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책거리 그림 2006
박하사탕을 처음 맛볼 때처럼 머리 속이 환해진다. 그림 형식만 ‘책거리’이지, 안의 내용물은 우리네 일상과 관련된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 전통 민화의 형식을 차용, 현대인의 일상용품을 내용으로 삼은 풍속화 같은 작품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그림을 팝아트 계열로 분류하기도 한다. 어떤 양반이 그린 그림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지혜 씨는 민화에서 볼 수 있는 소재 특히 ‘책거리’와 풍속화, 풍경화와 오방색 그리고 섬세하고 정교한 기법 등을 현대의 일상적인 오브제와 인공적 색채로 변형시켜 또 다른 시각의 현대적 풍속화로 그려낸다.”(김미진, 세오갤러리 디렉터)
이 그림을 그린 화가 김지혜 씨는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다. 또래 친구들처럼 만화와 영화를 즐겨 보고, 록이나 펑크 음악에 열광한다. 그림에는 빨간색과 분홍색을 즐겨 사용하지만, 실제 자신 소유하고 있는 옷이나 물건 중에는 붉은 계열이 없는 독특한 취향을 지닌 유망 작가다.
1 책거리 그림 2006
2 럭셔리 라이프 'Luxury (still) Life' 2005
“고등학교 때 처음 한국화를 접했는데, 먹 갈고 선 그리는 것을 아주 좋아했어요.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분야라고는 생각이 들어 대학에서도 한국화를 전공으로 선택했고요. 대학생 때에는 옛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매일 청록산수를 모사했어요. 작업은 재미있었지만 그림 내용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괴리감은 떨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민화에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것. 2001년 즈음부터 전통과 현대를 결합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도전했다. 민화를 모사하면서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사물들을 하나 둘 그려 넣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민화나 산수화 같은 전형적인 그림을 모사했어요. 작자 미상의 산수화를 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품에 활기를 주고 싶다는 마음, 무명씨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그는 ‘그림과 생계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유치원에서 어린이를 가르치고, 잡지 등에 일러스트레이션을 기고하는 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민화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색을 쓰고 싶어 했던 20대 중곂캣駙〈?빨강 에나멜을 칠해 반짝이게 했던 적도 있다. 꾸준히 작업하며 작업 세계를 다진 끝에 현대인의 일상이 발랄하게 드러나는 섬세하고 유머러스한 작품으로 발전시켰다. 다소 거칠게 보이던 작품들은 안정감을 찾았고 그만의 섬세한 스타일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위) 럭셔리 라이프 'Luxury (still) Life' 2005
그렇다고 그가 ‘책거리’ 같은 민화의 틀을 빌린 그림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그의 관심은 전통회화 전반에 걸쳐 있다. 3년 전에는 단청을 소재로 4~5cm의 정사각형 아이콘 그림을 수백 점 그려 설치물로 만드는 실험성 넘치는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그가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여자를 밝히다>전에 출품한 ‘여인평생도’는 위대한 사람의 일생을 병풍 형식으로 그린 전통회화 ‘평생도平生圖’ 방식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한국의 전통 이미지와 형식에 집착하는 편이다. 개인적 취향과 작가적 책임감(동시대의 감수성과 미감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묘하게 결합된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핸디캡인 동시에 원동력이 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이중성의 원리다. 그들을 변형하고 조합하는 과정과 결과물이 지금 현대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염두에 두고 작업한다. 개인적 취향과 시대적 산물로서 작품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은 어렵지만 중요한 과제다.’(<여자를 밝히다>전 도록 중에서)
그에게 작품이란 자신의 일상. 포괄적인 의미에서는 한 시대의 미감과 동시대성을 표현함으로써 대중과 소통하는 매개체다. 때문에 그에게는 전시장조차 거대한 캔버스가 된다. 그가 회화와 더불어 설치 작업을 병행하는 것은 전시장이라는 거대한 캔버스에 그림 그리듯 작품을 설치할 수 있는 매력때문이다. 전시 기간의 종료와 함께 작품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점도 매혹적이다. 그의 캔버스가 넓기 때문일까? 옛 시대의 아이콘과 현대의 아이콘을 결합한 그림을 필두로, 하고 싶은 작품이 너무 많다고 한다. 작업하고 싶은 마음의 열정을 손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저는 제가 자연스럽게 발전하도록 놔두는 편이에요. 그림은 보여지는 예술이고 ‘그때’만 할 수 있는 작업들이 있거든요. 앞으로도 물 흐르듯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겁니다. 향후 몇 년 동안은 전통이라는 모티프를 기반으로 한 작업에 매진할 거예요.”
이제 막 주류 화단에 얼굴을 내민 그를 두고 ‘떴다’고 여겼는데, 정작 그가 보여준 것은 ‘새 발의 피’만큼도 되지 않는 것 같다. 독일 신표현주의의 대가 안젤름 키퍼와 브라질 태생의 어슘 비비드 아스트로 포커스를 좋아한다는 그에게 ‘무서운 30대’라는 별칭을 붙여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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