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토우土偶 중에는 돼지 형태도 있는데, 이는 지금 사람들이 무덤에 돈을 넣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듯싶다. 망자의 혼이 내세來世에는 배불리 먹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무덤에 넣어준 것이다. 고구려나 고려시대 사람들은 돼지를 신통력을 가진 동물로 생각해 수도를 정하거나 왕의 후사를 낳아줄 왕비를 알려주는 길잡이로도 이용했다. 돼지를 풀어놓으면 해당 지역이나 왕비 될 사람의 집에 가서 멈춰 섰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사람들은 돼지머리를 고사 상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돼지 돈豚의 발음이 돈錢의 발음과 비슷해서라고 하니 발상이 기특하다. 돼지저금통에 저금을 하고 돼지꿈을 꾼 사람들이 복권을 사는 것은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재산이 늘어나는 것과 상관있다. 십이지의 맨 마지막인 돼지가 맨 처음을 장식하는 쥐띠 전에 있다는 점에 착안, 돼지를 출발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윷놀이의 도겙퀋걸겴톩모가 여기에 해당되는데, 여기에서 도는 돼지를 뜻한다.
홍지연 씨는 신해辛亥년에 태어난 돼지띠 작가다. 그가 가나아트센터의 요청으로 그린 돼지 그림은 달콤한 멜로풍이다. 복을 의미하는 돼지의 몸뚱이 위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꽃이 피어났다. 멋있는 푸른 조끼를 입은 총각 돼지가 수줍은 아가씨 돼지에게 구혼을 한다. 두 돼지의 사이에는 모란꽃 다섯 점이 만개해 있다. 수퇘지의 청혼의 결과는 이 모란꽃들이 알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며 “복과 돈이 굴러 들어오고 행복이 터져 나올 때의 화사하고 즐거운 느낌을 내고 싶었다”고 한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해온 그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카르마’와 ‘여행’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의 집안은 외가 쪽으로 3대째 그림을 그려온 미술 가족이다. 외할머니는 동양화를 그렸고, 어머니 김아진 씨는 서양화를 그렸다. 늘 그림을 그렸지만 ‘간판’을 올리고 활동할 정도는 아니었던 그의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쥐어줬다.
“저는 다섯 살부터 열세 살까지, 유럽이나 말레이시아 등을 돌아다니며 살았어요. 그래서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에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다문화와 문화의 섞임을 관찰하는 데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그가 민화를 만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공부를 하다가 민화를 만났다. 처음에는 민화를 모사했고 그다음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로 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변형된 민화 그림을 그렸고, 다음에는 민화와 상관없는 소재들로 민화처럼 그려보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 앞에서는 기존의 지식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동양화의 소재를 서양화 기법으로 그림으로써 경계를 없애고, 민화 속 소재를 그대로 옮긴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의 그림에서 시간과 공간은 의미가 없다. 수많은 경계(분별)도 소용이 없다. 삶이 붙박이로 고정되지 않았던 유년 시절, 여러 나라를 다니며 살았던 그의 ‘여행’은 고정관념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그림을 탄생하게 해주었다. 다양한 문화가 ‘짬뽕’되어 있는 작업을 그는 기쁘게 여긴다.
“회화, 조각, 건축 등 집안 대대로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해왔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색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특별히 좋아하는 색도 싫어하는 색도 없어요. 그러나 혼합색보다 원색을 더 좋아해서 서로 섞지 않은 원색 물감을 써요. 색이 신기한 것은 (하나만 칠했을 때에는 조용해 보이던 색도) 다른 색을 칠해 색끼리 부딪치게 하면 색이 살아나는 것이에요.”
그는 다문화를 존중하지만 그림을 그릴 때에는 원색을 사용한다. 각 나라의 고유한 문화가 고저 없이 동등하고 소중한 것처럼 각각의 색깔들도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원색을 사용해 그린 그의 작품들을 보면 자꾸만 근원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뭇가지에서 새가 피어나고, 목도리에서 풀려 나온 올에서는 꽃이 피어난다. 닭 꼬리 위에서 나비가 자라고, 닭의 눈동자와 꼬리에 박힌 구슬이 같은 모양이다. 닭 벼슬도 자세히 보니 꽃이다. 문득 ‘화엄華嚴’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불교도냐 물으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니란다.
“동양철학에 기반한 작업을 하고 싶어요. 시공을 떠나고 싶어요. 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두가 한 덩어리 아니겠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것도 지나가는 한줄기(바람)에 지나지 않겠지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해놓은 것을 없애면 시공간이 없어지고 무중력 상태에 있게 되겠지요.(웃음)”
그에게 그림은 삶의 반려자. 그것도 애증의 관계라고 한다. 어찌할 수 없는 업보라고 여기기도 한다.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 보낼 수 있고,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늘 함께 있어야 하는 암수 한 몸 같은 운명의 반려자. 나중에 다른 이야기를 들으니 그의 말이 그제야 이해된다. 워낙 다양한 장르에 관심이 많은 그는 대학 졸업 후 영상, 입체미술, 무대미술, 단편영화 미술감독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을 했단다. 그러다가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4년 전. 다시 붓과 익숙해지는 데 1~2년쯤 걸렸다. 한 시간을 꼬박 그리면 두 마디 크기의 나비 한 마리가 세상에 나온다.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릴 때면 뇌가 ‘뱅뱅’ 돌아가는 느낌이라고 한다. 이 때문인지 그는 그림 그리는 일에 대해 ‘스스로를 사골 끓이듯 우려내는 작업’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더라도 2007년까지는 꼼짝 않고 작업실에서 그림만 그릴 예정. 자연과 사람이 섞여 있는 작품을 시리즈로 그릴 것이라고 한다. 작업 분야에서건, 인생에서건걖? 그는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니고 싶어 한다. 여행하다 더 머물고 싶은 곳에서는 좀 더 노닐다 다시 떠나겠다고 한다. 작업 활동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한다. 정주하지 않는 예술가. 그의 여행 기록을 뒤따르며 감상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 될 것 같다.
1 조선 후기에 그려진 ‘돼지를 지고 가는 망나니 그림’(온양민속박물관 소장).
2 <정해년 돼지그림>전에 전시되는 최석운 씨의 ‘담배 피는 돼지’(2006년).
돼지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
<복을 부르는 돼지>展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신광섭)의 정해년 돼지띠 특별전으로 우리 민속과 관련된 다양한 ‘돼지’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무덤 둘레돌護石로 꼽히는 김유신장군 묘에서 발굴된‘납석으로 만든 돼지 조각상’(통일신라), 고려시대 사람인 ‘최윤인의 석관石棺에 새겨진 돼지상’, ‘돼지가 그려진 국가 행사 깃발’,‘삶은 돼지고기를 담는 종묘제기’, ‘개와 멧돼지 모양의 토우’(통일신라), 밀양 표충사 대웅전 추녀마루에 있었던 장식용 기와 ‘저팔계 잡상’(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등 45점이 전시된다. 이 중에는 이발소나 상점에서 재복이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걸었던 돼지그림, 저축을 하던 돼지저금통 등 현대 민속과 관련된 물품들도 포함되어 있다. 2007년 2월 26일까지, 국립민속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문의 02-3704-3114
<정해년丁亥年 돼지그림>展 강용면, 금중기, 김점선, 사석원, 홍지연, 이유미, 최석운 씨가 돼지 또는 황금돼지를 주제로 작업한 작품 20여 점이 전시된다. 나무에 우레탄 컬러를 입힌 강용면 씨의 조각 ‘온고지신’, 황동에 니켈을 입힌 금중기 씨의 조각 ‘느슨한 충돌’, 활짝 웃는 돼지가 귀여운 김점선 씨의 ‘황금돼지’등 발랄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2007년 1월 7일까지 가나아트센터 1층 아트플러스에서. 문의 02-720-1055
<돼지꿈 꾸고 부자 되세요>展 대구에 소재한 대백플라자에서 준비한 신년 기획전. 김민수 씨 등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 12명의 돼지가 주제인 작품 40여 점이 전시된다. 12월 27일부터 1월 7일까지 대구시 대백플라자 갤러리 전관에서. 문의 053-420-8013
프로필 1971년 서울에서 출생한 홍지연 씨는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와 같은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전시 활동을 시작한 이래 40여 차례의 그룹전 및 기획전에 참가했다. 첫 개인전 <낯설은 풍경>(1996년) 등 네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8년 만에 개최하는 개인전이 2007년 4월 18일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