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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전문의 김혜남 파킨슨병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으면 이후 세 시간 동안만 움직일 수 있다. 약 기운이 떨어지면 가만히 누워 머리를 굴리며 다음 세 시간 동안 할 재미있는 일을 계획하면 된다. 그리고 마침내 움직일 수 있을 때 실천하며 웃으면 그만이다. 오늘 그가 재미있게 사는 이유다.

역삼동 자택 정원에서 애견 샤인과 함께. 약을 먹고 움직일 수 있는 시간 동안 애견을 돌보고 정원을 가꿀 수 있어 그는 오늘도 사는 게 즐겁다.



작년이었다. 곶자왈 숲 근처에 있는 제주 동쪽 선흘의 한 주택에서 정신과 전문의 김혜남 원장은 생애 처음으로 아내, 며느리, 엄마, 교수라는 이름을 내려 놓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 비록 혼자지만 좋은 재료로 요리를 만들어 먹고, 숲이 깊어 어둑한 곶자왈을 혼자 걷고, 친구가 연락해오면 스마트폰에 그린 그림을 보내면서 그는 외롭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그토록 즐거운 일인지 그제야 알았고, 자신이 한 요리가 솔 푸드처럼 달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지난 30년간 국립서울정신병원에서 수련의들에게 존경받는 교수로, 신경정신과의원의 원장으로, 나누리병원장의 아내로, 두 남매의 엄마로,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시부모의 며느리로, 여든 넘은 어머니의 딸로 살아왔다. 그리고 파킨슨병을 얻은 지 14년째 되는 해, 50대 후반에 난생처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만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괴테가 말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그러니 당신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방황하고 있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딱 한 가지다. “당신은 언제나 옳다. 그러니 거침없이 세상으로 나아가라!” _<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중에서


정신의학자에게 찾아온 파킨슨병
“내가 붙인 내 별명이 스리 아워 우먼three hours woman이에요. 약을 먹으면 세 시간 정도만 움직일 수 있어서 그렇게 부르지요. 약 기운이 떨어지면 누워만 있어야 하는데, 그때는 다음 약 먹을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면서 다시 움직일 수 있으면 세 시간 동안 무엇부터 빨리할지 계획을 세워요. 세 시간 동안 장을 봐서 요리하고 그림을 그리고 선흘 곶자왈에 산책도 가곤 하지요.”

사실 14년째 파킨슨병을 앓는 그가 작년에 갑자기 제주도에 내려간 것은 병세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2001년, 12년간 수련의를 교육하는 국립정신병원의 교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병원을 개원한 그는 정신분석가가 되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나려던 차였다. 국립정신병원에서 그는 사이코드라마 치료 전문가로 유명했고, 영화, 미술, 예술 작품에 대한 정신분석 칼럼과 논문을 발표하며 정신분석학회에서 학술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던 정신분석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고, 미국에서 3년 동안 꼬박 일주일에 서너 번씩 자신의 정신 분석을 받으며 공부해야 겨우 취득할 수 있는 정신분석가 과정의 진학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쌍둥이처럼 붙어 지내던 한 살 위 언니가 대학교 진학 직후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자, 그는 두 명의 몫을 하려고 의자에 몸을 묶어 공부해 의대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혼자 힘으로 학비를 벌어 의대에 다니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인턴 시절 환자에게 응급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첫아이를 유산하고 다시 두 아이를 낳았으며, 남편이 전문의로 자리 잡기까지 좁은 주공아파트에서 시부모와 시동생, 두 자녀를 부양하며 1인 다역을 했다. 그 시간을 오롯이 버텨내고 남편이 척추 전문 병원을 개업하자 그제야 자신의 꿈을 이루려던 것이었다.

그즈음, 글씨를 쓰려고 할 때마다 글자 크기가 고르지 않고 오른쪽 다리의 감각이 둔화되는 증상이 나타났다. 많은 의사가 그렇듯 그도 “운동이 부족해서겠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 혼자 양치질을 하기도 힘들어 병원에 간 날, 파킨슨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마흔 세 살, 자신의 정신의학 연구소를 개업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병원에 가던 날 오후에 한 단체에서 강의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어요. 강의를 겨우 마치고 택시를 탔는데 그때부터 눈물이 쏟아졌어요. 병원 문을 닫고 한 달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습니다.” 파킨슨병은 손발이 떨리고 몸이 굳는 신경퇴행성 질환이다. 약으로 병의 진행을 늦출 뿐 현재까지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 걷기, 말하기, 글씨 쓰기나 표정 짓기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한 걸음을 걸으려면 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보통 발병 후 15년이 지나면 사망하거나 치매와 우울증, 사고력 저하 등을 동반한 심각한 장애가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파킨슨병이라니! 마침 그의 환자 중 한 명이 파킨슨병을 앓았고, 면담 진료를 할 때 “온몸이 잠자리 날개처럼 떨리고 아파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하소연해서 그는 파킨슨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은 중학생, 딸은 초등학생이니 그 얼마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인가.

파킨슨병 발병 후에도 다섯 권의 책을 낸 그는 심리학 도서 분야의 베스트셀러 작가다.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데 1~2년을 보내기에 막상 책 쓰는 시간은 2개월 남짓 걸린다. 그가 다음 책에 쓰려는 주제는 ‘공포’. 불안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기적 문제지만, 공포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여서 사람은 공포 때문에 폭발하거나 피해버린다. “너 이거 사고 싶지?”가 아니라 “이거 안 사면 사회에서 소외돼”라는 식으로 요즘은 광고도 경제도 개인의 공포를 자극한다. 이것이 김혜남 원장이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정서를 ‘공포’라고 생각하는 근거고, 다음 책을 준비하는 이유다. 
한 발짝만 떼면 되는 거였구나!
“한 달 동안 누워만 있다가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항우울제를 먹으려고 할 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리가 잘려도, 화상을 입어도 조금 불편해진 것뿐이지 그 사람은 그대로잖아요? ‘미래가 불안한 건 모든 사람이 다같이 느끼는데 내가 왜 오지도 않은 미래를 끌어다가 현재를 망치는 거지?’라는 질문에 닿자, 이러다 결국 잃어버리는 건 현재의 나 자신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죠. 이제 병의 초기 단계니 내 컨디션에 맞춰 일을 줄여가면 되고 미래는 가서 부딪치면 되는 거였죠. 그래서 다시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를 계속 방치할 수 없었다. 환자가 의사를 걱정하게 하면 안 되니 그가 병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릴 수도 없었다. 1년 또 1년 그의 몸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의 진료는 예전의 임상 경험보다 더 놀라운 공감 능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4년, 변함없는 진료와 강의를 하고 두 자녀를 성인으로 키워낸 지금, 몸을 많이 떨고 약 기운이 떨어지면 움직임이 힘들지만 여전히 사고력에는 문제가 없고 우울증도 경미하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게다가 정신분석가 코스를 포기하는 대신, 그간 공부한 내용으로 책을 다섯 권 출간해 심리학 부문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발병 첫해에 쓴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가 국내 심리학 서적 출간 열풍의 시발점 역할을 했고, <서른 살이 심리학에 묻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 답하다> <어른으로 산다는 것> 등이 계속해서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도 독자는 물론 지인도 이토록 왕성한 지적 활동을 하는 작가가 파킨슨병을 앓고, 약을 먹고야 겨우 몇 시간만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여태 몰랐다.

“환자를 진료할 때는 프로페셔널이 되니까 제 병하고는 큰 관계가 없었어요. 제가 몸이 안 좋은 건 주변에 간간이 이야기했지만 병명을 밝힌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제가 신경 계통의 질환이 있어 보여도 여러 활동을 하니까 그리 위중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더군요. 그런데 작년에는 지옥을 오락가락했습니다. 환자를 면담하고 나면 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였죠. 그러다 작년 1월 3일에 출근하려고 눈을 떴는데 이 몸으로 진료를 하러 가는 자신이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 달을 더 쉬었는데도 몸이 더 나빠져서 요양을 하려고 제주도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 석 달간 혼자서 지냈다. 제주도로 내려가면서 가족에게는 공기 좋은 데 가서 치료에만 전념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가족에게 짐이 되는 게 미안했고 병세가 악화되어 미루던 2차 약을 복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주도에서의 평화로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급기야 어느 날 밤에는 코앞에 있는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몸을1cm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화장실이 바로 앞에 보이는데 한 걸음도 갈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옷에 볼일을 볼 것 같은데 집에는 저 혼자였죠. 화장실 쪽을 보면서 움직이려고 애쓸수록 앞으로 꼬꾸라지기만 하다가 우연히 제 발을 보았어요. 그때 발을 응시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 만큼만 떼보자고 생각하니 신기하게도 조금씩 움직여지는 거예요. 가야 할 곳만 볼 때는 한 발짝도 못 움직였는데 말이에요. 마침내 코앞의 화장실까지 가는 데 5분이 넘게 걸렸고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바로 이거였구나!’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날 밤 그가 겪은 일이 마치 요즘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젊은 나날. 그럴 때는 어디를 가야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만큼만 어떻게든 한 발짝만 떼어보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팔순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다시 서울의 집으로 올라왔고, 7년 만에 다시 책을 쓰기 시작해 지난달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를 펴냈다.

집 뒤쪽에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직접 길러 먹고 새벽마다 운동을 하면서 병세가 호전되어 발병 14년째지만, 여전히 약을 먹으면 재미있는 일을 하고 책을 쓸 수 있어 행복하다.
강한 것을 강화해야 움직인다
“10여 년 전에 제가 처음으로 심리에 관련한 책을 쓴 건 ‘나를 알자’라는 뜻에서였어요. 무엇이 무서운지를 알면 그걸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기듯 나한테 이런 요소가 있는 걸 알면 그걸 이겨낼 힘이 생기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힐링이라는 말에 치중해 위로와 공감만 얻으려고 하니 안타깝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되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도 안 되면 차차선이 있으니까요. 나중에 가보면 그 차차선이 내 최선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해요. 끝까지 살아 봐야 그걸 아는 겁니다.”

병세가 악화될 때마다 김혜남 원장도 슬프고 우울하다. 하지만 원망은 하지 않는다. 누구한테든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데 유독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일종의 자기 과대이고 유아적 전지전능감이기 때문이다. “의사로서는 생각하지 못한 많은 것을 환자가 되어 알았어요. 우리 뇌가 중앙 정부면 몸은 지방 정부예요. 몸의 기능이 하나 떨어지면 반드시 다른 기능이 보충을 해줍니다. 내 경우 오른쪽 다리가 먼저 약해져서 힘을 줘도 꿈쩍도 안 했어요. 그런데 대신 왼쪽 다리에 힘을 줘서 움직이면 오른쪽 다리도 같이 따라가더군요. 즉 약한 쪽에 초점을 맞추고 단점을 고치려 애쓰기보다 오히려 장점에 집중해 그것을 강화하는 것이 낫습니다. 못하는 것을 잘하려고 하면 낭비되는 에너지가 많은데 그 시간에 장점을 키워나가면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죠.”

이런 깨달음을 얻으며 잘 이겨내고 있지만 물론 “내가 뭘 잘못했지, 열심히 살았는데” 하는 한탄도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갇혀 잃어버리는 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현재뿐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런 쓸모없는 한탄이 찾아올 때면 그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한다. 점수를 더 많이 따면서 기왕이면 재미있게 살자고 다짐한다. “언론에서 ‘명사 인터뷰를 청합니다’라고 하면 ‘저는 동사입니다’라고 웃습니다. ‘~싶다’는 조사나 부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그러니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됩니다.”

김혜남 원장은 “가다가 멈추면 아니 간 것만 못하다”는 말은 틀렸다고 잘라 말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간 만큼 더 간 것이고, 그만큼 경험을 얻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말이 인생의 진짜 지혜다. “침대에 누워 한탄하며 살든 아픈 다리를 끌고 밖에 나가든 어차피 살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사느냐는 건 자기의 선택이에요. 틀리다 맞다 하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해나가다 보면 어딘가에 도달하고 도착해 있을 겁니다. 그 과정이 바로 ‘사는 것’이죠. 이럴 때는 이렇게 대비해야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해야 하고 하면서 경우의 수만 따지면 생각 속에 머물러 밖에 나가지 못합니다. 머리만 터질 듯 아프고 겁은 겁대로 나지요. 그러니 그저 자신을 믿고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남편이, 가족이, 친구가 안부를 물으면 문자 메시지 대신 스마트폰에 직접 그린 재치 있는 그림으로 답장을 보내 웃게 만드는 김혜남 원장. 유머는 병도 관계도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약이다. 
유머의 힘은 역시 세다
자신을 믿고 한 발짝씩 나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외로움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되물었다. 그것은 ‘신뢰’,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대한 신뢰라고 했다.

“내 옆에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도 저 문만 열고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받아 주고 사랑해주고 환영해주는 존재라고 느끼면 그 외로움은 고독입니다. 고독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외로움이죠. 하지만 여기서나 저기서나 아무도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고 세상은 차가울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병이 되는 ‘외로움’이죠. 사랑을 하기 위해서도 신뢰해야 하고, 경계를 인정하며 관계를 친밀하게 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려 해도 자신과 타인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지요.”

우리 안에 비록 나쁜 게 있고 분노가 있어도 ‘나는 충분히 이런 것을 조절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신뢰만 있으면 그것은 그리 무섭지 않다. 하지만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면 자기가 괴물 같고 무섭게 생각되며 다른 사람들도 무서워진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에서는 신뢰를 회복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김혜남 원장이 다시 서울에 올라와 새 책을 쓰고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애견을 돌보고, 커피를 내리고, 요구르트와 치즈를 만들며 지내는 기적 같은 회복이 일어난 데도 이 신뢰가 큰 역할을 했다. 문을 열고 나올 때 보듬어주는 가족이 있기에 제주도에서 혼자 보낸 시간은 그가 선택한 고독이었다. 제주도까지 내려와 딸의 다리가 움직이도록 붙잡아준 여든 넘은 친정어머니, “엄마 다시는 어디 가지 마세요”라며 달려 나온 남매, 지금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 아내의 운동을 도와주고 출근하며, 하루에도 수차례 안부 전화를 하는 남편의 사랑이 도돌이표 노래처럼 이어져 그의 병세를 놀랍도록 호전시키고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내가 아프다며 계속 인상만 쓰면 가족이 지치겠죠. 그들도 다 성인이니 각자 일상에 들어가면 나를 잊어버릴 수밖에 없고요. 또 사람들은 내 병을 알고 나면 어쩔 줄 몰라해요. 그러니 나도 덜 불행하고 주변 사람도 덜 불행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어요. 제가 누워 있는 침대에서 웃음이 나오면 되겠다 싶었죠. 그래서 가족이나 지인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문자 대신 스마트폰으로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서 보내줘요. 이왕이면 유쾌한 환자가 되고 싶어서죠. 참 신기한 게 유머를 던지고 나면 내 병이 한층 가볍게 느껴지고 기분이 좋아져요.”

가족에게도, 동료에게도,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매처럼 단짝으로 지내던 여섯 명의 친구에게 그는 “스리 아워 우먼 납시오!”라고 자신의 별명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몸 상태가 나빠져 약 기운의 지속 시간이 줄어들 때면 “요즘은 스리 아워 우먼이 아니라 투 아워 우먼이야”라고 바꿔 말해야 하지만, 그래도 역시 유머의 힘은 세다. 유머를 한 사람이나 유머를 받는 사람이나 잠시나마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밝게 웃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지금 같이 있는 순간에 서로 기분 좋게 해주려고 노력하면 그게 쌓여서 관계가 좋아집니다. 거창하게 생각하다 현재를 잃어버리지 마세요.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면서 부모가 아직도 같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자식이라도 나를 도와주는 것에 감사하며 순간을 한껏 즐기세요. 그게 이별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태도입니다. 그래야 쉽게 이별할 수 있어요. 현재에 충실하세요.”

떨리는 손으로 좋아하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티 커피를 갈고 물을 부어 핸드 드립 커피를 손님에게 대접하며 그는 인터뷰하는 시간을 즐겼다. 사진을 찍느라 세 시간 가까이 흘러 하루 세 번 먹는 약 외에 응급 약을 한 번 더 먹어야 했는데도, 지금 해야 할 일을 천천히 하지만 즐겁게 하는 그를 보며 오늘 내가 재미있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떠올려보았다. 오늘 고독해도 신뢰하는 가족과 친구가 있고, 지금 생각이 복잡해도 일단 발을 떼면 미래의 어딘가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오늘을 온전히 가진 내가 사는 게 재미없을 이유가 무엇인가.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미래만 뚫어지게 보지 말고, 내 발밑의 지금을 보라. 그래야 쉽게 이별할 수 있다. 이별은 모든 사람의 내일이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좋은 대로, 좋지 않은 날엔 그런대로 하루를 재미있게 보내려고 애쓴다. 무엇보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아직 많다. 중국어 공부도 제대로 하고, 진짜 끝내주는 요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대접하고 싶고, 서해 남해 동해를 한 바퀴 쭉 돌아보고 싶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아서인지 사는 게 재미있다. _<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중에서



글 김민정 기자 | 사진 하성욱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