지 2개월이 지난 후였다. 귀국 직전까지 우리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의 여행자 지역인 타멜 거리에서 ‘소풍’이라는 간이음식점을 꾸려왔다.
네팔은 정치적 상황이 극도로 불안해서 식당 문을 연 날보다 닫은 날이 더 많은 달도 있었다. 다달이 적자가 쌓여갔다. 종업원을 해고하고 우리 둘이 뛰어야 겨우 운영이 될 것 같았다. 당시 종업원은 초등학교 다니는 딸 둘을 둔 부부와 처녀 넷 등 모두 여섯 명이었다. 오랜 세월 한집에서 흉허물 없이 살다 보니 피붙이 같아져 어느 누구도 그만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네팔 정황이 안 좋다는 것을 아신 부모님께서 우리더러 귀국해서 과수원 일을 도와달라고 하셨다. 자식 된 도리로 팔순 노부모의 청을 거역할 수 없었다. 사실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여기서 더 불효할 수는 없었다. 또한 ‘소풍’의 식구들을 내보내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귀국하여 군입을 덜어주는 게 순리라고 판단했다.
아버지께서는 수년 전부터 포천에 있는 산정호수 인근의 야산에 과수원을 개간해오셨는데, 우리가 귀국하기 전 해에 첫 수확을 보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일한다면 훗날 그 과수원을 물려주겠다는 언질까지 주셨다. 과수원이 문제였겠는가, 늘그막에 자식을 보고 싶은 마음이셨겠지.
아내는 나를 위해 끼니마다 정성스레 음식을 장만하면서 과수원 일에도 열심이었다. 작업복 차림에 군화를 신은 채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묘목을 심고, 거름과 물을 주었다. 어느새 봄이 무르익고 과수들은 꽃을 피웠다. 매화꽃, 복숭아꽃, 살구꽃, 자두꽃…. 어여쁜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던 5월 초순 어느날 우리는 복숭아 묘목을 심기 위해 나섰는데,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아내는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어깨 통증을 호소했다.
아내의 어깨 통증은 전에도 몇 차례 있었으나 그때마다 의사들은 대수롭지 않다며 진통제를 처방해주었다. 진통제를 며칠 복용하고 나면 통증이 씻은 듯 사라졌기에 우리도 대수롭잖게 넘겼었다. 그러나 그날의 고통은 여느 때와 달랐다. 다음날 우리는 서울 강남의 진단방사선과 전문의를 찾아가 종합검진을 받았다. 문득 3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잠시 귀국해 머물던 동안 이곳에서 검진을 받았는데, 그때 나는 습관성 음주로 인한 지방간을 주의하라는 권고를 들었고 아내는 아픈 곳 없이 건강했다. 그런데 이번 검사 결과 귀국 전 넉 달 간 금주를 한 덕에 나의 간은 깨끗했다. 반면 아내의 어깨 부위에 온 통증은 간에서 자란 커다란 종양이 횡격막 주변의 신경을 건드리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로 그 주먹만 한 종양을 보여주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CT를 통해 전문의의 확진을 받아보셔야 하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겠습니다.” 잠시 멍해졌던 아내는 이내 “아직 확실한 건 아니죠?” 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난 온몸이 얼어붙은 듯 옴짝달짝할 수 없었다.
2005년 5월 16일 오후, 우리는 의사 선생님이 소개해준 진단방사선과에 가서 CT를 찍고 그곳 전문의의 소견서를 받아서 돌아왔다. 그날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가. 우리는 둘 다 눈앞이 캄캄하여 어디로 가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태연한 척 팔짱을 끼고 걸었다. 아내가 걸음을 멈추더니 길거리에서 만 원짜리 운동화를 골랐다. 아내는 시아재가 언젠가 노점에서 파는 운동화를 보면 한 켤레 사다 달라고 했다면서 아우와 발의 크기가 같은 내게 크기가 맞는지 신어보라고 했다. 그날 CT 찍는 순번이 많이 밀려 대기하는 동안, 우리는 큼직한 유리창이 달린 식당에서 일본식 메밀국수를 먹었다. 아내에게 생선회를 먹이고 싶었지만 우리 형편으로는 엄두가 안 났다.
그날 오후 늦게 전화를 받고 나온 아내의 친구가 저녁을 사줬다. 저녁 먹는 자리였는지, 헤어지기 전에 길가에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내의 친구는 슬픔을 누르지 못했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언니, 이 바보야.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 언니는 이제 얼마 못 살고 죽는 거야. 억울해야 되는 거야. 화내야 되는 거야. 울어야 되는 거야. 소리 지르고 펄쩍펄쩍 뛰어야 되는 거야.” 그러나 아내는 오히려 그녀를 도닥이고 있었다. “요즘은 암이라고 다 죽는 게 아니래. 진정해. 오진일 수도 있잖아. 요즘은 오진율이 50퍼센트도 넘는대. 오진이 아니더라도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 더 살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는 결국 죽는 거잖아.”
집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 안에서 우리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나도 그랬지만 아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한다. 우리의 뇌리에는 함께한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2인용 텐트에서 자면서 백날도 넘게 떠돌았던 히말라야의 산속, 노을 지는 룸비니 들판의 보리수 아래서의 긴긴 포옹, 남인도를 향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 보낸 3박 4일, 우리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소풍’을 지키고 있을 종업원 식구들. 그리고 정든 이웃들과 작별하던 귀국 직전의 나날들.
귀국 전 카트만두의 유명한 점성술사에게 점을 쳤었다. 점성술사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2005년은 아내 인생의 큰 전환을 맞는 시기이며, 이 시기를 잘 넘기면 향후 14년 동안 크나큰 행복을 누리며 살 것이라고 말이다. 아내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아내는 입원하러 갈 때마다 짧은 여행 떠나듯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우리는 네팔에서 트레킹을 다닐 때 쓰던 큰 배낭을 하나씩 메고 씩씩하게 걸어서 병원을 찾아갔다. 한강변에 위치한 병원은 특급 호텔처럼 으리으리했다. 간병동의 입원실 환자와 보호자들은 배낭을 메고 들어선 우리를 의아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침대에 마주 앉아 도시락을 펼쳐놓고 먹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소풍 온 연인 같다’며 웃었다.
아내는 10개월 동안 매달 일주일씩 입원해 모두 아홉 번에 걸친 ‘간동맥 화학 색전술’을 받았다. 오른쪽 대퇴부에서 간으로 직접 가는 대동맥을 통해 가늘고 긴 주사관을 암세포까지 밀어 넣어 암세포를 죽이는 약물을 주입한 후 그 혈관을 차단하는 시술이었다.
아내는 그 시술로 암세포를 약화시키고, 덩어리를 작게 만든 후 종양 부위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으면 10년 이상 더 살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내는 시술을 받는 틈틈이 불교나 명상에 관한 서적을 읽었으며, 천안에 있는 어느 명상센터에서 열흘 동안 위빠사나 명상을 하기도 했다. 아내는 네팔 카트만두에 살 때도 열흘씩 두 번에 걸쳐 위빠사나 명상을 한 일이 있다. 아내는 평소 달라이 라마의 저서들을 애독했다. 거기에는 누구에게나 결국 닥쳐오고야 말 죽음에 대한 지혜의 말씀이 가득했다.
간암 환자들 중에는 간동맥 화학 색전술과 명상 생활로 10년 가까이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아내의 경우는 악화되고 있었다. 후유증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간동맥 화학 색전술 초기에는 집에 돌아와 일주일 정도만 고통받고 나면 다시 입원하기 2~3주 동안은 그런대로 식사도 하고 한두 시간씩 산책도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5회를 넘기면서부터는 입원하기까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거렸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나마 조금 먹은 것마저 토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는 애당초 회생이 불가능한 말기 환자였다. 암세포는 폐까지 전이되어 있었다. 간동맥 화학 색전술을 계속 받더라도 6개월 이상 생존하기 어렵다고 본 의사들도 있었다.
지난해 3월 초순 열 번째의 간동맥 화학 색전술을 앞두고 입원했을 때, 아내는 더 이상의 진료를 거부했다. 어차피 6개월도 보장받지 못할 삶인데 시술 후에 오는 끔찍한 고통을 피하고 싶었으리라. 지금 돌이켜보면 혼자 남아 어렵게 살아가야 할 남편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려는 속내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우리는 부모님 집에서 멀지 않은 산정호수 근처의 허름한 민박집에 세를 들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시부모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에게 자신의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고통스러웠으리라.
우리는 봄눈이 하얗게 내린 3월 30일 아침에 새 집으로 이사했다. 아내는 자신의 생명이 하루하루 줄어든다는 생각을 잊어버리려는 듯 마당에 고추, 가지, 호박, 상추, 쑥갓 같은 채소를 심고 여름에 따 먹을 옥수수까지 욕심껏 심었다. 아내는 비료와 물을 주고, 잡초도 뽑았다. 나는 묵묵히 밭을 일구는 아내의 모습을 볼 때마다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얼굴을 돌려야 했다.
‘가슴 아프다’는 말을 대수롭잖게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가슴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듯도 싶다. 아내가 떠난 후로는 그녀가 심어 가꾸던 채소와 푸성귀, 그리고 여름에 따먹겠다고 욕심껏 심은 옥수수를 흘낏 스치기만 해도 가슴이 에었다. 아내가 시술로 인한 고통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누린 봄은 고작 한 달이었다. 그 한 달 동안 아내는 소생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 후 두 달 동안은 진통제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넘겼다. 아내는 말 못할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초여름을 맞았다. 아내는 첫 번째 혼수가 와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 가기 전날까지 집에 찾아오는 친지들과 지인들을 맞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온 혼수상태에서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눈을 감던 날 오전에 아내는 설핏 낮잠에 들었다가 깨어났다. “여보, 전에 살던 집에 가서 큰 주전자를 가져오세요. 접시도 있는 대로 다 가져오세요. 내일 우리 집에 손님이 많이 와요.” 아내는 숨을 헐떡이면서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의 배는 임산부처럼 불러 있는 데 반해 몸은 뼈만 앙상했다. 특히 얼굴은 해골을 연상시킬 만큼 말라서 두 눈이 평소보다 두 배쯤 커 보였다. “여보, 잘 생각해봐. 전에 살던 집에 무슨 그렇게 큰 주전자가 있어. 접시도 그렇고. 손님이 많이 온다는 것도 그렇잖아.” 아내는 그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 바보네. 꿈꾼 것도 분간을 못하고 있네. 그렇지만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어요. 돌아가고 싶어요.”
나는 아내의 생명이 사그라듦을 직감했다. 병원에서도 이제는 집에 모시라는 뜻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날 정오 무렵 우리는 호숫가의 집으로 돌아왔고, 아내는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어둑해질 무렵에 숨을 거두었다.
아내의 장례는 포천시립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르자는 중론이 있었으나 나는 그냥 우리가 살던 집에서 치르기로 결심했다. 객지에서 10년을 드난살이로 지내다 귀향한 아내를 낯선 영안실에 옮길 수는 없었다. 나는 혼수상태에 빠져 숨을 몰아쉬던 아내의 귀에 속삭였다. “여보, 당신 장례는 우리 집에서 치르기로 결정했어. 당신 이 집 좋아했잖아. 편안하게 가. 그리고 밝은 빛이 보이면 그 빛을 따라가. 우린 그 빛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근심 걱정 다 놓고 편안하게 가. 술 마시고 당신한테 심한 소리 한 것도 용서해줘. 여보, 내 말 들리지? 사랑해 여보, 너무너무 사랑해….” 혼수상태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아내는 사랑한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기침을 연달아 두 번 뱉으면서 아기가 토한 흰 젖 같은 액체를 입가에 흘렸다. 그리고 세상의 빛을 거두었다. 불국정사의 월정스님께서 ‘유족들이 너무 슬퍼하고 울부짖으면 영가 천도가 어렵다’고 하셨기에 나는 사십구재를 마치기 전까지 울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눈물이 흐르면 흐르는 그대로 내버려둔다. 흐느끼고 싶으면 흐느낀다. 나 혼자 남은 호숫가의 이 외딴 집은 남 몰래 소리쳐 울기도 좋다. 내 슬픔은 오래 남을 것이다. 하루 또 하루 미루다가 다 못한 사랑의 슬픔 말이다.
글을 쓴 김홍성 시인은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여러 잡지사에서 십수 년 동안 기자로 일했습니다. 20년 전 고은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고 시집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문학동네) 등을 내었습니다. 2002년에 아내 정명경(불명佛名 수자타) 씨와 네팔 카트만두에서 ‘소풍’이라는 조그마한 김밥집을 열었습니다. 여느 부부처럼 싸우고, 부둥켜안고, 웃고 울며 살았습니다. 부부가 함께 황량하고도 푸근한 히말라야 언저리를 10여 년 유랑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니 그간 남김없이 사랑했을 것 같은데, 남아 있는 한 사내의 가슴은 꼭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시인은 1년 4개월 동안의 암 투병 끝에 빛을 따라 돌아간 아내를 그리며 이 글을 보내주었습니다. 요즘 김 시인은 경기도 포천에서 지냅니다. 최근에는 몇 년 전 함께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지역을 트레킹하며 기록한 아내의 원고와 자신의 글을 모은 산문집 <히말라야, 40일간의 낮과 밤>(세상의 아침)을 냈습니다. 같이 있어도 홀로인 듯 유유하고 헤어져 있어도 함께인 듯 충만한 부부의 걸음 걸음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내의 병을 안 것은 재작년 5월, 우리가 8년 동안의 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지 2개월이 지난 후였다. 귀국 직전까지 우리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의 여행자 지역인 타멜 거리에서 ‘소풍’이라는 간이음식점을 꾸려왔다.
네팔은 정치적 상황이 극도로 불안해서 식당 문을 연 날보다 닫은 날이 더 많은 달도 있었다. 다달이 적자가 쌓여갔다. 종업원을 해고하고 우리 둘이 뛰어야 겨우 운영이 될 것 같았다. 당시 종업원은 초등학교 다니는 딸 둘을 둔 부부와 처녀 넷 등 모두 여섯 명이었다. 오랜 세월 한집에서 흉허물 없이 살다 보니 피붙이 같아져 어느 누구도 그만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네팔 정황이 안 좋다는 것을 아신 부모님께서 우리더러 귀국해서 과수원 일을 도와달라고 하셨다. 자식 된 도리로 팔순 노부모의 청을 거역할 수 없었다. 사실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여기서 더 불효할 수는 없었다. 또한 ‘소풍’의 식구들을 내보내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귀국하여 군입을 덜어주는 게 순리라고 판단했다.
아버지께서는 수년 전부터 포천에 있는 산정호수 인근의 야산에 과수원을 개간해오셨는데, 우리가 귀국하기 전 해에 첫 수확을 보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일한다면 훗날 그 과수원을 물려주겠다는 언질까지 주셨다. 과수원이 문제였겠는가, 늘그막에 자식을 보고 싶은 마음이셨겠지.
아내는 나를 위해 끼니마다 정성스레 음식을 장만하면서 과수원 일에도 열심이었다. 작업복 차림에 군화를 신은 채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묘목을 심고, 거름과 물을 주었다. 어느새 봄이 무르익고 과수들은 꽃을 피웠다. 매화꽃, 복숭아꽃, 살구꽃, 자두꽃…. 어여쁜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던 5월 초순 어느날 우리는 복숭아 묘목을 심기 위해 나섰는데,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아내는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어깨 통증을 호소했다.
아내의 어깨 통증은 전에도 몇 차례 있었으나 그때마다 의사들은 대수롭지 않다며 진통제를 처방해주었다. 진통제를 며칠 복용하고 나면 통증이 씻은 듯 사라졌기에 우리도 대수롭잖게 넘겼었다. 그러나 그날의 고통은 여느 때와 달랐다. 다음날 우리는 서울 강남의 진단방사선과 전문의를 찾아가 종합검진을 받았다. 문득 3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잠시 귀국해 머물던 동안 이곳에서 검진을 받았는데, 그때 나는 습관성 음주로 인한 지방간을 주의하라는 권고를 들었고 아내는 아픈 곳 없이 건강했다. 그런데 이번 검사 결과 귀국 전 넉 달 간 금주를 한 덕에 나의 간은 깨끗했다. 반면 아내의 어깨 부위에 온 통증은 간에서 자란 커다란 종양이 횡격막 주변의 신경을 건드리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로 그 주먹만 한 종양을 보여주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CT를 통해 전문의의 확진을 받아보셔야 하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겠습니다.” 잠시 멍해졌던 아내는 이내 “아직 확실한 건 아니죠?” 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난 온몸이 얼어붙은 듯 옴짝달짝할 수 없었다.
2005년 5월 16일 오후, 우리는 의사 선생님이 소개해준 진단방사선과에 가서 CT를 찍고 그곳 전문의의 소견서를 받아서 돌아왔다. 그날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가. 우리는 둘 다 눈앞이 캄캄하여 어디로 가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태연한 척 팔짱을 끼고 걸었다. 아내가 걸음을 멈추더니 길거리에서 만 원짜리 운동화를 골랐다. 아내는 시아재가 언젠가 노점에서 파는 운동화를 보면 한 켤레 사다 달라고 했다면서 아우와 발의 크기가 같은 내게 크기가 맞는지 신어보라고 했다. 그날 CT 찍는 순번이 많이 밀려 대기하는 동안, 우리는 큼직한 유리창이 달린 식당에서 일본식 메밀국수를 먹었다. 아내에게 생선회를 먹이고 싶었지만 우리 형편으로는 엄두가 안 났다.
그날 오후 늦게 전화를 받고 나온 아내의 친구가 저녁을 사줬다. 저녁 먹는 자리였는지, 헤어지기 전에 길가에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내의 친구는 슬픔을 누르지 못했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언니, 이 바보야.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 언니는 이제 얼마 못 살고 죽는 거야. 억울해야 되는 거야. 화내야 되는 거야. 울어야 되는 거야. 소리 지르고 펄쩍펄쩍 뛰어야 되는 거야.” 그러나 아내는 오히려 그녀를 도닥이고 있었다. “요즘은 암이라고 다 죽는 게 아니래. 진정해. 오진일 수도 있잖아. 요즘은 오진율이 50퍼센트도 넘는대. 오진이 아니더라도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 더 살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는 결국 죽는 거잖아.”
집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 안에서 우리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나도 그랬지만 아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한다. 우리의 뇌리에는 함께한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2인용 텐트에서 자면서 백날도 넘게 떠돌았던 히말라야의 산속, 노을 지는 룸비니 들판의 보리수 아래서의 긴긴 포옹, 남인도를 향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 보낸 3박 4일, 우리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소풍’을 지키고 있을 종업원 식구들. 그리고 정든 이웃들과 작별하던 귀국 직전의 나날들.
귀국 전 카트만두의 유명한 점성술사에게 점을 쳤었다. 점성술사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2005년은 아내 인생의 큰 전환을 맞는 시기이며, 이 시기를 잘 넘기면 향후 14년 동안 크나큰 행복을 누리며 살 것이라고 말이다. 아내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아내는 입원하러 갈 때마다 짧은 여행 떠나듯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우리는 네팔에서 트레킹을 다닐 때 쓰던 큰 배낭을 하나씩 메고 씩씩하게 걸어서 병원을 찾아갔다. 한강변에 위치한 병원은 특급 호텔처럼 으리으리했다. 간병동의 입원실 환자와 보호자들은 배낭을 메고 들어선 우리를 의아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침대에 마주 앉아 도시락을 펼쳐놓고 먹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소풍 온 연인 같다’며 웃었다.
아내는 10개월 동안 매달 일주일씩 입원해 모두 아홉 번에 걸친 ‘간동맥 화학 색전술’을 받았다. 오른쪽 대퇴부에서 간으로 직접 가는 대동맥을 통해 가늘고 긴 주사관을 암세포까지 밀어 넣어 암세포를 죽이는 약물을 주입한 후 그 혈관을 차단하는 시술이었다.
아내는 그 시술로 암세포를 약화시키고, 덩어리를 작게 만든 후 종양 부위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으면 10년 이상 더 살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내는 시술을 받는 틈틈이 불교나 명상에 관한 서적을 읽었으며, 천안에 있는 어느 명상센터에서 열흘 동안 위빠사나 명상을 하기도 했다. 아내는 네팔 카트만두에 살 때도 열흘씩 두 번에 걸쳐 위빠사나 명상을 한 일이 있다. 아내는 평소 달라이 라마의 저서들을 애독했다. 거기에는 누구에게나 결국 닥쳐오고야 말 죽음에 대한 지혜의 말씀이 가득했다.
간암 환자들 중에는 간동맥 화학 색전술과 명상 생활로 10년 가까이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아내의 경우는 악화되고 있었다. 후유증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간동맥 화학 색전술 초기에는 집에 돌아와 일주일 정도만 고통받고 나면 다시 입원하기 2~3주 동안은 그런대로 식사도 하고 한두 시간씩 산책도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5회를 넘기면서부터는 입원하기까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거렸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나마 조금 먹은 것마저 토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는 애당초 회생이 불가능한 말기 환자였다. 암세포는 폐까지 전이되어 있었다. 간동맥 화학 색전술을 계속 받더라도 6개월 이상 생존하기 어렵다고 본 의사들도 있었다.
지난해 3월 초순 열 번째의 간동맥 화학 색전술을 앞두고 입원했을 때, 아내는 더 이상의 진료를 거부했다. 어차피 6개월도 보장받지 못할 삶인데 시술 후에 오는 끔찍한 고통을 피하고 싶었으리라. 지금 돌이켜보면 혼자 남아 어렵게 살아가야 할 남편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려는 속내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우리는 부모님 집에서 멀지 않은 산정호수 근처의 허름한 민박집에 세를 들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시부모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에게 자신의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고통스러웠으리라.
우리는 봄눈이 하얗게 내린 3월 30일 아침에 새 집으로 이사했다. 아내는 자신의 생명이 하루하루 줄어든다는 생각을 잊어버리려는 듯 마당에 고추, 가지, 호박, 상추, 쑥갓 같은 채소를 심고 여름에 따 먹을 옥수수까지 욕심껏 심었다. 아내는 비료와 물을 주고, 잡초도 뽑았다. 나는 묵묵히 밭을 일구는 아내의 모습을 볼 때마다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얼굴을 돌려야 했다.
‘가슴 아프다’는 말을 대수롭잖게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가슴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듯도 싶다. 아내가 떠난 후로는 그녀가 심어 가꾸던 채소와 푸성귀, 그리고 여름에 따먹겠다고 욕심껏 심은 옥수수를 흘낏 스치기만 해도 가슴이 에었다. 아내가 시술로 인한 고통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누린 봄은 고작 한 달이었다. 그 한 달 동안 아내는 소생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 후 두 달 동안은 진통제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넘겼다. 아내는 말 못할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초여름을 맞았다. 아내는 첫 번째 혼수가 와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 가기 전날까지 집에 찾아오는 친지들과 지인들을 맞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온 혼수상태에서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눈을 감던 날 오전에 아내는 설핏 낮잠에 들었다가 깨어났다. “여보, 전에 살던 집에 가서 큰 주전자를 가져오세요. 접시도 있는 대로 다 가져오세요. 내일 우리 집에 손님이 많이 와요.” 아내는 숨을 헐떡이면서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의 배는 임산부처럼 불러 있는 데 반해 몸은 뼈만 앙상했다. 특히 얼굴은 해골을 연상시킬 만큼 말라서 두 눈이 평소보다 두 배쯤 커 보였다. “여보, 잘 생각해봐. 전에 살던 집에 무슨 그렇게 큰 주전자가 있어. 접시도 그렇고. 손님이 많이 온다는 것도 그렇잖아.” 아내는 그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 바보네. 꿈꾼 것도 분간을 못하고 있네. 그렇지만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어요. 돌아가고 싶어요.”
나는 아내의 생명이 사그라듦을 직감했다. 병원에서도 이제는 집에 모시라는 뜻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날 정오 무렵 우리는 호숫가의 집으로 돌아왔고, 아내는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어둑해질 무렵에 숨을 거두었다.
아내의 장례는 포천시립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르자는 중론이 있었으나 나는 그냥 우리가 살던 집에서 치르기로 결심했다. 객지에서 10년을 드난살이로 지내다 귀향한 아내를 낯선 영안실에 옮길 수는 없었다. 나는 혼수상태에 빠져 숨을 몰아쉬던 아내의 귀에 속삭였다. “여보, 당신 장례는 우리 집에서 치르기로 결정했어. 당신 이 집 좋아했잖아. 편안하게 가. 그리고 밝은 빛이 보이면 그 빛을 따라가. 우린 그 빛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근심 걱정 다 놓고 편안하게 가. 술 마시고 당신한테 심한 소리 한 것도 용서해줘. 여보, 내 말 들리지? 사랑해 여보, 너무너무 사랑해….” 혼수상태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아내는 사랑한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기침을 연달아 두 번 뱉으면서 아기가 토한 흰 젖 같은 액체를 입가에 흘렸다. 그리고 세상의 빛을 거두었다. 불국정사의 월정스님께서 ‘유족들이 너무 슬퍼하고 울부짖으면 영가 천도가 어렵다’고 하셨기에 나는 사십구재를 마치기 전까지 울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눈물이 흐르면 흐르는 그대로 내버려둔다. 흐느끼고 싶으면 흐느낀다. 나 혼자 남은 호숫가의 이 외딴 집은 남 몰래 소리쳐 울기도 좋다. 내 슬픔은 오래 남을 것이다. 하루 또 하루 미루다가 다 못한 사랑의 슬픔 말이다.
글을 쓴 김홍성 시인은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여러 잡지사에서 십수 년 동안 기자로 일했습니다. 20년 전 고은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고 시집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문학동네) 등을 내었습니다. 2002년에 아내 정명경(불명佛名 수자타) 씨와 네팔 카트만두에서 ‘소풍’이라는 조그마한 김밥집을 열었습니다. 여느 부부처럼 싸우고, 부둥켜안고, 웃고 울며 살았습니다. 부부가 함께 황량하고도 푸근한 히말라야 언저리를 10여 년 유랑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니 그간 남김없이 사랑했을 것 같은데, 남아 있는 한 사내의 가슴은 꼭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시인은 1년 4개월 동안의 암 투병 끝에 빛을 따라 돌아간 아내를 그리며 이 글을 보내주었습니다. 요즘 김 시인은 경기도 포천에서 지냅니다. 최근에는 몇 년 전 함께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지역을 트레킹하며 기록한 아내의 원고와 자신의 글을 모은 산문집 <히말라야, 40일간의 낮과 밤>(세상의 아침)을 냈습니다. 같이 있어도 홀로인 듯 유유하고 헤어져 있어도 함께인 듯 충만한 부부의 걸음 걸음이 새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