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임현경은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201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영아트 프런티어로, 2012년 OCI 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2014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금 시각예술 분야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2009년 첫 전시 <나무와 돌과 새 이야기>를 시작으로 세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올 12월 네 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마를 하늘로 맞추고 자신들에게 해와 비와 바람을 주는 누군가와 교신하는 생명들. 그사이 긴머리 내려뜨린 능수버들 한 그루가 훈풍에 흥타령 흥. 점잖게 책상다리한 바위 아래 잡초들까지 어깨를 맞댄 이 풍경은 참으로 평화롭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맴도는 정원은 오후의 고요에 젖어 있다. 그렇다, 이곳은 정원이다. 언뜻 보면 야산이나 빈 들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연히 울타리까지 치고는 물도 웬만하면 안 주고 아주 가물 때나 어쩌다 한 번 주면서 하늘의 일기대로 가꾼 정원이다. 게다가 ‘화분’이라는 안식처 안에 고이 보호한 정원.
“점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 관심을 갖고 화분을 가꾸듯, 눈에 보이진 않지만 자연도 누군가 다듬고 보살피는 손길이 있겠구나. 인간의 삶도, 우주 만물도 마찬가지겠구나.” 대학 때부터 시작한 임현경 작가의 화조화 작업은 사실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는 <성경>의 ‘네 곳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깊이 묵상하고 회화로 표현하려 했다(<성경>의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다. 길가에 떨어져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린 씨, 바위 위에 떨어져 습기 없이 말라버린 씨, 가시덤불속에 떨어져 가시가 기운을 막은 씨, 좋은 땅에 떨어져 백배의 결실을 맺은 씨). 나무라는 존재에 자신을 투영해 절대자의 손길 안에서 굳건해지고 변화하는 삶의 여정을 그리고 싶었다.
한 해 한 해 삶의 두께가 두꺼워지면서 그 보이지 않는 손길이 절대자일 수도, 나와 관계를 맺은 다른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까지 듣고 그냥 화조화, 민화를 닮은 화조화 정도로 생각한 그의 그림을 다시 한 번 깊이 들여다본다. 산맥처럼 솟아오른 바위 틈새에서 자라는 나무와 풀들, 폭포, 분수형 펌프, 나무를 지탱하는 지지대, 울타리, 아치형 문, 숲 위로 한가로이 나는 새…. 수묵 담채로 담담하게 그린 형상들은 우리의 전통 산수 같기도, 서양의 낯선 정원 같기도 하다. 그 안에서 생명들은 모두 제 할 일을 다 하면서 서로 도우며 열심히 자란다. 정원 한가운데서 분수 펌프가 성실히 일하니 식물들은 녹색을 잃지 않고, 바위가 넓은 어깨를 기꺼이 내주니 나무가 굳건히 뻗어 있으며, 나무는 또 다른 나무가 옆에 있으니 쓰러지지 않는다. 서로 연대하고 공존하는 풍경이다.
존재란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들’이며, 생명은 그걸 확인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중한 진리가 그의 그림에 녹아들어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점점 관계라는 것을 더 많이, 더 깊이 생각하게 돼요. 다른 이들과의 관계, 절대적 존재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처럼 나와 관계 맺은 존재에 대한 생각이죠. 그렇게 관계에 집중하다 보니 오히려 나를 더 깊이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이 무렵부터 제 그림에 ‘제단화’라는 형식도 사용했지요. 그림 한 폭이 하나하나의 이야기이면서 모아 놓으면 커다란 이야기를 만드는 구조라 패널 형식을 띤 것이죠. 동양에선 화첩이나 병풍 형식이라 하고 서양에선 제단화 형식이라 하는데, 핵심 내용을 중앙 패널에 놓고 그와 연결된 이야기를 문처럼 여닫을 수 있는 날개 패널에 담는 식이에요. 이것도 서로 관계 맺은 사이인 거죠.”(이번 표지 작품은 패널 형식을 취하지 않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네 작품이 한 가지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중에서 ‘봄’ 그림이 이번 표지 작품)
얼마 전 아이를 낳고 그는 모성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와 엄마라는 관계, 세상에 둘도 없이 사랑하지만 긴장감마저 감도는 관계, 이 관계가 끊기지 않을까 평생 염려하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그 관계. “제 그림 속에 나무와 땅, 나무와 나무를 엮는 밧줄이나 나무가 타고 오르는 지지대가 계속 등장하는데 바로 그런 의미가 있어요.” 들으면 들을수록, 들여다보면 볼수록 참 깊은 그림이다. 약속과 신뢰와 보살핌이 이삿짐처럼 사라진 2014년 9월, 그의 그림이 봉인된 시간처럼 거룩히 다가오는 이유를 당신도 느꼈을 것이다. 서로를 부여잡고 가는 존재의 숙명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