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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의사회 구호 활동가 이선영 박사 행복은 다른 이의 눈빛에 들어 있다
삶의 목표가 뭐냐고 물었더니 “다른 사람이 내게 미소 짓는 상황을 계속 만드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연한 계기로 남을 도왔을 뿐인데, 그 사람이 살고 내 마음이 충만하고 내 몸이 건강해지며 이토록 근사한 삶의 목표까지 나도 모르게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지금 바로 이 일거양득의 일을 안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최근 파키스탄에서 국경없는의사회 구호 활동을 마친 산부인과 전문의 이선영 박사의 경험에 귀 기울여보자.

2012년 문을 연 국경없는의사회 한국 지부 사무실의 세계 구호 활동 지도 앞에서. 
한 아이가 엄마에게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며 울먹였다. 가만히 듣던 엄마는 “아니야, 너는 똑똑한 아이야”라며 용기를 북돋우는 대신 “밖에 나가서 누구든 잠깐 도와주고 오라”고 했다. 동네에 나간 아이는 큰 가방을 들고 지팡이까지 짚고 건널목을 건너던 할머니를 보자 그 가방을 들고 부축해 함께 길을 건넜다. 건널목 끝에 이르는 데 불과 몇 초, 아이는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고 기분 좋은 토끼처럼 총총 걸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 심리학 서적에서 읽은 이 에피소드는 정신의학 용어인 ‘헬퍼스 하이helpers high’ 현상을 설명해준다. 미국의 내과 의사인 앨런 룩스가 <선행의 치유력>에서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남을 도울 때 혹은 돕고 나서 대부분의 사람이 정서적으로 충만한 기분을 느끼고, 나아가 그 사람의 신체에까지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을 뜻한다.

최근에 다녀온 파키스탄에서는 지역 여성들처럼 하루 종일 얼굴을 가리고 진료해야 했다. 탈레반 장악 지역인 아프가니스탄 국경의 산악 지역은 지난 20여 년간 여성 교육이 금지되어 모성 사망 위험이 큰 곳이다. 
“그래, 한번 해보자”
국제 인도주의 의료 구호단체인 국경없는의사회를 통해 나이지리아, 남수단, 라오스, 파키스탄 등에서 의료 활동을 하고 돌아온 산부인과 전문의 이선영 박사. 불과 2~3년 전까지 매일 아침 그의 기분은 위의 심리학 에피소드에 나오는 아이와 같았다. 학창 시절 내내 공부 잘하는 여학생으로, 서울성모병원의 임상 펠로와 하버드 의대 연구원을 거친 이름난 부인 암 수술 집도의로 살아온 인생인데도 아침마다 한숨이 나왔다. “오늘도 환자들 하소연을 듣겠군, 우리 아들은 왜 엄마 아빠만큼 성적이 좋지 않을까, 병원의 그 사람과는 의견이 안 맞아…” 이런 불평이 풍선처럼 가득 차올라 터지기 직전, 그는 존경받는 대학병원 박사직을 사직했다.

“그때 영국에 사는 제 동생이 하릴없이 노느니 국제 봉사 단체 활동을 해보라고 권했어요. 어쩌면 공짜로 해외여행하며 남에게 도움 되는 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동생이 알려준 몇 곳에 이메일로 지원했어요. 그런데 단 한 곳, 의료 구호 활동을 하는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Médecins Sans Frontières, Doctors Without Borders)는 전 세계 70여 개 국가에서 분쟁, 전염병, 영양실조, 자연재해로 고통받거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을 위해 긴급 구호 활동을 하는 국제단체다. 3만 명이 넘는 활동가가 일하고 있으며 의사, 간호사, 물류 전문가, 행정 담당자, 전염병학자, 정신 건강 전문가 등 다양한 직업으로 구성된다. 그들이 인종, 종교, 성별, 정치적 성향을 초월해 중립적으로 하는 인도주의 의료 활동은 1996년에 서울평화상을, 199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선영 박사는 네덜란드 지부로 가서 세계에서 온 지원자와 함께 훈련을 받았다. 단체 이름처럼 정치적ㆍ종교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며 의료 활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양한 활동을 통해 체득하는 훈련이었다. “만약 파키스탄에서 활동할 경우 파키스탄 정부를 돕고 탈레반 환자는 고발해야 한다면 죽어가는 탈레반 사람은 치료할 수 없습니다. 물론 국경없는의사회도 이유 없이 많은 사람이 죽는 극단적으로 중요한 사안에서는 신중한 논의를 거쳐 증언하고 목소리를 냅니다. 하지만 정치적 성향이나 종교를 떠나서 긴급의료 구호가 필요한 누구라도 치료해주는 것이 최우선인 기본 정신이지요. 네덜란드의 훈련에서 이런 정신을 배웠어요. 마치 대학교 캠프에 온 것처럼 케이스 스터디를 하고, 조별 훈련을 하고, 시험을 보는 과정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물론 밤중에 깨워서 10kg의 짐을 지고 다른 마을까지 걸어가는 등의 신체 훈련도 했고요.”

의료 장비와 일손이 턱없이 부족한 오지에서 진료하기 때문에 국경없는의사회는 산모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우선한다. 그토록 힘든 환경을 견디고 태어나는 강인한 생명은 경이로운 감동을 안겨준다. 
“세상엔 배울 게 정말 많구나”
그가 처음으로 배정받은 지역은 파키스탄. 하지만 탈레반과 전쟁 중이어서 NGO 비자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몇 달 더 기다리다가 나이지리아로 첫 구호 활동을 떠났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재난 지역이나 전쟁 지역에서 긴급 구호 활동도 하지만, 모성과 아동 보호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임신 중, 혹은 출산 전후의 여성과 아동은 신체적으로 가장 취약해요. 출산 시 산모가 사망하는 것을 모성 사망률이라고 하는데, 전 세계에서 모성 사망률이 높은 곳에서 모성 보호 활동을 합니다.” 산부인과 전문의가 꼭 필요한 아프리카 대륙의 나이지리아에 도착한 첫날. 기후는 40℃를 넘나들었고,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외양간 같은 병원에서는 자신과 생김새가 다른 수십 명의 산모가 병상과 바닥에 누워 있었다. 폭염 속에서 탈수와 설사에 시달리며 종일 비명을 들으니 첫날부터 ‘잘못 왔어. 나는 못할 것 같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국에서 난소암과 자궁암이라는 큰 수술을 집도하던 의사로 평소 체력을 자신하던 그였지만, 둘째 날에는 회진을 하다가 급기야 기절하고 말았다. 환자가 병상에도 바닥에도 있으니 의사가 진료하려면 쭈그려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해야 하는데, 탈수와 설사에 지쳐서인지 앉았다 일어나는 순간 그만 “에구구” 소리를 내며 졸도한 것. 물을 마셔도 회복이 안 되고 몸을 어떻게 추스려야 할지 도통 모르던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응급 약으로 먹인 건 미지근한 콜라 한 잔.

“거짓말처럼 살아났어요. 깨끗한 물에 당분과 카페인도 들었으니 세상에 이렇게 맛있고 내 몸에 이로운 음료였나 싶었지요. 먼저 와 있던 나이 지긋한 미국인 간호사가 ‘딱 5일만 더 견뎌보고 못 할 것 같으면 그때 돌아가라’고 격려했고, 콜라를 사서 침대 밑에 숨겨두고 매일 한 잔씩 마시면서 버텼습니다.”

한 달간 주변에 민폐만 끼치다 “봉사는 이걸로 끝이다”라며 한국에 돌아왔다. 그런데 석 달쯤 지나니 신기하게도 다시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무게가 8kg이나 빠졌고 체력을 다시 회복하는 데 수개월이 걸렸지만 신기하게 몸이 더 건강해지고 에너지가 충만해진 기분이 들었다. 6개월 후 그는 다시 남수단에 갔고, 이 정도 더위는 만만하다고 생각하며 진료를 시작했다.

10여 명의 구호 활동가가 현지에서 고용한 많은 현지 직원과 팀을 이루어 거점 병원을 지원하거나 운영한다.
“팀을 위해서는 규칙을 따라야 하는구나”
국경없는의사회는 말 그대로 ‘국경’이 없다. 구호 활동가가 가는 지역도 국경이 없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국경이 없다. 원무 담당, 간호사, 현지 인력 담당, 약국 담당, 보안 담당, 선풍기나 제반 설비를 구매하고 조달하는 담당, 식수 위생 전문가, 수술방에 전력을 연결하는 전기 기술자 등 의사 한 명과 10여 명의 각 분야 전문가가 팀을 이룬 후 각 팀의 일을 도울 현지 직원 1백여 명이 모여야 그나마 작은 병원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의사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대학 병원의 교수이던 그가 모든 사람이 구호 활동가라는 수평 구조로 일하는 그곳에서 진료 외에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남수단에서는 프랑스, 스웨덴, 독일, 홍콩 등 언어ㆍ문화ㆍ역사ㆍ환경이 다른 곳에서 온 20여 명의 남녀가 재래식 화장실 하나를 같이 사용했어요. 외부에서 공수해오는 음식량도 한정되어 있죠. 누가 치즈 한쪽을 더 먹으면 다른 사람은 못 먹습니다. 치즈가 맛있어서가 아니라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인데 다른 사람은 단백질을 섭취하지 못하는 것이죠.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화장실을 지저분하게 사용했다는 이유로도 다툼이 생길 수 있어요. 그러니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법을 깨우쳐야 해요.” ‘싫은 사람과는 말을 안 하면 되지, 모르면 저 레지던트만 손해지’라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이선영 박사는 현지 사람들의 문화를 존중해야 했고, 너희가 다 빼았아갔으니 도움이 고맙지 않다는 아프리카 청년에게 우리나라 역사를 들려주며 위로해야 했다. 주방 설거지를 자처했고(더위 극복에 도움이 되었고 현지 주방장에게 잘 보여 어깨너머로 요리도 배웠다), 가벼운 음주가 허락된 남수단에서는 긴급 진료로 바이올린 선처럼 팽팽해진 신경을 순식간에 이완시키는 그 귀한 맥주 한 모금을 동료에게 건네며 대화하는 나눔의 기술도 익혔다.

파키스탄에서는 팀 전체를 보호하려면 반드시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삶의 이치를 확인했다. 분쟁 지역이니 구호 활동가 팀은 매일 아침 안보 담당과 함께 숙소에서 병원까지 이동할 안전한 길을 의논한다. 5분도 아쉬운 응급 환자를 살려야 하는데, 그날 지정된 길이 30여 분 돌아가는 곳이라면 다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냉정하게 규칙을 따른다. 그게 팀 전체를 안전하게 지키고 더 오래 훨씬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경없는의사회에서의 구호 활동은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모르는 게 이토록 많았구나’ 하는 사실을 또 깨우치는, 거대한 자아 성장의 현장이었다.

국경없는의사회를 후원하려면 웹사이트(www.msf.or.kr)의 후원 메뉴나 전화(02-3703-3500)로 신청할 수 있다. 또는 신한은행 계좌(140-009-508856)로 일시 후원금을 보내면 된다. 현장 활동 소식은 웹사이트에서 구독 신청할 수 있다. 
“사람 인체는 참으로 강하구나”
“환자 몇 명을 수술해줬다고 제가 세계 역사를 바꾸거나 평화를 얻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한강 물에 모래 한알 던지는 격이죠. 그런데 이를 통해 제가 얻은 건 너무나 많아요.그러니 지금 현재 진료하며 스트레스를 받거나 지친 동료 의사가 있다면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하며 자신에게 성장의 행복을 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조혼 문화 때문에 산부인과인지 소아과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나이 어린 산모가 많은 나이지리아. 그곳에는 골반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산모의 산도에 아기가 끼는 경우가 아주 많다. 아기 사체가 산도에서 썩어 산모의 장기가 궤사해 생식기에 누공이 생기는 놀라운 경우가 다반사였다. 산을 넘어 혹은 수레를 타고 겨우 병원에 도착해도 일손이 부족하고 병상이 모자라 손을 쓰기도 전에 병원 문 앞에서 사망하는 환자도 수도 없이 보았다.

이런 극한 상황을 경험하고 치료하니 이제는 오지의 수술방에서 파리가 붙은 채 수술 부위를 꿰매도 환자가 살고, 라오스 산길에서 받은 신생아의 몸에 모기 떼가 붙어도 아기가 산다는 생명의 강인함을 새삼 발견했다. 모두가 영양 실조를 앓는 아프리카에서는 산모의 헤모글로빈 수치가 5 이상(정상 여성의 헤모글로빈 수치는 12 정도이며, 말기 암 환자 등 중병 환자의 헤모글로빈 수치가 5 정도 된다)이면 수혈도 하지 않는다. 수혈해줄 혈액이 없는 데다 수술 장비와 공간이 부족하니 웬만한 증상은 그냥 둔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기가 태어나고 산모가 생존하니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가 아닌가. “어휴, 의사로서도 사람으로서도 내가 모르는 게 이렇게 많았구나, 역시 사람은 성장해야 하는구나 하며 수도 없이 깨달았죠. 오지에 가서 보니 사람은 참으로 강하고 자연 치료되는 것이 많은데, 그동안 우린 항생제를 많이 썼어요.”

국경없는의사회는 더 많은 환자가 찾아올 수 있도록 거점 병원을 세우고 현지 의료진에게 의료 기술을 전해주거나 환자 진료 등의 일을 각 지역 상황에 맞게 복합적으로 수행한다. 
“이런 방식으로도 사람을 살리는구나”
최근 다녀온 파키스탄에서는 실제 치료 이전에 사회 계몽이 더 절실했다. 그곳에서는 자궁수축제가 마치 시어머니가 추천하는 보약처럼 통용된다. 아기를 빨리 낳으려고 약국에서 자궁수축제를 사서 집에서 투여하니 갑자기 자궁이 줄어들어 아기가 압사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나마 이 정도면 다행이다. 수축 압력이 너무 높아 자궁이 터져 산모가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런 건 제가 의사로 일하는 동안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요. 탈레반이 여성 교육을 금지해 여성이 집 밖에 나오지 않으니 알려줄 방법이 없지요. 이런 곳에는 긴급 의료 진료와 캠페인을 동시에 해야해요. 반상회처럼 마을 남자들을 모아놓고 풍선을 터뜨리며 ‘당신의 셋째 부인과 아기가 이렇게 죽으면 좋겠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예시도 보여주며 지역 문화가 바뀌길 바랄 뿐이죠.”

남수단에서는 환자에게 직접 그의 피를 수혈해주기도 했다. 다섯 번이나 수혈을 했는데도 헤모글로빈 수치가 점점 떨어져 내일이면 죽겠구나 싶은 산모였다. 안보 담당자와 회의한 끝에 마지막 시도라고 생각하며 혈액형이 같은 O형인 자신의 피를 뽑아 수혈했다. 의료 장비가 부족한 아프리카에서는 전혈 수혈이 보편적이다. 알레르기 반응이나 여러 가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혈액을 그대로 환자에게 수혈한다. 놀랍게도 다음 날 산모가 살아났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8까지 올라갔고 지역 깡패이던 산모 아버지가 찾아와 당신은 피를 나눈 가족이라며 고개까지 숙이고 정중하게 인사를 해 주변을 감동시켰다.

“그 일로 그동안 내 머리와 지식으로 사람을 살린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으로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또 배웠죠. 가슴이 굉장히 벅차올랐고 행복한 기분이었어요. 나중에 한국에 와서도 간혹 저녁이면 그 일이 떠오르곤 했어요. 내가 피를 나눠준 사람이 사는 곳이 좀 더 살만 해졌으면 좋겠고 그곳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남수단 소식이 들리면 귀를 더 기울이죠.”

국경없는의사회의 구호 활동가는 꼭 필요한 곳에 간다는 자부심이 높다. 열악한 환경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한 다양한 경험을 반복하며 구호 활동가 자신도 성장을 경험한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는 이런 것이구나”
한국 종합병원의 암 센터에서 만나는 환자, 라오스 산속에서 진료한 환자, 남수단에서 피를 수혈해준 환자 등 어느 곳에서든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똑같았다. 진료비를 많이 낸 환자든 무료 진료를 해주는 환자든 의사는 ‘내가 가진 지식과 방법을 총동원해서라도 이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환자를 치료한다. 문화와 환경이 달라도 환자는 모두 ‘이 사람이 나를 정말로 살려줄 것이다’라는 눈빛으로 의사를 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국에서나 오지에서나 자신은 그저 진료를 한 것 뿐인데, 괜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고 이선영 박사는 쑥스러워하며 웃는다. “구호 활동을 다녀오면 한국의 종합병원에서 암 환자를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돼요. 언어가 안 통하는 환자하고도 만지고 대화하며 치료의 방향을 잘 찾았는데, 그동안 한국에서는 첨단 의료를 한다며 환자에게 너무 많은 검사를 했고, 항생제나 약물을 너무 많이 사용했죠. 무엇보다 환자와 대화하는 게 재미있고 환자 또한 예전보다 훨씬 더 만족하는 것 같아요.”

한국에 돌아온 그는 종합병원 암 센터 박사로 부인암 수술을 하고 국제 구호 활동 경험을 살려 국제병원에서 외국인 환자도 진료한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요청이 오면 다시 몇 달간 자리를 비울 수 있도록 두 병원 모두 계약직으로 진료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특진비를 받는 박사였지만 지금은 자처해서 일반의로 진료한다는 점도 달라졌다. 최소 진료와 검사를 하는 대신 환자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며 더 나은 진료 방향을 찾으려고 시도한 변화다. “평범한 제가 이런 걸 느끼는데 저보다 훌륭한 동료와 후배 의사들이 국경없는의사회 구호 활동 경험을 하면 훨씬 더 많은 것을 깨닫겠죠. 그러면 우리나라의 보건 의료가 지금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거예요. 의료보험 문제와 진료 방향 문제로 우리의 현실이 답답하면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최선의 답을 찾는 것도 좋은 방법 아닐까요.”

이선영 박사는 분당차병원 부인암센터 교수로 재직 중이며, 다일천사병원에서 외국인 환자 진료도 하고 있다. 
요즘 그는 매일 아침 ‘아, 오늘도 정말 행복해!’라는 기분으로 눈을 뜬다. 국경없는의사회 구호 활동을 하기 전과 후의 삶이 흑과 백처럼 명확히 달라졌다. 매일매일이 즐겁고 환자를 만나는 것이 기다려지는 신기한 변화가 일어난 것. 게다가 동네 학원에 등록해 생전 관심 없던 춤을 취미로 배우는 일상의 변화도 생겼고, 무엇보다 무뚝뚝한 남편과 말썽 부리던 아들이 엄마가 없는 몇 달간 서로 의지하느라 부자 관계가 무척 살가워졌다. 해외여행도 할 수 있고 멋있어 보인다는 불순한(?) 의도로 선뜻 저지른 국경없는의사회에서의 구호 활동이 그의 일상에 이토록 많은 변화를 가져다줄지는 그 자신도 가족과 친구들도 예상치 못했다. “나중에 은퇴하면 봉사하자”라는 말로 미루지 않고 ‘어쨌든 저질러보자’ 결심한 것이 그의 인생에 이토록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예전 삶에 지쳤을 때처럼 내 자신이 ‘나는 다 되었어’ 하고 생각하는 순간 성장이 멈춘다는 사실을 구호 활동을 하면서 깨달았죠. 성장이란 점점 더 사람답게 되는 거예요. 사람으로서 부족한 것을 계속 채우고 배우며 살고 싶어요.” 이선영 박사는 맛있는 것을 먹고 예쁜 옷을 입을 때 기분 좋은 것과 ‘행복하다’는 기분은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행복한 기분은 결코 자기 자신한테서 찾을 수 없다. 그 기분은 남이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보면서 내가 정말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 미소 짓는 상황을 계속 만들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삶의 목표란 결국 이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더군요.”

앨런 룩스 박사는 남을 도운 사람은 정신적 충만감을 느끼고, 그의 신체에 ‘몇 주간’ 긍정적 효과가 나타난다고 했다. 타인이 나에게 미소 짓는 상황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몇 주간 느낀 내 몸의 긍정적 변화를 몇 달, 몇 년으로 더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을 도와본 사람이 다시 남을 돕고, 오지로 떠나본 사람이 다시 오지로 떠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헬퍼스 하이, 평생의 행복은 당신을 감사하며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눈빛에 들어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이선영
글 김민정 수석기자 | 사진 박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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