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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새로움, 구례를 걷다
산이 있고 강이 흐르고 그 사이에 들판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다. 구례는 풍경으로 기본 흥행 요소를 모두 갖췄다. 이런 곳은 의외로 흔하지 않다. 더군다나 그 산과 강이 지리산과 섬진강이다. 우리에겐 익숙한 풍경으로, 구례는 ‘익숙한 새로움’이라 할 수 있다. 익숙함은 이미 경험한 것이고, 새로움은 말 그대로 처음 경험하는 순간이다. 구례에서는 이 두 가지 상이한 언어가 공존한다.

꽃과 햇살은 지천인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구례 전체를 돌아다녀도 공장 굴뚝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연기를 내뿜는 ‘산업 오라’는 애당초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구례가 가난하다 말하고, 어떤 이는 살 만한 땅이라고 말한다. 지리산과 섬진강, 오래되고 이름 높은 절집을 내세워 사람들을 끌어들이지만 이런 모습이 구례의 진정한 맛은 아니다. 정면으로 보이는 얼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뒤태도 있으며 속살도 있다. 그 속에는 화장하지 않은 말간 얼굴과 수줍은 미소, 자연에 순응하는 노동, 평생 이 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신념 같은 것이 깃들어 있다. 그러한 참모습을 볼 수 있다면 구례 여행은 긴 여운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산동면 현천마을에서 만나는 화양연화
구례군 산동면 현천玄川마을로 향한다. 살짝 열어둔 차창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을 만끽한다. 산동면 온천 지구를 조금 지나 원촌사거리 쪽으로 내려선다. 삼성교 말고 어색하게 뚫린 좁은 길을 따라 송평마을 입구에서 좌회전한 후 굴다리를 지나면 현천마을 초입이다. 60여 년 전 어느 날, 산동면의 모든 굴다리 아래에서 양민들이 학살됐다. 시간은 피를 씻어냈고 사람들은 그 흔적을 차로, 발로, 살림으로 덧씌웠다. 그리고 그 위로 산수유꽃이 피었다.
현천마을은 구례군의 북쪽 끝에 있다. 서쪽으로 견두산을 넘어서면 곡성군 고달면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전북 남원시와 맞닿는다. 마을 뒷산인 견두산이 ‘현玄’ 자형으로 되어 있고 마을에는 풍부한 내川가 흐르니 산과 물의 아름다움을 딴 마을 이름이다. 구례지만 구례읍보다 남원에 가깝다. 역사적으로 산동은 남원과 구례에 속하기를 반복했다. 산동 사람들은 그것이 싫어 지금도 토박이 산동 사람은 구례와 산동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구례에서 살던 지난 8년 동안 산동에서 매년 산수유를 보았다. 운 좋게 형용할 수 없는 장면도 몇 번 만났지만 꽃 자체로 보자면 항상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화려하다. 그때를 기다린 사람처럼 언제나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순간에 도착한다.
정해진 산책로가 아닌 마을 전망대로 향하는 짧은 언덕길을 오른다. 산수유나무 사이로 촘촘하게 들어선 마을을 내려다본다. 산수유 시즌에 현천마을을 주로 찾는 이유는 꽃구경을 나온 거대한 이방인 무리를 만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홀로 나선 길에서 바라는 것은 고요함이다. 유보한 생각을 끄집어내고 미루어둔 고민의 갈피를 넘겨볼 수 있는 길, 지금 그 길 위에 서 있다.

꽃 천지 속에 향기가 없다. 산수유꽃은 향기가 없다. 그래서 산수유를 벙어리 꽃이라 한다. 산수유는 꽃 속에서 작은 망울이 다시 터지는 아우성 같은 벌 떼 작전을 구사하는 꽃이지만, 향이 없으니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햇살이 눈부시다. 눈에 모두 담을 수도 없는 저 많은 꽃 사이를 관통한다. 색色은 빛의 파장이 만들어낸 결과 물이며, 결국 우리가 빛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 자연의 배려다.
이런 풍경 속에서는 ‘성실과 근면’에 항상 열등감을 느낀 당신을 잠시 내려놓아도 좋다. 느리게 걸으며 자주 걸음을 멈춘다. 마을을 내려다보며 ‘어디 빈집 없나?’ 하는 상상은 미래를 채근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멀리 마을 가운데 길로 한 사람이 걸어가다 곧 시야에서 사라진다. 집과 차는 보았지만 사람은 처음 본다.
산동면 산수유山茱萸. 꽃은 구경하는 것이고 돈은 열매가 담당한다. 열매는 주로 한약재로 사용한다. 산동 사람들의 경제에서 산수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높다. 이곳 사람들은 산수유나무를 ‘대학생 나무’라 부른다. 큰 산수유나무 한 그루면 자식 대학 등록금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산이 들어오기 전에 산동 사람들 주머니가 두둑하고 어깨에 힘을 준 원동력도 산수유였다.

현천마을은 마을 입구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예산’을 투입하지 않은 탓에 비교적 마을의 원형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 돌담이 흔하고 마을 길은 구불구불하다. 현천마을 주민은 외지인의 방문에 익숙하기도 하고 무감하기도 하다. 비교적 젊은 아주머니 두 분이 좁은 돌담길을 올라오는 나를 내외하며 지나친다. 여인들은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한다. “오늘이 장인가? 갈치 쪼가리라도 거시기 혀얄 텐디.”
산동면은 구례군에서 유일하게 면 단위 오일장場이 서는 마을이다. 도시 사람의 눈으로는 ‘이게 장이야?’라는 말이 나올 만큼 소박한 규모지만 중요한 것은 여전히 장이 선다는 사실이다. 2일과 7일이 산동 장날이다. ‘우리 장’, 구례 읍내 장과 구분하는 것이다. 그 까칠함이 좋다. 그것이 산동의 속 깊은 매력이다.
현천마을 구례군 산동면 계천리 현천마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름하여 화전花戰. 꽃들의 전쟁이다.

벚꽃 길에 관한 행복한 마이너리티 리포터
산수유와 매화의 색이 바랠 즈음이면 벚꽃 잎이 섬진강으로 흩날린다. 이곳에 살다 보면 1년에 딱 두 번 차가 밀리거나 막힌다. 3월 마지막 주와 4월 첫째 주말이다. 벚꽃 구경이 원인이다. 구례군 문척면 동해마을에서 간전면 하천리까지 이어지는 벚꽃 길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그러나 이 길은 19번 국도의 하동 쌍계사 십리 벚꽃길 그늘에 가려져 비교적 한가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물론 이 한가함에 대해 ‘마이너리티’라는 수식어는 적당하지 않지만 꽃들이 느낄 상대적 박탈감을 미루어 짐작한 표현이다. 여행을 가면 맛집 정보를 미리 알아두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지만, 종종 ‘그 동네 사람’이 많이 앉아 있는 식당 문을 기웃거리는 방법을 택한다. 문척면 죽마리 사성암 아래 벚꽃 터널이 그런 곳이다. 이곳은 외지 사람보다 벚꽃 시즌에 구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일종의 전용 꽃밭이다.

동해 벚꽃로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 동해 벚꽃로 
사성암 아래 벚꽃 길에서 강을 바라보다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동한다. 문척면 화정리 오봉정사 앞의 벚나무가 수려하다. 운이 좋다면 지는 산수유와 절정의 벚꽃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몇 년 동안 그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곤 했다. 그 자리가 꼭 최고여서가 아니라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 번듯하지 않은 몇 그루 나무가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오봉정사는 그런 곳이다. 한 사람을 위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 머무는 단 한 사람. 벚꽃이 절정이면 바람이 분다. 주변의 수백 그루 벚나무, 수만 송이 꽃, 수십만 개의 꽃잎 중 하나가 내 앞으로 떨어진다. 꽃과 사람 사이에도 인연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 서서 당신을 바라보고 위로받는 이 시간은 어쩌면 예정된 일인지 모른다. 오봉정사 앞에 서면 항상 나무에 감사한다. 언젠가 당신에게 찾아올 나를, 이렇게 온전히 서서 맞이해주어 감사하다고.

오봉정사
구례군 문척면 화정리 오봉정사길 113
벚꽃 잎이 섬진강으로 흩날릴 즈음 연곡분교를 찾으면 절정에 이른 벚나무를 만난다. 19번 국도보다 3~4일 늦게 꽃이 핀다. 피아골 계곡으로 오르는 높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연곡분교의 외형은 일반 분교보다 튼실해 보인다. 1997년 3월 1일, 토지동초등학교가 연곡분교로 편입되었다. 대한민국 농촌 학교 대부분이 그렇듯 학교의 질량은 초라해졌고 교정의 벚나무는 몸집이 커졌다. 불과 10여 명이 다니는 분교의 벚나무는 학교를 파수把守하는 하나의 상징 같다. 연곡분교 벚나무 아래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작은 것들의 가치를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큰 것이 작은 것을 점령하고 포식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결국 가장 큰 것 하나만 남을 것이다. 연곡분교는 구례에서 마지막으로 꽃비를 배웅하는 간이역이다.

연곡분교
구례군 토지면 남산길 18

연곡분교에서는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 있는 마술이 가능하다.

오래된 집이 있는 마을, 오미동
오미동을 방문한 여행객의 공통된 표현은 “마을이 참 예쁘다”는 것이다. 오미리에는 유독 103번지가 많다. 마을의 어머니들에게 물어보면 약간 과장해서 한 집 걸러 번지수가 ‘오미리 103번’이다. 진짜 103번지에 있는 집은 마을 사람들이 아흔 아홉 칸 집이라 부르는 운조루雲鳥樓다. 1929년에 무라야마村山智順라는 사람이 <조선의 풍수>라는 책을 썼는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금내리 및 오미리 일대에 1912년께부터 이주자들이 모여들었다. 충청남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각처에서 꽤 지체 높은 양반까지 와서 집을 짓기 시작하여 현재(1929년) 이주해온 집이 일백여 호에 달한다. 비기秘 記에 말하기를 이곳 어디에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락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 寶交聚’의 세 진혈이 있어 이 자리를 찾아 집을 짓고 살면 힘 안 들이고 천운이 있어 부귀영달….”

미늘기. 가깝기 때문에 익숙하고 가깝기 때문에 느닷없다.

좋은 땅은 찾는 사람도 많고 물산도 풍부하지만 그만큼 뺏으려는 세력도 많을 수 밖에 없다.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은 이곳 사람에게 특히 깊은 시련을 안겨주었다. 이곳에서는 젠피 가루(초피 가루)를 즐겨 먹는다. 외지 사람들은 추어탕에 넣어 먹는 강한 향의 향신료를 기억할 것이다. 빨치산 토벌 당시에 군인들을 맞아 밥을 대접하면서 습관적으로 젠피 가루를 국과 김치에 넣었다. 그 맛을 처음 본 군인들 은 이장을 끌어내 죽도록 때렸다. 독약을 넣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오미동의 안온함 이면에는 이런 쓰라린 고통이 서려 있다.
운조루와 오미동은 머리 위로 지리산을 이고 있다. 마을 돌배나무 꽃이 필 무렵 먼 산에 눈이 쌓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완만한 봉우리를 ‘미늘기’라고 부른다. 그런 이름이 왜 붙었는지 물었지만 설명해주지 않거나 아무도 모른다. 3월, 지난밤 마을에 비가 내릴 때 해발 1000m 미늘기에는 눈이 왔다. 아침에 마을에서 만난 대평댁도, 덕암댁도 모두 같은 말을 했다. “미늘기 눈 온 거 봤남?”
이곳에 살면서 느끼는 점은 그 모든 산과 강과 들판과 나무와 골짜기가 저마다 ‘때’가 있고 그때 비로소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오늘은 미늘기가 말을 하는 날이다. 미늘기가 말을 하자 돌배나무 꽃이 빛났다. 미늘기에 눈이 쌓이고 돌배나무 꽃이 만개하면 오미동 들판은 겨울을 견딘 밀이 힘차게 땅 위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이제 노인들은 들판으로 나갈 것이다. 겨울은 길었지만 봄은 올 수밖에 없다.
오미동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길

구례는 아름답다. 이것은 어떤 주관적으로 판단해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사는 사람과 잠시 머물다 간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객관적 사실이다. 객관적으로 아름답다는 공감은 구례가 가진 큰 자산이기도 하다. 구례는 하나의 읍과 문척, 간전, 토지, 마산, 광의, 용방, 산동 일곱개 면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천년의 시간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를 품은 마을과 길 그리고 사람이 있다.

운조루 앞마당에 물앵두꽃이 피었다.

#구례
글과 사진 권산 | 담당 김민정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