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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샤넬의 삶 그리고 작품 상처에서 비롯된 위대한 유산
사진, 그림, 조각 등 예술 작품은 무심코 보아도 심금을 울리지만, 작가의 의도를 알고 보면 그 진가가 더욱 돋보인다. 2.55백, 리틀 블랙 드레스, 향수 N。5 등 세기에 걸쳐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꾸준히 칭송받는 샤넬의 창조물. 패션 디자이너이기에 앞서 진정한 예술가이던 샤넬 여사가 이 창조물을 선보이기까지의 배경과 의도, 메시지가 무엇인지 안다면, 그 가치는 더욱 빛난다. 그래서 샤넬 제품은 그저 상품이 아니라 가히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전시 <샤넬 문화전: 장소의 정신>을 보면 그 가치를 더욱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신선하고 의미 깊고 그래서 재미있는 샤넬의 작품 세계를 탐구한다.

1 오바진, 물랭, 도빌을 거쳐 베니스, 할리우드, 뉴욕, 파리로 이어지는 샤넬의 발자취를 따라 창작에 미친 영향을 추적해 보여주는 전시 <샤넬 문화전: 장소의 정신>. 10월 5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 CHANEL 2 대형 장식 대문자를 이용해 콜라주 기법으로 꾸민 코코 샤넬COCO CHANEL 이름. 작자 미상, 혼합 재료, 1921, 파리, 샤넬 컬렉션. ⓒ All rights reserved/collection CHANEL/photo Thierry Depagne 

상복으로 여기던 여성의 검은 옷을 예복의 대명사로 만든 샤넬. 그녀가 디자인한 검은 옷은 어릴 적 고아원에서 마주하던 수녀들의 옷과 참 닮았다. 마음속 상처를 영광으로 승화한 것이다.
1 샤넬이 동경한 여류 작가 콜레트와 그녀의 애견 토비. ⓒ Albert Harlingue / photo Roger-Viollet 
2 <샤넬 문화전: 장소의 정신> 전시 작품집 중에서. 오바진 수도원의 수녀와 리틀 블랙 재킷을 입은 모델 프레하 베하. 
3 <비쥬 드 디아망> 전시를 위한 샤넬의 작품으로, 5캐럿의 28개 올드컷 다이아몬드 를 세팅한 플래티넘 브로치. 오바진 수도원의 바닥을 본뜬 것이다(1932). ⓒ CHANEL/photo Didier Roy 
4 오바진 수도원 바닥의 별 문양 디테일화 (2014). ⓒ François Boisrond 

샤넬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그녀의 가장 고통스러웠던 오바진Aubazine 수도원 시절을 빼놓을 수 없다. 열두 살의 샤넬.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지 오래지 않아 아버지는 그녀를 오바진 수도원 고아원에 맡겼다. 다시 데리러 오겠다던 아버지였지만 그 뒤로 만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에게 버림받고 혼자 된 현실은 얼마나 가혹했을까? “이것이 바로 나의 어린 시절이다. 집도 없고, 사랑도 없고, 부모도 없이 고아원에 맡겨진 고아 소녀의 유년기. 끔찍한 시절이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 반항하는 아이는 아주 강하고 무장한 존재가 된다.” -<샤넬 문화전: 장소의 정신> 도록 중에서

1 가브리엘 샤넬과 샤넬의 현재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가 표현한 화이트 칼라 장식의 블랙 드레스들. 각각 1958년, 2005년, 2013년의 샤넬 컬렉션. ⓒ CHANEL/photo Patricia Canino 
2 캉봉가 31번지 그녀의 거실에 있는 가브리엘 샤넬 초상(1957). ⓒ Mike de Dulmen/All rights 

이토록 유년기를 지배하던 오바진 수녀원에서의 생활은 샤넬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샤넬은 좌절로 인해 절망의 나락에 빠지기보단 이를 창작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이 시절의 경험과 단상이 그녀의 정신과 작품 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다양한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묵주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긴 목걸이, 중세 십자가 성 유물함에서 따온 십자형 펜던트, 오바진 수녀원 바닥을 장식한 해・달・별 문양 모티프의 주얼리 그리고 수녀원 기도실에 있었다는 12세기 스테인드글라스의 문양을 닮은 샤넬의 더블C 로고까지. 그중 수도원에서 늘 마주하던 수녀들의 의상은 가장 명백한 영감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검정과 흰색의 배합, 단순한 선은 화이트 칼라와 커프스를 단 리틀 블랙 드레스로 승화한 것. 한편 직선 실루엣,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해 단순함과 우아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리틀 블랙 드레스의 가치는 디자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기존에 주로 상복으로 입던 검은색을 여성의 일상복에 도입했다는 점에서 의식의 전환을 가능케 한 혁신물의 상징이기도 하다. 또 의복에서 성별이나 계급과 관련한 고정관념을 전복시킨 획기적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가난하던 유년 시절, 샤넬에게 밀 이삭은 ‘풍요’의 상징이었다. 이후 그녀는 성공을 기원하는 주술인 양 밀 이삭을 장식 요소로 사용하곤 했다. 초라한 과거를 궁극의 럭셔리로 재탄생시킨, 이 당당한 아름다움이라니!
1 <샤넬 문화전: 장소의 정신> 전시 작품집 중에서. 가브리엘 샤넬의 아파트에 놓인 금박을 입힌 목각 밀 다발과 밀 이삭 다발. 
2 살바도르 달리, ‘밀 이삭’, 1947. 
3 카미유 피사로, ‘건초 만드는 여인’, 1890. ⓒ Claire Tabbagh 
4 가브리엘 샤넬이 밀 모티프를 금실로 수놓은 아이보리 레이스 드레스(1960). 
5 칼 라거펠트가 재해석한 밀 이삭 장식. 2010 레디투웨어 컬렉션 중에서. 

가난 때문에 자식을 버릴 수밖에 없던 샤넬의 아버지. 하지만 그는 샤넬이 이렇듯 세기를 넘어서까지 추앙받는 브랜드의 디자이너가 되리라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아니, 어쩌면 그가 샤넬을 수도원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샤넬 브랜드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부모에게 버림받은 샤넬에 대한 동정심은 그만 거두어도 될 것 같다. 실제로 그녀의 삶을 조명한 각종 자료를 보면 샤넬이 그 어디에서도 부모를 원망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침대 밑에 한 남자가 있는데 나한테 밀을 던져요”라고 아버지에게 말하면 “그건 좋은 밀이란다”라고 대답해주곤 했다며 오히려 유년기를 추억한다. 그리고 그 밀 이삭은 그녀의 삶과 작품 세계에서 아주 중요한 디자인 요소로 만나게 된다.

밀 이삭이 상징하는 바는 이렇다.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는 산업혁명으로 농촌 지역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농촌 출신인 그의 부모는 프랑스 중부의 장터를 돌며 작업복과 속옷을 팔아 먹고살던 행상인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미루어보건대, 당시 수확은 곧 풍요와 성공이며 바로 밀이 지닌 상징적 의미이기도 하다. 즉 농촌 사회에서 자란 그녀에게 밀 이삭은 일종의 꿈이자 이상이었을 터.

마치 큰 성공을 거둔 후에도 어린 시절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주술이라도 필요했을까? “인테리어란 사람의 마음을 자연스레 투영하는 것”이라 말한 샤넬은 집 안 곳곳에 밀 이삭을 두었다. 그녀의 캉봉 아파트에 여기저기 던져놓은 밀 다발, 벽난로 위에 놓은 금박 목각 밀 다발 등. 물론 그녀의 작품 속에도 밀 모티프가 존재하니 바로 밀 문양 자수 드레스가 그것이다.


남성의 옷을 여자가 입는다? 늘 남과 다르기를 추구한 샤넬은 파격적 시도를 서슴지 않았다. 군복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여성 재킷은 남성성을 여성성으로 확장하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았다.
1 <샤넬 문화전: 장소의 정신> 전시 작품집 중에서. 샤넬의 영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1910~1920년대 여성의 의상들. 
2 샤넬 가을・겨울 오트쿠튀르 컬렉션의 투피스를 입은 도로테아 맥고완(1960). ⓒ William Klein/Courtesy Polka Galerie/ All rights reserved 
3 제1기병 연대의 나팔수 군인들(1900). ⓒ All rights reserved 

같은 여자로서 샤넬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건 흥미진진한 일이다. 실제 영화로도 제작할 만큼 아주 극적인 순간, 멋진 연인과의 뜨거운 사랑 등은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려보는 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샤넬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수녀원을 나와 물랭이란 도시의 카페에서 노래를 부른다. 프랑스 한가운데 위치한 물랭은 상업과 군부대, 기병들의 도시로 카페와 공연장이 많아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또 중요한 영감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샤넬이 자주 접하던 군인, 제복을 입은 군인이 그 주인공이다. 그렇다. 파격적이게도 샤넬은 남성성의 전형인 군복을 여성복 디자인에 활용한 것이다.참으로 기발하지 않은가! 이 역설적 발상은 지금 보아도 놀라울 만큼 참신하다. 한데 이는 샤넬이 앞으로 패션 역사에서 보인 행보의 시작에 불과했다.늘 남과 다르기를 원했고 그래서 언제나 파격적이었으며 시선을 끈 샤넬. 그녀는 결국 1910년 연인 아서 카펠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파리 캉봉가 21번지에 ‘샤넬모드’라는 모자 전문점을 열었다. 그리고 갖가지 꽃과 과일 등 과한 장식 요소에 치중한 당대 패션에 대항해 극도로 단순한 디자인의 모자를 선보였다. 이러한 샤넬 스타일은 독보적이었으며, 그녀는 새로운 지표를 제시하는 선구자로서 스스로 패션 아이콘이 되었다.


꽉 조인 허리를 강조하던 시절, 샤넬은 어부 작업복에서 영감을 받아 또 하나의 위대한 아이콘, 스트라이프 셔츠를 탄생시켰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을까? 코르셋에서 해방된 여자들의 흐르는 듯한 실루엣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는 걸 말이다.
4 스트라이프 셔츠와 편안한 실루엣의 팬츠를 입은 가브리엘 샤넬과 애견 지고트(1930). 
5 샤넬 2008 파리-런던 공방 컬렉션의 스트라이프 니트 톱과 2006 봄・여름 레디투웨어 컬렉션의 슈즈를 착용한 루이즈 페더슨(2011). ⓒ Peter Farago & Ingela Klemetz Farago 
6 <샤넬 문화전: 장소의 정신> 전시 작품집 중에서. 베니스의 리도 해변에 있는 가브리엘 샤넬. 의상이 완전히 현대적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격동의 변화기엔 늘 영웅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역사 속 진리다. 이를 19세기와 20세기의 패션 격변기에 적용하자면 샤넬은 영웅이었다. 1900년대 어느 삽화를 보면, 당시 남자의 의상은 제법 현대적으로 바뀐 데 비해 여성의 의상은구시대의 디테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알 수 있다. 여전히 높이 올라오는 칼라, 딱딱한 코르셋으로 꽉 조인 허리 등 부자연스럽고 과한 실루엣을 유지하고 있는 것. 이때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전사가 바로 샤넬이다. 바야흐로 19세기 패션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1913년 여름, 샤넬은 노르망디 해안에 위치한 아름다운 휴양 도시 도빌에 자신의 첫 부티크를 열었는데, 맨 처음 내놓은 옷은 어부의 작업복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저지 소재의 스트라이프 셔츠다. 그리고 뒤이어 비치 파자마, 통 넓은 바지, 줄무늬 수영복 등을 선보였고, 남성 재킷・셔츠・바지를 여성복 디자인으로 변형함으로써 샤넬은 끊임없이 여성에게 새로운 실루엣을 제안했다. 당시 속옷을 만드는 데 쓰던 저지 원단을 의상에 사용한 것도 매우 현대적 업적. 그런데 디자인과 소재를 통해 여성의 몸에 움직임의 자유를 선사한 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닌 건, 코르셋 밖에서 무심하게 흐르는 듯한 실루엣에 우아함이 깃들어 오히려 더 여성스러워 보인다는 역설적 아름다움이다.


당대의 유행과 관습을 거부하고, 경험에서 얻은 모티프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승화 시키며, 20세기 여성들에게 자유를 선물한 샤넬. 그녀의 창조 작업에 영향을 준 영감의 원천을 따라가다 보면 인정하게 된다. 그녀와 깊은 친분을 맺은 피카소, 달리, 장 콕토처럼 샤넬은 진정한 아티스트였다는 걸 말이다.
1 <샤넬 문화전: 장소의 정신> 전시 작품집 중에서. 말을 탄 가브리엘 샤넬. 
2 기수의 안장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2.55백. 

승마 에티엔 발장과 르와얄리유로 거처를 옮긴 샤넬은 이곳에서 승마의 세계에 입문했다. 당시 승마와 남성의 세계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가브리엘 샤넬은 재봉사에게 남자가 입는 것과 똑같은 승마 바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기의 작품이 탄생하는데, 바로 기수가 안장을 보온하기 위해 사용한 퀼트 패턴 가죽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2.55백이 그것이다. 또한 스트랩이 있는 군인 가방에서 힌트를 얻어 클러치 백에 어깨 끈을 달아 여성들의 두 손을 자유롭게 한 가방 역시 2.55백이다.

3 샤넬의 연인이던 웨스트민스터 공작 2세(1903). ⓒ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4 샤샤 피보바로바와 함께한 파리-모스크바 공방 컬렉션 중에서(2009). ⓒ CHANEL / photo Karl Lagerfeld 

공작 의상 남성적인 것을 여성에 접목하곤 하던 샤넬. 재킷에 까멜리아를 꽂는다든가 스웨터에 여러 줄의 진주 목걸이를 매치하는 등 디테일에 관한 뛰어난 감각으로 스타일을 창조 해냈다. 같은 맥락으로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트위드 재킷과 캐시미어 카디건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재해석한 작품들을 자신의 컬렉션에 선보였다.

샤넬이 사랑한 동백꽃 장식물(왼쪽)과 꼬로망델 장식의 손목시계 마드모아젤 프리베(오른쪽). 
까멜리아 가브리엘 샤넬이 가장 사랑한 꽃, 동백. 겨울에 피는 꽃인 만큼 생명력과 평온함을 상징하는 까멜리아는 샤넬의 대표적 상징 요소 중 하나다. 우아한 곡선의 꽃잎 모양은 ‘까멜리아 갈베’ 컬렉션으로 탄생해 각종 액세서리의 디자인 모티프로 사용했다. 


당시 향수병은 참 화려했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샤넬이 내놓은 향수 N。5의 디자인은 단순함 그 자체였다. 거기에 악센트의 미학으로서 검정 봉인을 가미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1 러시아풍 블라우스를 입은 가브리엘 샤넬(1923). ⓒ All rights reserved 
2 단순한 디자인에 수공예 장식을 달아 기품을 더한 샤넬 N°5 향수병(2014). ⓒ CHANEL /Didier Roy 

향수 N°5 옛 러시아 황실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가 탄생시킨 그녀의 첫번째 향수 N。5는 가히 후각적 혁명이라 불린다. 역사상 최초로 합성향료를 사용했고 처음으로 향수에 번호 이름을 붙였으며, 기존의 장식적 용기에서 탈피한 단순한 디자인의 보틀을 선보였다. 하지만 단순함에 가미된 악센트의 미학을 중요시 여긴 샤넬답게, 사각 유리병을 수작업으로 봉인하는 ‘보드뤼사쥬’ 공법을 도입해 디자인의 완성도를 높였다.

샤넬 파인 주얼리 콩스텔라시옹 뒤 리옹 목걸이(2012). ⓒ CHANEL Joaillerie
사자 1920년, 아서 카펠이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세르 부부와 함께 베니스로 떠났다. 가장 힘든 시기에 창조열이 불타오르는 법. 이곳에서 무궁무진한 창작 요소를 마주했고 그중 대표적 오브제가 바로 사자다. 베니스의 상징으로서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자 조각상을 아파트 곳곳에 두었고, 자신의 별자리이기도 한 이 사자를 자기 상징으로 삼기도 했다. 또 1950년대 말부터 주얼리 컬렉션과 단추 문양으로 많이 활용했다.

사진 제공 샤넬 

글 강옥진 수석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