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항간에서는 푸른 눈, 갈색머리, 190cm가 넘는 키를 한 영락없는 서양인 하나가 “내 고향은 전라도요, 내 영혼은 한국인입니다”라고 큰 목소리로 외치며 다닌다는 소문이다. 그이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면 굳이 ‘전라도 순천 촌놈 아무개올시다’라고 밝히곤 한단다. ‘반만 년 유구한 역사에 빛나는 단일민족’ 운운의 순혈주의 교육에 젖은 한국 사람들이라면 대개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매, 전라도 순천에 거 뭐시다냐, 앵글로색슨족인지 켈트족인지 코 큰 노랑머리 부족이 산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요잉?’ 하며 그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이와 반나절만이라도 이야기를 나누어본다면 참말로 전라도 촌놈인 것을 단박에 실감한다는 것이다. 아니 저이는 ‘그냥 전라도 촌놈’이 아니라 ‘뼛속까지 전라도 촌놈이요, 영혼까지 한국인’임을 공공연히 자랑한다는 것이다. 뿐 아니라 단군 이래 이땅에 대대로 살아온 우리에게 도리어 ‘당신들이 진정한 한국인이 맞느냐?’고 반문하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끔 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누구인가?
‘전라도 촌놈’을 만나러 갔다. 많은 ‘촌놈’들이 촌을 떠나 도회지로 올라왔듯 저 ‘전라도 촌놈’도 전라도에 있지는 않았다. 나는 서울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를 찾았다. 지난 해(2005년 5월) 새롭게 개원한 센터의 현대식 건물이 눈부신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만치 커다란 사내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온다. 한눈에 사진에서 보았던 예의 ‘전라도 촌놈’인 걸 알았다. 손을 내밀자 마치 작은 계란을 쥐듯 담쑥 내 주먹을 덮어 쥔 그가 은근히 팔을 잡아당긴다. 대단한 완력이다. 마치 기중기에 붙잡힌 듯 발꿈치가 번쩍 들린다.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 인요한, 순천 촌놈은 바로 저이이다.
1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실에 걸려 있는 어린 시절의 사진. 당시 제일 친했던 황인순(왼쪽)과 황용기(오른쪽)와 함께. 2 대학교 2학년이던 때 결혼식을 올렸다.
저이의 본명은 존 린튼John Linton. 1959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국내 최초로 구급차를 개발했고, 북한 결핵퇴치사업을 벌여왔다. 린튼 가문과 한국과의 인연은 무려 111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호남 기독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가 한국에 왔다. 유진 벨은 미국 애틀랜타에서 온 젊은 선교사 윌리엄 린튼(인돈)을 사위로 맞으니 이가 바로 인요한 소장의 할아버지이다. 윌리엄 린튼은 전주, 군산, 대전 지역을 중심으로 중, 고교를 설립하는 등 48년간 교육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의 셋째 아들 휴 린튼(인휴)은 전라, 경상도 도서 산간 지역에 6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아내 로이스 린튼(인애자) 역시 한국에 만연한 결핵 퇴치 사업을 위해 35년 동안 헌신적으로 봉사를 해왔다. 저이는 바로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 사이에서 태어난 5남 1녀 중 막내이다.
덩치 큰 저이에 비해 소장실은 아담했다.
“국제진료센터를 간략히 소개해 주시죠?”
“여기는 한국에 온 외국인들을 돌보는 곳이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갑자기 아프면 얼마나 당혹스럽겠어요. 1962년 외국인 진료소International Clinic로 시작해서 지난해 국제진료센터International Health Care Center로 승격했습니다. 건물 멋있죠? 무려 90년 동안 병원만 디자인한 팀이 설계한 겁니다. 저도 지난 3년 동안 그 팀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런데 건물을 너무 잘 지어 놓으니 문제가 있어요.”
“건물을 잘 지어서 문제라구요?”
“예전에는 거지부터 대사까지 출입을 했습니다. 어려운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이 이용을 했는데 건물이 너무 으리으리하니까 진료비가 비싼 줄 알고 그 분들이 지레 겁먹고 찾아오지를 않아요. 또 전산화가 완벽히 되어서 이제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몰래 도와줄 수도 없어요. 전에는 CT(컴퓨터 단층촬영)도 공짜로 해주기도 했는데요. 하하핫.”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연신 속사포처럼 말을 쏘아대는 저이는 과거의 ‘비리 선행(?)’를 밝히는 데도 거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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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참모습을 일깨우고 싶었다 “최근 펴낸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을 잘 보았습니다. 출간하신 계기가 있다면요?”
“첫째 한국인의 정이 쇠퇴하는 게 아쉬워서, 둘째 나를 설명하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들어서입니다.”
‘나를 설명하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든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낯선 이목구비의 그이가 한국말을 한국사람 못지않게 잘 구사하는 것을 처음 본 사람들이라면 왜 신기하지 않겠는가. 매번 자기의 출생과 성장을 반복적으로 말해야 하는 피로가 있었을 것이다.
“책을 펴내고 나니 주변 분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나이 드신 분들이 아주 좋아해요. 50, 60대 되신 분들은 그 시절 ‘정情의 문화’를 잘 알고 있지요. 우리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을 어쩌면 그렇게 되살려 놓았느냐고들 해요. 한 분은 읽으면서 눈물이 났다는 거예요.”
“선생님께서 아쉽게 생각하는 정情에 대해 좀더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요즘 한국 사람들의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정이 넘치던 옛날 모습을 자꾸 잃어버리고 있어요. 또,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자기 모습이 변하는 걸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고 있어요. 나는 진짜 한국인의 모습을 일깨워주고 싶었습니다. 한국인의 정서를 이야기하는 것 중에 하나로 ‘한恨’을 꼽기도 하지만 저는 한국인을 가장 한국인답게 하는 게 ‘정’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내 유년에 늘 ‘정의 문화’를 느끼며 살아왔어요. 어렸을 때 방물장수나 책 장수나 돗자리 장수들이 찾아왔다가 물건을 팔든 못 팔든, ‘아이구 배고파, 밥 좀 없어요?’ 하면 주인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밥상을 차려서 내오곤 합니다. 밥값이 얼마냐고 묻지도 않고, 달라고 하지도 않고, 당연한 듯 대접했죠. 만약 요즘 아무 집에나 가서 ‘밥 한 그릇 주시오’ 했다간 미친 사람 취급 받을걸요? 옛날엔 길 가던 나그네가 찾아와도 공짜로 밥 주고, 재워 보냈지요. 7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 남아 있었는데 이젠 사라져버렸지요. 나에게는 그 시절의 정이 각인되어 있어요. 그걸 되찾고 싶은 거지요.”
“자칭 ‘순천 촌놈’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하시는데요. 그 시절을 잠시 떠올린다면?”
“‘매곡동의 짠이’ 하면 순천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개구쟁이였지요. 미국 이름 ‘존’이 전라도 버전으로 ‘짠’이가 된 거지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개울에 가서 고기도 잡고, 앵두며 감이며 수박 서리도 하고, 겨울엔 쥐불 놓고, 새해엔 세배하러 다니고, 대보름엔 연 날리면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생김새는 달라도 여느 애들과 똑같이 어울려 다녔어요. 한국말을 하면서 한국 친구들과 함께 지내니 스스로를 외국인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저이의 몸에 밴 유년의 ‘전라도 촌놈’ 기질이 얼마나 끈끈한 것인지를 상기시켜주는 일화가 있다. 한국 아이들과 어울리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그이는 중
?고등학교 과정을 밟기 위해 대전외국인학교에 입학한다. ‘미운오리새끼’에서 비로소 생김새도 자신과 비슷한 ‘백조(?)’ 무리 속으로 돌아간 그이는 마음이 놓여야 마땅한데도, 오히려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고향 이 그립고,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흘리곤 했단다. 외국인학교는 대단히 기율이 엄격하고 합리적이었으나, 고향마을에서 누렸던 ‘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그이는 이때가 오히려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한국식으로 살아야지’ 결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결심 때문이었을까? 그이의 ‘한국식 삶’의 여정에는 여느 토종 한국인 못지않은 각별한 체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이는 광주에 갔다가 우연히 시민군 대표의 통역을 맡게 된다. 한국어와 영어에 능통한 그이는 외신에 ‘광주’를 알렸던 주역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 대사관으로부터 광주 사태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추방 명령을 받는다. ‘불순분자 인요한’은 그 길로 시골로 내려가 ‘요원’의 감시를 받으며 유배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 만난 같은 학교 치의예과 1학년 여학생 이지나 씨와 결혼신고를 했다. 언제 추방되어 한국과의 인연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사랑하는 한국 여인과의 결혼을 서두른 것이었단다.
속은 토종 한국인이었지만 겉모습은 영락없는 서양인이었던 그이는 학생들로부터도 오해를 사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일기 시작하면서 그가 걸어가면 ‘양키’라고 수군거리거나 싫은 기색을 내비치곤 했단다.
“당시엔 교련 교육과 문무대 입소라는 단기 입영제도가 있었지요. 친구들이 모두 문무대에 입소하는 걸 보고 ‘나도 저길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열외 인간이 되기 싫었고, 친구들과의 연대감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학도호국단 본부를 찾아가니까 미 대사관에 가서 허락을 받아오래요. 대사관에 갔더니 미국 국적인 사람이 한국 군대에 간다니까 어이없어하며 안 된다고 했죠. 하지만 나는 학도 호국단 단장에게 찾아가서 ‘미 대사관에서 문무대 입소는 개인의 문제라고 하더라, 나는 입소하겠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군복을 입고 제식 훈련, 행군, 유격을 제대로 받았죠. 문무대에서 돌아온 어느 날 육군 본부에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외국인 신분으로 문무대에 자진 입소했다고 상패를 준다는 것이었어요.”
저이는 외국인 신분으로 한국군 단기 입영을 한 유일한 인물이 된 것이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에 있는 한 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했어요. 4년간 열심히 일하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냥 미국에 눌러 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살던 고향, 느티나무, 친구들 모습이 어른거리는 거예요. ‘그래, 내가 살 곳은 한국이야!’ 결국 이곳으로 돌아왔지요. 김치 생각도 간절했고요.”
미국에 있는 동안 어찌나 한국 이야기를 많이 했던지 인도 친구 한 명은 ‘너는 그 나라(한국) 먼지도 좋지?’ 하고 묻더란다.
1 큰딸 한나 양과 함께. 벌써 대학생이 되었다. 2 고생을 해봐야 행복이 뭔지를 알게 된다고 강조하는 인요한 소장. 최근 50년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크게 변했고, 그중에서도 한국의 발전은 눈부시지만 가장 중요한 정서인‘정情’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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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술 교사가 꿈인 한나 씨가 지난 여름 미국 시카고대학으로 떠나기 전 가족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인요한 소장, 부인 이지나 씨, 둘째딸 에스더, 큰딸 한나, 막내아들 유진 군. 2 인요한 소장은 한 달에 한 번쯤 자신이 존경하는 손양원 목사의 산소에 간다.힘들 때도 찾는다. 그 분을 떠올리면 “내가 불평하고 힘들어 하는 것이 너무 하찮아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한다. 손 목사는 당신의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임으로써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다. 손 목사는 인요한 소장이 아는 한 기독교인으로서 사랑과 원칙, 모두를 실천한 가장 완벽한 크리스천이었다.
길은 험난해도 웃으면서 가자
“선생님 가문은 대대로 한국에서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해오고 계십니다. 선생님 역시 구급차 보급 사업이랄지, 북한 결핵치료사업처럼 누군가를 돕기 위한 이타적인 삶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무엇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자리’적 삶에서 나아가 ‘이타’적 삶을 살도록 했는지요?”
“남을 돕는 것은 동시에 나를 돕는 일입니다. 성경에도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고,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지요.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였습니다. 돌이켜보니 내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참 많은 빚을 졌구나 생각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갚아야 할까 고민을 했었죠.”
“선생님과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한국형 구급차를 만들어 보급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그 계기를 좀 말씀해주십시오.”
“1984년, 순천에서 교회 짓는 데 쓸 자재를 운반해오던 아버지가 관광버스에 치였습니다. 버스 기사가 음주 운전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병원에는 구급차가 없었습니다. 겨우 택시를 불러서 광주에 있는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그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나는 울화통이 터졌지요. ‘빠른 시간 안에 응급 처치만 제대로 받았어도…´ 하는 아쉬움 때문이지요.”
이 때에 그이는 한국의 응급의료체계를 혁신적으로 바꾸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1992년, 뒤늦게 미국에 있던 아버지 친구들이 보내온 조의금으로 구급차를 한 대 만들어 순천 소방서에 기증을 하게 된다. 그 뒤 어느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을 다니면서 구급차와 응급구조 시스템을 살펴본 그이는 1995년, 한국형 구급차를 만들어 전국에 3000여 대를 보급하게 된 것이다.
“구급차 보급에 어려운 점은 없으셨는지요?”
“구급차를 만들어 보급하느라 관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양반들이 이러는 거예요. ‘우리 실정엔 맞지 않아요. 아, 죽는 사람들이야 자기 명이 짧아서 죽은 거지 인력으로 어쩔 수 있나요?’ 이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납니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 아닙니까? 옛날 도깨비 씨름 이야기 알아요? 도깨비를 만나도 왼씨름으로 넘기잖아요. 요즘, 힘들다고 자살하는 사람들 많아요. 카드 빚 졌다고 한강에 풍덩! 이것은 한국 사람의 본 모습이 아닙니다.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는 것, 그냥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서 이겨내는 것, 그게 한국인의 본 모습입니다. 북한에 결핵치료사업을 하러 다니면서 이런 표어를 보았습니다. ‘가는 길은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가슴에 와 닿더군요. 그 말 속에는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낙천적인 기질과 강단이 온전히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현재 한국형 구급차는 외국과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선진국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지금은 전국 도시, 농촌, 섬 가리지 않고 각지의 소방서와 병원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400곳 소방서 산하 응급 구조대에서 연 100만 건 이상 출동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한 가지 개선할 게 있다면 의사의 지도 하에 응급 구조사들이 의료 행위 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북한 결핵퇴치사업과 의료장비 지원사업 등 통일을 위해 기여한 공로가 인정돼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으셨는데요, 소감은요?”
“제게 준다기보다 우리 린튼 가문 전체를 대표해서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정부에서 우리가 한 일을 인정해 주니까 기분이 좋았어요. 마침 어려운 일도 있었는데 많은 용기를 얻게 되었지요.”
“북한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되었는지요?”
“미국에 본부를 둔 유진 벨 재단이 1995년 한국 입국 100년과 한국 사역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한 재단인데요, 미국 내 한인동포의 후원을 받아서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사업을 벌이고 있었어요. 그러다 북에서 식량보다 결핵퇴치사업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어요.”
결핵은 남한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당시 북한에서는 국가적인 난제로 꼽힐 만큼 결핵이 창궐하고 있었다. 그이는 ‘유진 벨 프로젝트’를 발족시켜 대북결핵퇴치사업을 시작했다. 2000년도에는 한국에도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한다. 그이는 유진 벨 재단 이사장인 형 스티븐과 함께 성금을 모아서 북한을 돕기 시작했다. 지난 11년 동안 모두 350억 상당의 식량과 의약품과 의료장비를 북한에 지원했단다. 그 결과 결핵환자 20만 명을 치료했고, 그 중 15만 명이 완쾌하는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다.
“일각에선 ‘퍼주기’라며 비판하는 분들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중에 만 원으로 막을 걸 지금 십 원으로 막을 수 있어요. 퍼주기가 아니라 통일 비용을 줄이는 겁니다. 북한에는 3%가 관료이고 97%가 인민입니다.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는 순박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수해,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와 결핵과 같은 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의료장비와 기구가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북한 의사들은 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봅니다. 평북 선천에 있는 결핵 요양소에 검진차를 기증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김애란이라는 할머니 의사는 결핵환자를 돕는 흉부외과 일을 하면서 너무 오랫동안 방사선에 노출돼 조혈세포가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몇 년 뒤 그분은 끝내 백혈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제대로 된 X선 촬영기구가 없어서 생긴 일이지요. 자신의 건강을 해칠 줄 번연히 알면서도 희생을 마다 않는 의사들이 많았습니다.”
그이에 따르면 북한 의료 인력은 숫자도 많고, 실력도 수준급이었으나 의약품, 의료장비 등과 같은 기초의료 인프라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해서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있긴 있지만, 거시적으로 민족의 통일을 내다볼 때에 인도적인 교류와 협력마저 냉각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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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얼굴 되비춰주는 진짜 한국인
“젊은 시절 외모와 의식의 불일치에서 오는 정체성의 혼돈은 없었나요?”
“당연히 있었지요. 한때 나는 경계인으로서 카멜레온처럼 살았어요. 눈치를 보는 저 스스로가 비굴한 느낌이 들곤 했지요. 그러다가 대학 4학년 때 정신과 공부를 하면서 깨달았어요. ‘나는 나다’ ‘양쪽 다 좋은 거 가지련다’ 미국 사람들은 합리적이어서 공과 사를 잘 구분해요. 하지만 나머지는 한국 문화가 더 우수해요. 매사에 여유와 융통성이 있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계획이 있다면요?”
“이북의 보건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에 통일을 대비해서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요. 지금 이북을 돕는 공식 단체만 오십여 개 되는데요, 그분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돕고 싶어요.”
“늘 분주하시겠지만 여가 시간은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요즘은 하도 정신없이 살아서 짬을 내기가 쉽지 않네요. 시간 나면 늦둥이 막내아들 하고 놀아요. 함께 축구도 좀 하고, 바람 불면 언덕에 올라서 연도 날리지요. 전통 연을 손수 만들어서 띄우지요.”
“방패연요?”
“아니, 가오리연요.”
으음─. 참고로 가오리연은 대나무 살 두 개면 뚝딱 만들 수 있지만, 방패연은 살이 다섯 개나 드는 정교한 연이다. 나는 사랑하는 막내아이와 저이가 천천히 방패연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푸른 눈을 가진 한국인 인요한, 나는 그이가 펴낸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생각의 나무)이라는 책의 제호를 보며 가슴 한 켠이 아릿했었다. 그가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강조하는 만큼 경계인으로서의 아픔이 스며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이는 그것을 딛고 이제는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의 얼굴을 되비추어주는 거울이 되고자 한다. 비록 생김새는 우리와 달라도 전라도 순천 시골에서 태어나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말을 쓰며,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정에 대해 누구보다도 애정을 갖고 있는 저이는 부인할 수 없는 속 찬 알짜배기 한국인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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