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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들이를 떠나시려거든 예술가들이 살던 그때 그 옛집으로
세월의 흔적과 근대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옛집이 있다. 한길을 꼿꼿이 걸어온 예술가들의 역사가 알알이 박힌 곳. 후손과 시민들의 노력으로 지켜온 문화유산 속에서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간다.

근대문학가 이상의 집


서촌에는 최근 1년여의 보수를 마치고 재개관한 근대 문학가 이상의 집이 있다. 실제로 이상이 거주한 집은 아니다. 그가 세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생의 대부분을 보낸 집터의 일부에 신축한 도시 한옥을 개조해 ‘이상’을 기리는 공간으로 탈바꿈 한 것. 문화유산국민신탁이 2009년 첫 보전재산으로 이곳을 매입했고, 현재 (재) 아름지기가 운영하고 있다. 그가 머무른 하늘과 그가 밟은 땅에 존재한다는 점만으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현재 기와와 대들보 등 한옥의 틀은 남기고 내부 공간을 개조했다. 이상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지역 주민 등 모든 이에게 열려 있으며, 음료도 무료로 제공한다. 비치된 도서는 모두 이상과 관련한 서적들로, 자유롭게 읽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두면 된다. 잡지 <조광>에 1936년 6월에 실린 소설 ‘날개’의 첫 페이지와 이상의 절친한 친구윈 김기림이 펴낸 최초의 이상 문학 작품집도 한쪽에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이번 재개관을 맞아 건축가 이지은이 설계한 ‘이상의 방’도 들러보시길. 묵직한 철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두운 공간 너머 한 줄기 강렬한 빛이 계단을 따라 떨어진다. 빛을 쫓아 좁은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안마당과 기와지붕 너머 서촌과 인왕산 풍경이 펼쳐진다. 그가 살던 어둡고 좁은 쪽방을 상징하는 것. 이상의 집은 매주 화요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한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7길 18 문의 070-8837-8374




최초의 근대 사학자 최순우 선생의 옛집


서울성곽길이 어머니 품처럼 동네를 감싸고, 넓은 길목에 사람들이 유유자적 앉아 있는 곳. 새벽부터 쌀 빻는 소리가 들리는 오래된 방앗간과 철물점, 오래된 맛집 등 함께 사는 온기를 다정하게 품은 곳, 바로 성북동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사학자인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의 옛집도 성북동에 있다. 최순우 선생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고, 미국과 유럽의 각 도시를 돌면서 우리나라 도자기, 목기,회화를 비롯해 <한국 미술 2천 년 전> 등 특별 전시회를 주관하는 등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데 평생 노력했다. 또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최순우 선생은 1976년부터 1984년 작고할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1930년대 지은 도시 한옥으로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바깥채가 마주한 이른 바 ‘ㅁ’자형 한옥이다. 비례가 가장 아름다운 창살이라 여기는 ‘用(용)’자 창살과 밀화빛 장판, 그의 안목을 느낄 수 있는 정갈한 목가구와 백자로 사랑방을 꾸몄고, 마당에는 직접 심고 가꾼 수련, 산사나무, 대나무와 함께 수석과 달항아리가 남아있다. 사랑방 문 위에 걸려 있는 현판 ‘杜門卽是深山두문즉시심산’은 최순우 선생이 직접 쓴 것으로 ‘문을 닫으면 이곳이 바로 깊은 산중이다’라는 뜻. 최순우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시민의 노력으로 (재)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보전, 관리하고 있는 최순우 옛집은 4월 11일부터 시민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최순우 옛집의 문을 연 지 10주년을 맞아 시민 축제 ‘동행’이 5월 24일부터 31일까지 최순우 옛집을 중심으로 열린다. 작은 음악회와 관련 전시, 음악 토크쇼,성북동 답사 등 흥미로운 문화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주소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 15길 9 문의 02-3675-3401



조각가 권진규의 아틀리에


권진규 아틀리에는 성북구 동선동 산자락 끝에 있다. 크고 작은 집이 계단을 따라 옹기종기 모인 마을 끝에서 만난 큼지막한 나무 대문. 그 안에는 조각가 권진규가 어머니와 함께 살던 살림집과 아틀리에가 있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무사시노 미술학교에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고, 재학 시절부터 일본 이과회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다. 테라코타, 건칠 작품으로 우리나라 근현대 조각사의 중심에 있던 작가다. 동선동의 아틀리에는 그가 어머니 병환 때문에 1959년에 귀국해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집으로, 1973년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작품에 몰입하던 곳이다. 2006년 권진규 선생의 동생인 권경숙 여사가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해 1년간의 복원 작업을 거쳐 대중에게 개방했다. 원래는 살림집과 아틀리에가 분리된 형태로 각각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내부에는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아틀리에와 신식으로 개조한 살림집이 마당을 중심으로 ‘ㄴ’ 자형 구조로 남아 있다. 4.5m 높이의 작업실에는 우물, 화덕, 이젤, 소가구 등 당시 권진규 선생이 사용한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부조 복제 작품 두 점을 전시하고 있다. 시멘트로 쌓은 벽 위에 부재를 연결해 걸치고 지붕을 얹은 작업실로, 내부에 부분 복층을 만들어 작품을 진열했다. 햇살이 잘 들어오는 큼지막한 유리창과 벽면에 남아 있는 권진규 선생의 낙서와 강의 시간표도 흥미롭다. 작업실 현관 오른편에는 한 사람이 겨우 누울 만한 작은 온돌방이 있는데, 작업을 하다가 이곳에서 종종 휴식을 취했다고.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4시에 예약 방문자에 한해 무료 개방한다.
주소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로 26마길 2-15 문의 02-3675-3401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가옥


북촌 창덕궁 돌담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정갈하게 기와를 올린 1층 목조 가옥을 만날 수 있다. 1908년 한국 최초의 미술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선생이 1915년 일본에서 귀국해 수송동 옛 집에 머물며 창덕궁 후원 서쪽, 원서동 16번지로 이사를 결정하고 직접 설계한 목조 기와집이다. 그는 이곳에 1918년부터 41년간 머물렀다. 처음에는 ‘ㄱ’자형 한옥이었지만 화실과 사랑방을 증축했다. 가장 큰 특징은 전통 가옥과 일본 가옥 그리고 현대 자재의 조화다. 입구에 현관문을 두었고,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겨울의 추위에 대비해 복도로 연결했으며, 복도를 따라 유리로 된 미닫이 덧문을 달았다. 2002년 철거 위기에 놓인 고희동 가옥은 문화연대, 북촌문화포럼, 내셔널트러스트, 한옥아낌이모임 등 여러 시민 단체가 노력해 2003년 근대문화유산 대상 건축물로 지정됐고, 2004년에는 ‘원서동 고희동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84호로 등재됐다. 아쉽게도 1959년 고희동 선생이 떠난 이후 집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본래 모습을 많이 잃었다. 비록 가구나 소품 등 고희동 선생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안채와 사랑채를 해체하고 원형을 복원했으며 외곽 담장과 배수로 등 주변 정비로 마무리했다. 2011년 복원이 끝났지만 1년 넘게 비어있는 상태로 관리인만 지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나서서 고희동 가옥을 운영하게 된 것. 현재 손님방과 부부 방 등 집의 일부를 전시실로 꾸며 조금이나마 그의 흔적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가 아틀리에로 사용한 사랑방에는 그의 화실을 재현해놓았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5길 38 문의 02-2148-4165


자료 제공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재)아름지기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이명수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