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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과 아이가 모두 좋아하는 취미 생활 세계의 보드게임 문화
우리 인류가 게임을 즐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시기는 기원전 3000년경으로, 철기의 사용(기원전 1000년)이나 화약의 발명(1000년)보다 더 빨랐다. 즉 사람은 먹는 고민을 해결한 후 점차 수준 높은 사고를 하기 시작해 문명을 일구어냈는데, 놀이는 그 문명의 일부분이었다. 네덜란드의 문화학자인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 로 정의하며, ‘놀이’를 모든 문화 현상의 기원으로 여길 정도로 놀이의 역사적 공간적 의미가 크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놀이가 산업적으로 발달한 시기는 놀이판과 간단한 물리적 도구를 이용해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보드게임이 인기를 끈 19세기 후반부터다.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7만여 종의 보드게임이 출시되었고, 매년 1천여 종의 게임이 새로 선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저작권 문제에 둔감하던 시기에 외국 게임을 모방해 만든 해적판 게임을 하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이것이 보드게임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다 2000년대 초, 유럽식 보드게임의 본고장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보드게임 문화가 발달한 나라인 독일의 보드게임이 소개되었고, 사회가 각 가정에 ‘보드게임의 밤’을 권장할 정도로 보드게임의 정서적 효용을 높이 평가하는 미국의 문화, 자녀 교육용 게임이 발달한 이스라엘의 게임 문화 등이 알려지면서 한국인이 즐기는 보드게임의 스펙트럼이 한층 넓어졌다. 이후 사교 문화의 나라답게 보드게임에서도 아름다운 그림과 감성적인 규칙을 중요시하는 프랑스, 캐릭터 카드 게임을 즐기는 일본 등을 비롯해 이탈리아, 폴란드, 오스트리아 등의 보드게임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많아졌고, 우리나라도 ‘코코너츠’ ‘아브라카왓?’ ‘잘그락 왕국’ 등 우리의 문화적 정서를 반영한 창작 게임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프랑스의 딕싯
상상력과 공감 능력이 우승 비결이다

유럽에서 보드게임 문화가 발달한 나라는 독일, 네덜란드, 영국, 북유럽 국가 등이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도 보드 게임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만 서유럽이나 북유럽 국가에 비해 열세인 편인데, 그 이유를 기후에서 찾곤 한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는 연중 화창한 날이 많으니 실내에서 보드게임을 하는 것보다 야외 활동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만은 예외라 할 수 있다. 프랑스도 기후가 온화한 편이지만 예로부터 실내 게임 문화가 발달해 유럽에서 독일 다음으로 보드게임 산업 규모가 큰 나라다.

프랑스 보드게임의 특징으로 독특한 일러스트 스타일을 들 수 있다. 독일 보드게임의 일러스트가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차분하다면 프랑스 보드게임의 일러스트는 화려하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쉽고 빠르게 다 같이 웃으며 즐기는 파티스타일의 게임이 강세를 보인다.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시키는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딕싯’을 들 수 있다.

딕싯은 다양한 그림을 보고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감성적 게임. 상상력을 자극하고 공감 능력을 점수로 표현하는 기발한 발상이 특징이다. 심리 치료를 보드게임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진 딕싯은 보드게임의 본고장 독일에서 올해의 게임상을 거머쥔 작품이며, 프랑스의 국민 게임으로 등극했다. 전 세계에서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TV쇼에서도 종종 소개되었다.


독일의 카탄의 개척자
경쟁자가 곧 협력자임을 알려주다

독일은 현재 세계 보드게임 문화의 중심지다. 14세기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에서 시작한 독일의 우수한 인쇄술, 그리고 남유럽 국가보다 기후가 척박해서 주로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긴 문화가 독일인이 보드게임을 즐기게 된 이유로 알려져 있다. 독일 보드게임업계가 전문가의 심사를 거쳐 해마다 최고 게임을 선정하는 올해의 게임상(Spiel des Jahres)을 개최할 만큼 대중의 관심이 높으며, 세계 4대 보드게임 박람회인 에센 게임 박람회(Essen Spiel)도 개최해 해마다 더욱 수준 높은 게임을 선보인다. 이런 노력이 상징적 결실을 맺은 것은 1995년에 개발한 ‘카탄의 개척자’ 가 성공한 이후부터다. 이 게임의 인기는 미국의 보드게임인 모노폴리의 성공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카탄의 개척자는 가상의 무인도에서 밀, 나무, 철 등의 자원을 모아 재투자하며 발전해나가는 게임으로 모노폴리와 닮은 점이 있다.

하지만 상대의 부동산까지 모두 차지해야 우승하는 모노폴리의 게임 방식과 달리 카탄의 개척자는 상대의 자원을 빼앗는 일이 거의 없고, 플레이어들은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교역 등으로 협력하는 구도다. 그리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독점하지 않고 경쟁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누가 이길지 예측할 수 없다. 점수를 얻는 방법도 다양해서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독일 보드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생각해야 이길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 한 시간 정도 치열하게 머리싸움을 해야 하는 게임이 많고, 지금도 그런 게임이 쏟아져 나온다. 카탄의 개척자를 선두로 한 이런 방식의 독일식 보드게임은 전 세계에 퍼져 세게의 보드게임 마니아는 물론 각국의 보드게임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의 모노폴리
경제 개념을 깨우쳐주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인 미국에는 그만큼 다양한 게임이 발달했는데, 특히 가족이 함께 보드게임을 즐기는 날인 ‘게임 나이트’ 등의 행사를 진행하는 등 가족이 보드게임을 함께 하는 문화를 장려한다. 미국인에게 사랑받는 대표 게임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노폴리’. 대도시에 가면 그 도시 버전의 모노폴리가 있고, 스포츠 팀 버전의 모노폴리, 특정 드라마 버전의 모노폴리 등이 선보일 만큼 인기가 높아 해외에서도 ‘보드게임의 대명사’로 통한다. 대공황이 세계를 휩쓴 1930년대는 대량생산을 통해 상업화된 보드게임이 처음 등장한 시기로, 미국의 국민 게임인 모노폴리도 그 무렵 선보였다. 모노폴리는 게임 판 곳곳을 여행하며 부동산을 사고, 지역을 확장해 경쟁자보다 이익을 늘려나가며 모든 부동산을 소유하는 마지막 한 명이 우승하는 이야기 구조다. 경제공황 시대에 경제적 승리자가 되고 싶던 당시 사람에게 게임으로나마 성취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 모노폴리가 히트한 비결일 것이다. 현재 모노폴리는 세계 80개 이상의 국가에서 27개 이상의 언어로 발매되고 있으며 역대 판매량이 2억 5천만 개를 넘는 보드게임의 클래식 명작이다. 또 모노폴리는 미국의 영화, 소설, TV 쇼 등에 흔히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이며 가정에서 모노폴리를 하며 경제관념을 익히는 게 전 세계 어린이의 성장기에서 중요한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노폴리의 모방작인 부루마불이 오랫동안 어린이의 경제 교육용 게임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탈리아의 뱅
영화를 보듯 카드 게임을 하다

이탈리아는 유럽 보드게임 문화에서 중심은 아니지만, 독일 보드게임 산업을 이끈 사람 가운데 이탈리아 출신 작가들이 있다.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인 레오 콜로비니는 “이탈리아에서 보드게임을 파는 것은 북극에서 냉장고를 파는 것만큼 어렵다”고 이탈리아의 보드게임 문화를 평가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보드게임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뱅’으로, 2002년에 만들었으며 스파게티 웨스턴spaghtti western 무비의 총격전을 그린 카드 게임이다. 폭력을 순화해 코믹한 분위기로 만든 총격전 자체도 즐겁지만, 스파게티 웨스턴 무비의 유명 캐릭터들과 클리셰의 깨알 같은 패러디도 즐거운 이탈리아적 감성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세계적으로 성공한 메가 히트 카드 게임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일곱 명 모였을 때 할 만한 게임”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국내 보드게임 유통사가 해외 히트작의 공식 한국어판을 내기 시작한 것이 2007년 이후인데, 뱅은 그 인기 때문에 이보다 앞서 공식 한국어판이 발매되기도 했다.


일본의 인생게임
전통적 스고로쿠 방식을 즐긴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놀이 문화를 중요시 여기는 나라다. 바둑이나 마작 같은 게임은 중국에서 시작했지만 근대 이후 규칙의 표준화나 전략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진 곳은 일본인 것만 보아도 일본 문화에서 놀이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전통 놀이로는 ‘스고로쿠’라는 주사위 놀이가 유명한데, 많은 디자이너가 우리나라의 윷놀이처럼 스고로쿠 놀이판을 다양한 디자인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또한 종종 잡지 부록 등에 선물로 포함될 만큼 많은 일본인에게 친숙한 전통 보드게임이다.

반면 요즘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보드게임은 ‘인생게임’이다. 아마도 룰렛을 돌려 나온 수만큼 이동하고 도착한 칸에서 알려주는 지시에 따라야 하는 진행 방식이 스고로쿠와 비슷해서 인기가 높은 것으로 본다. 대학을 갈 것인가 취업을 할 것인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집을 마련하는 등 인생의 전 과정을 따라 선택과 결정을 반복해야 하는 인생 게임은 본래 미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는데, 일본에는 자국의 사회상을 반영한 일본판 인생게임도 출시되었다.

과거 일본은 해외 게임이 인기를 얻지 못해 보드게임 문화의 섬이라고 불렸으나, 최근에는 해외 작품의 일본어판 정식 발매가 크게 늘어났고 일본 작품 또한 해외에 많이 알려지고 있다. 일본의 창작 보드게임 중에는 부속품이 적고 게임 시간이 극도로 짧은 이른바 ‘마이크로 게임’이 인기다. 성에 갇힌 외로운 공주와 그녀를 흠모하는 주변 사람 이야기를 그린 작품인 ‘러브레터’가 대표적 예로, 낭만적 소재와 재미있는 심리전인데도 3분 정도로 압축해 즐길 수 있어 북미와 유럽에서도 크게 성공한 작품이다.


한국의 보드게임
새로운 가족 문화로 떠오르다

국내에서 본격적인 상업용 보드게임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 초 ‘부루마불’이 등장한 이후다. 부루마불은 책자로 만든 규칙, 당시로는 매우 고급스러운 건물 모형과 지폐 등으로 어린이에게 매우 혁명적 인상을 남겼으며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콘텐츠가 상당 부분 수록된 것도 특징으로 한국 보드게임의 대명사가 되었다.
국내에서 보드게임은 비디오 게임의 발전과 함께 쇠락하고 2002년 유럽식 보드게임을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 카페가 등장한 뒤에야 다시 주목받았다. 카탄, 카르카손, 클루, 보난자, 할리갈리 같은 해외 보드게임이 이때 많이 알려졌다. 이후 세계 각국의 보드게임 문화가 알려지고 자녀 교육, 어른의 사교 활동과 취미 활동으로 보드게임이 인기를 누리면서 현재는 해외의 인기 보드게임 상당수가 한국어판으로 정식 발매되고 있다. 독일의 대표 게임은 물론 프랑스의 딕싯, 이탈리아의 뱅, 이스라엘의 루미큐브 같은 게임도 국내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코코너츠’ ‘아브라카 왓?’ 같은 국내 게임이 유럽과 북미로 수출되어 호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거실에 모여 앉아 있어도 아이나 어른이나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느라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요즘 가정의 저녁 시간. 사람이 그리워 셰어 하우스에 모여 살고, 동호회에 나가 집밥을 나눠 먹는 우리 사회의 현실과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도 공통된 화제를 찾지 못해 이내 대화가 끊긴다면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각국의 가정과 모임에서 즐거운 놀이로 사랑받고 있는 보드게임에 관심을 가져보자. 마당에 멍석을 깔고 소박한 윷판 하나만 펼쳐놓을 뿐인데도 앞집 아이도 뒷집 어르신도 신나게 하나가 되었던 윷놀이의 재미를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간 기회가 없고 방법을 몰라서 그 즐거움을 잊어버리고 살았다면 식탁에서, 잔디 위 돗자리에서, 어디서든 둘러앉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을 가족의 취미 생활로 추천한다. 또한 유명한 보드게임 하나만 할 줄 알면 세계 어느 곳에서든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릴 수 있으니, 이 간편하고 재미있는 소통의 도구를 이제부터라도 생활 속에서 활용해보시기를.



글 박지원(코리아보드게임즈 개발팀) | 사진 이창화 기자 | 담당 김민정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