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스 ‘ Fresh 그리 고 톡 ’을 살펴보는 김지은 아나운서. 2 홈플러스 ‘ 가정+ 삶 ’ .
시끌벅적한 역 대합실에 남녀노소가 뒤섞여 웅성거린다. 잠시 뒤 역무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등장해 한 사람씩 호명한 뒤, 작은 방으로 안내한다. 거기서 호명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듣게 된다. “뭐 이미 상황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공무상 확인을 좀 하겠습니다. 당신은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당신은 여기에서 일주일을 머물게 됩니다. 다만 여기에 계시는 동안 한 가지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가장 행복하고 의미 있었던 순간을 하나 선택하는 겁니다. 단 3일 동안입니다. 그리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당신은 바로 그 장면만을 기억한 채, ‘그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 역의 이름은 ‘림보역’. 행복한 기억을 찾아낸 사람은 ‘그곳’으로 떠나지만, 기억 찾기에 실패한 사람들은 림보역에 머물면서 림보역에 새로 도착하는 사람들이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영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개봉될 때의 이름은 <원더풀 라이프>였지만 원제는
예술은 브랜드보다 오래 산다. 브랜드는 예술보다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나다. 브랜드는 예술에게 생명력을 얻고, 예술은 브랜드에게 마케팅 감각을 배운다. 예술과 브랜드, 두 콤비의 임무는 ‘영원히 지속될 가치와 함께 돈을 잔뜩 버는 것’ 아닐까.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다. 현대미술의 한 분야로 자리 잡은 아트 마케팅을 수용한 본격적인 전시로 국내 유수의 브랜드 30여 개의 참여 속에 진행된 예술 작업을 볼 수 있는 <브랜드를 밝히다>전에는 결선에 오른 콤비들이 기량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쭉 둘러보니, 개중에는 브랜드만 밝히느라 예술이 자취를 감춘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예술에 힘쓰느라 브랜드의 정체성이 희미해진 경우도 있었다. 특히 동어반복적으로 자기 복제를 한 것 같은 브랜드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관객과의 쌍방향 소통에는 모두들 성공을 거두었던 것 같다. 관객들은 눈을 반짝였고 낮은 탄성을 질렀으며 끊임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무엇보다 30여 개 브랜드를 모두 담아낸 페이퍼테이너 뮤지엄 자체가 뿜어내고 있는 스펙터클이 매우 압도적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3 KTF ‘ 아이콘의 혁명 . ’ 4 하나은행 ‘고객을 위한 혁 신 ’ .
KTF by 정석 원 - 아이콘의 진화 Evolution of Icon KTF를 표현한 작업의 주제는 아이콘의 진화였다. 양쪽 벽으로 고개 방향을 바꾸면 고대 동굴벽화에 나타난 그래픽 아이콘부터 이집트 상형문자를 거쳐 현대의 이모티콘에 이르기까지 이모티콘의 진화과정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었다. 사회는 진화했겠지만 인간의 감정은 선사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특히 KTF를 통해 수많은 이모티콘을 날렸을 남녀(KTF의 주 고객층 아닐까?)를 단순하게 그래픽화한 점이라든가, 생명의 근원이 되는 ‘씨앗’을 모태로 무성한 ‘줄기’가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콘셉트의 공간 연출로 자칫 정적일 수도 있었던 KTF 공간을 역동적으로 만든 점이 인상적이었다.
홈플러스 by 장순 각 - 가정+ 삶 Home+Life 매우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실제 홈플러스와 전시공간은 약 1:7900의 비율. 홈플러스의 큰 스케일은 7천900장의 슬라이드에 담겨 이곳의 작은 컨테이너 박스로 옮겨졌다. 컨테이너 박스의 내부 3면에 촘촘히 붙여진 슬라이드는 마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효율적으로 진열된 홈플러스의 상품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조는 아이를 안은 채 장을 보고 있는 남편의 모습, 팔딱거리는 싱싱한 생선들, 잘 익어가는 김치 등 필름 뒤쪽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빛으로 더 선명해지는 아날로그적 이미지는 ‘무조건 싸게 판다’는 노골적인 캐치프레이즈가 아닌 ‘고객에게 항상 더 높은 가치를 제공한다’는 홈플러스의 이념을 은유적이지만 매우 우아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망막에 남는 아름다운 빛의 공간이었다.
하나은행 by 이용덕 - 고객을 위한 혁 신 Innovation for You 고고학자는 땅을 판다. 유물을 발굴한다. 발굴된 자리는 품고 있던 유물을 내주고 오목하니 들어간다. 유물을 땅에 묻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욕망도 함께 묻었을 것이다. 오목 들어간 부분은 인간의 욕망을 품었던 자리다. 인간의 욕망은 인간을 앞서간다. 빨리 달리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자동차를 만들고 인간보다 더 빨리 도로를 질주한다. 더 멀리 가고 싶은 욕망은 우주선을 만들고 인간보다 먼저 화성에 도착한다. 통장의 잔고는 그 무엇보다 인간의 욕망을 확실히 대변해준다. 이제 인간은 땅이 아니라 더 높은 곳, 하늘을 발굴터로 삼는다. 오목하니 들어간 모양이 누군가 막 자동차를 발굴한 모양이다. ‘미개척된 인간 욕망의 발굴과 충족’이라는 복잡한 주제를 자신의 네거티브 조각세계를 통해 명쾌하게 보여준 이용덕 씨에게 박수를!
5 후 ‘더 히스토리 오브’. 6 케라시스 ‘예술(디자인)+브랜드=즐거운 충돌’.
카스 by 박우덕, 김양 훈 - ‘Fres h ’ 그리고 ‘톡’ ‘예술 +브랜드= 돈’이라는 가장 단순한 대답을 내놓은 팀. ‘척’하지 않고 솔직하다. 컨테이너 박스 천장에는 남녀의 다리만 보인다. 여성의 슬리퍼는 이미 한 쪽이 벗겨진 상태다. 얼마나 맥주가 맛이 있었으면 지붕을 뚫고 올라갔을까? 이 의문에 대한 카스의 답은 ‘다른 맥주에 비해 카보나이트 성분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톡!’쏘는 맛의 비결이란다. 30개 브랜드 가운데 정해진 공간을 이탈한 곳은 카스뿐. 개성과 창의력을 꽉꽉 눌러버리는 사회라는 틀 속에서 그들은 얼마나 갑갑했을까? 자기 몸을 발사해 그 틀을 뚫고 올라가는 두 젊은이들. 카스가 추구하는 ‘젊은 맥주, fresh한 톡!’ 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테이블 위의 술잔이 멀리 멀리 달아났던’ 아픈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아픈 뒤통수를 어루만지면서 맥주 한 잔을 들이켜고 공중부양을 모색해보고 싶어진다.
후 by 이 윰 - 더 히스토리 오브The History of 화려한 자개를 가공하지 않은 천연강철에 마치 붓질한 것과 같이 입힌 ‘후’의 의자는 사방을 향해 날아오르는 4개의 커다란 날개를 달고 있다. 의자에 앉으면 4개의 날개가 앉은 사람의 몸을 감싸며, 거울 위에 붙은 ‘후’의 심벌은 앉은 사람의 왕관이 된다. 누구라도 이 자리에 앉으면 당나라 시대의 측천무후(625~705년)가 될 것 같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인 측천무후는 당나라 고종高宗의 비妃로 들어가 황후皇后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제국을 통일한 주인공이다. 30대 중 ?후반의 여성들을 큰 스케일과 위엄을 가진 여제후로 바꿔주겠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LG생활건강 ‘후’의 아티스트는 바로 이윰. ‘나는 살아 있는 조각’이라는 선언과 함께 1990년대 중 ?후반을 뒤흔들었던 전방위적 퍼포먼스 아티스트를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무척 반가웠다. ‘후’도 ‘이윰’도 성숙한 심장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길…!
한솔제지 by 조홍 래 - 종이 숲 Paper Forest 화려한 브랜드들 사이에 있어서인지 좀 밋밋하다 싶어 처음에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 다시 둘러볼 때야 비로소 들어가게 된 한솔제지의 공간은 조용했다. 그저 바람개비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그런데 웬일인지 불고 싶어진다. 바람개비에 입을 바짝 대고 힘껏 불어본다. 갑자기 뒤쪽에 커튼처럼 늘어져 있던 구겨진, 그래서 나무 표면 같은 종이 위로 이모티콘 영상이 흩뿌려진다. 내 입에서 나간 작은 날숨이 숲 속에 작은 바람결을 일으키는 것 같다. 가벼운 종이 나무들이 수런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바스락…! 발밑에 나뭇잎이 밟힐 것만 같다. 조용한 공간을 빠져나오자마자 뭔가 규칙적으로 쿵쾅거린다. 입구 쪽의 하얀 문이 떨린다. 종이 숲Paper Forest이라는 작은 초록색 사인이 보일락 말락 한다. 나도 모르게 손을 갖다 댄다. 온몸이 전율한다. 숲 속의 심장박동 소리다. 그 ‘종이 숲’에서 나는 오랫동안 손을 떼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던 영화 <사후>에 나오는 사람들이 결국 선택한 기억은 따스한 엄마의 무릎과 체온, 전차 안으로 불어 들어온 한줄기 서늘한 바람, 뜨거운 죽을 후후 불어주던 여인의 입김, 여자친구 가방에서 딸랑거리던 방울 소리 등등이었다. 나 역시 영원히 기억하고픈 순간이 있다. 아이의 심장소리다. 임신 3주 만에 천둥보다 더 큰 심장 박동소리를 청진기를 통해 들었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내 몸 안의 생명을 증거해주는 최초의 소리였기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때 그 심장 소리만큼은 기억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래서일까. 페이퍼테이너뮤지엄을 나서며 브랜드를 ‘밝혀주는 것’은 브랜드를 포장하는 얇은 피부가 아니라, 브랜드 속에서 울리는 ‘심장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예술이여, 브랜드의 심장을 팔딱팔딱 뛰게 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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