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사랑 소극장과 카페로 연결되는 공간 사옥의 지층. 제주 전통 가옥의 대문을 모티프로 꾸민 계단 입구가 인상적이다. 김수근 선생의 아내가 운영하던 카페가 두터운 철문으로 닫혀 있다.
“삼촌은 일상의 아주 작은 기록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건축가가 꿈인 한 학생이 보낸 감사 편지와 동봉한 사진을 오래 간직할 정도였죠. 제가 미국에서 지내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못난 손 글씨로 ‘삼촌…’ 하고 써 보낸 편지를 삼촌이 돌아가신 후에 발견했어요. 삼촌의 권유로 미국에 있는 대사관들을 촬영한 슬라이드 필름과 함께말입니다.” 김수근 선생을 추억하는 박기호 사진가의 말이 빨라진다. 머릿속에 부유하는 소소한 기억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빠르게 쏟아내는 그의 말에 삼촌을 향한 그리움과 애정이 살뜰하게 묻어났다.
“이후 방학 때면 귀국해 ‘공간연구소’ 사옥 구석구석을 작은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어요. 엄청난 긴장과 치열한 몰입이 있으면서도 예술적 에너지가 넘실대던 곳이었습니다. 숙모님이 운영하던 카페, 공연 예술가의 아지트이던 ‘공간사랑’ 무대…. 이제 그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삼촌은 평소 다정한 분이셨지만, 제가 찍은 건축 사진에 컴퍼스를 대고 수평이 맞지 않으면 호통을 치시곤 했죠. 그 이후에는 건축 사진을 안 찍었어요. 후후.”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미국에서 다시 사진 작업을 시작했을 때, 그는 사진 속 건축의 수평을 잡는 것부터 시작했다. 삼촌의 영향이 컸다. 그런 면에서 박기호 사진가가 공간 사옥을 기록한 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1980년대 초 <타임> 지에 소개되었던 김수근 선생의 포트레이트. 당시 일본 기자가 촬영했다.
김수근 선생은 1931년 2월 20일 함경남도 천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 “건축가는 내일을 위해 사는 사람이므로 오늘이 중요하다”라고 말하던 한 미군 병사로부터 근대 건축을 접하면서 건축가 의 꿈을 키웠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스무 살, 아버지의 악어가죽 가방을 판 돈을 쥐고 홀연 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건축을 공부한 그는 세끼를 빵 하나로 해결해야 했고, 새우잠만 겨우 잘 수 있는 낡은 하숙방에서 지내는 옹색한 생활 속에서도 건축가의 꿈을 접지 않았다. 건축은 당시 그가 할 수 있는 애국의 길이자, 새로운 시대정신을 향한 자유의지였을 것이다.
김수근 선생은 부여박물관,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 등 굵직한 국가 프로젝트를 비롯해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경동교회, 샘터 사옥, 서울법원종합청사 등 많은 관공서와 서울 대표 건축물을 탄생시켰다. 그중 가장 빛나는 곳이 공간 사옥이다. 공간 사옥은 단순한 사무실이 아니었다. 예술이 인간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예술가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을 열렬히 던지던 곳이었다. 그는 전통 음악, 연극, 건축, 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 예술이 찬란하게 빛날 수 있도록 공간사랑 소극장을 운영하고 종합 예술지 <공간>을 창간했다. 문화 예술을 사랑한 김수근 선생의 뜨거운 열정과 건축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의 흔적이 찬란하게 박힌 곳이 바로 공간 사옥이다.
공간 사옥이 아라리오 갤러리로 바뀌기 전 작년 초겨울에 기록한 공간 사옥의 외관. 특유의 검붉은 벽돌 외벽을 둘러싼 덤쟁이덩굴과 창문이 인상적이다. 8층 구조의 내부를 밖에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삼촌의 암 발병 소식을 듣고 1983년에 귀국했습니다. 하지만 곁에 머물면서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심지어 ‘삼촌’이라고 부른 적도 없지요. 엄격한 스승이자, 상사였고 섣불리 칭찬하는 법도 없었죠. 삼촌은 서너 시간만 잠을 청할 정도로 일하고 사색하는 데 모든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1년에 반은 해외 출장을 가셨는데,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국제적 시각은 문화의 선구자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전위 음악부터 이사도라 덩컨처럼 현대 무용가의 예술을 동경하고 아꼈습니다.
공간 사옥 내 커피숍은 원두커피를 판매하는 카페의 시작으로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었어요. 삼촌은 스페이스 크래프트 코너Space Craft Corner를 만들어 직접 디자인한 크래프트 제품을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공간 사옥의 내부는 독특합니다. 밖에서 볼 땐 지상 5층 건물이지만, 실제로 내부는 8층 구조로 층층이 연결된 계단이 독특하지요. 미로의 방처럼 계단과 계단 사이, 층과 층 사이에 비밀 같은 방들이 숨어 있는데, 그곳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합니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면서도 조형적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구조는 명륜동 부모님 집을 떠올리게 하거든요.” _박기태(김수근문화재단 이사장, 박기호 사진가의 형)
김수근 선생의 책상과 의자. 박기호 사진가는 실제로 이곳에 오면 의자에 앉아 있던 김수근 선생의 모습이 아른거린다고. 책상 위에는 선생이 쓰던 필기도구와 노트가 놓여 있다.
“2009년 7월 <공간>에서 기자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7월은 월간 <공간> 500호가 발행되던 달로 공간 사옥은 축제 분위기로 넘쳐났지요. 신명 나던 첫 출근길과 싱그러운 잎으로 덮인 공간 사옥을 마주하던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공간 사옥에서 근무한다는 것, 이는 대한민국 건축인이라면 누구나 갖는 로망이었으니까요. 예술을 사랑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던 ‘한국의 로렌초’ 김수근 선생님의 열정이 아직 남아 있는 곳입니다. 매월 발행일에 맞춰 김수근 선생님의 책상 위에 그달의 <공간>을 올려놓는 일이 제 담당이었어요. 이제는 제가 뵐 수 없는 김수근 선생님을 접선하는 날이었지요.
가끔 원고가 잘 써지지 않고 글귀가 머릿속을 방황하면 저는 공간 사옥 옥상으로 올라가곤 했습니다. 북쪽으로는 라파엘 비뇰리가 설계한 삼성생명 사옥을, 남쪽으로는 창덕궁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데 이는 대한민국 건축사를 집약하는 축으로, 저 혼자 몰래 간직해온 소중한 풍경이기도 합니다. 중학생 시절 처음 뵌 홍신자 선생님께서는 소극장 공간사랑에 대한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공간사랑에서 더 이상 공연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많이 슬프긴 하지만 대한민국 예술계의 산파 역할을 한 그 기억, 백남준 선생님과 공옥진 선생님의 발자취만큼은 영원히 기억하길 바랍니다.” _이경택(전 월간 <공간> 기자)
1970~1980년대는 공연 예술가의 무대가 턱없이 부족해던 시대였다. 그런 면에서 공간사랑 소극장은 공연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귀한 무대이자 아지트였다. 1백 명 남짓 수용하던 공간은 마이크가 필요 없을 만큼 작았지만, 전위예술부터 전통 공연, 무용 등 창조적 공연이 매일 무대에 올랐다.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에 한국관을 설계할 당시 김수근 선생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공연 예술가 대표로 참가했는데, 당시 저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제게 한국 문화를 상징할 수 있는 무대 이미지에 대한 의견을 물으시더군요. ‘마당 아니겠습니까?’ 하고 당돌하게 대답한 순간이 떠오릅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 전통문화의 근본은 마당이라고, 좋은 의견을 주어 고맙다 말하더군요. 김수근 선생님은 제게 따뜻한 형님이자 인자한 아버지였고, 예술적 동지였습니다. 소프트 아이스크림 같은 특유의 표정 너머 진한 커피 향기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늘 있었어요. 어찌나 잘생겼던지요!
공간 사옥의 내부를 잇는 계단은 김수근 선생의 건축미를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한 사람 겨우 이동할 수 있는 너비의 계단이 미로의 숲처럼 연결돼 있다. 그 층과 층 사이, 계단과 계단 사이에 새로운 공간이 있다. 공간의 기능과 계단 자체가 주는 조형미의 조화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후 전 세계 국제박람회, 대한민국 상품 전시회가 많이 열렸는데 그때마다 예술단원으로 항상 함께했습니다. 공간사랑 소극장은 제가 사물놀이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한 결정적 역할을 한 곳이에요. 당시 현대문학의 밤, 시 낭송의 밤, 현대무용의 밤, 실내악의 밤과 더불어 공간 전통 예술의 밤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고 그곳에서 제 사물놀이가 탄생했습니다. 당시 유학 준비를 하던 20대 후반이었는데, 김수근 선생님이 우리 뿌리를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제게 일깨워주셨어요. 그 이후 전 거의 공간사랑에서 살았습니다. 무속, 풍물, 탈춤 등 신명의 에너지가 우리 문화의 뿌리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1백 명 남짓 들어갈 수 있는 무대는 좌석과 무대를 박스형으로 설계해 자유롭게 변형이 가능했어요. 실험적 공연부터 정통 공연까지 문화의 숨통을 열던 곳입니다. 덕분에 사물놀이를 세계에 알릴 수 있었고,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문화 예술이 되었습니다.” _김덕수(전통 공연 예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아래 공간 사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석탑과 한옥. 아쉽게도 더는 볼 수 없는 풍경으로 남았다.
아기 팔뚝만 한 담쟁이덩굴이 공간 사옥을 감싸고 있다. 굵은 나무줄기에서 뻗어 나온 강인한 생명이 검붉은 외장 벽돌을 감싸고 거대한 숲을 이룬다. 자연의 기운과 인공 건축물이 하나의 겹으로 만난 공간 사옥은 빛과 여백이 어우러져 고요하기만 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1986년 6월 14일, 2000년까지 장기 계획을 세울 만큼 미래를 앞서 준비한 김수근 선생은 간암으로 55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 김수근 선생의 공간 사옥, 공간사의 대표인 장세양 건축가가 증축한 신사옥, 이후 이상림 대표가 지은 한옥 등 건물 세 채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건축을 공부하고 김수근 선생을 추억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던 이곳은 올해 2월 문화재로 등록을 마쳤고, 앞으로는 아라리오 갤러리로 재개관을 앞두고 있다. 비록 공공의 품으로 돌아가리라는 바람은 이루지 못했지만, 김수근 선생의 혼이 고스란히 담긴 문화 공간으로 재발견되길 기대한다.
- 포토 에세이 내가 사랑한 공간空間 사옥社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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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故 김수근金壽根 선생은 문화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1960~1970년대에 건축 문화와 예술을 선도한 선구자였습니다. 건축주이자 건축가로서 참여해 1971년 지은 공간 사옥은 건축과 문화 예술을 향한 그의 뜨거운 열정이 촘촘하게 박힌 역사이자 한국 근대 건축사의 중심이지요. 그의 조카인 박기호 사진가가 공간 사옥을 위해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공간 사옥이 아라리오 갤러리로 바뀌어 촬영하기 어렵게 되면서 마지막으로 기록한 공간 사옥의 모습입니다. 김수근 선생과 공간 사옥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네명의 이야기도 함께 소개합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