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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30주년을 맞은 박여숙화랑의 대표 박여숙 씨 화랑은 곧 나의 사명입니다
미술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1983년, 압구정동에 ‘박여숙화랑’을 열고 30년을 달려온 박여숙 대표. 스물아홉 살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화랑을 연 이후 단 한 번도 미술과 자신을 분리해 생각한 적 없다는 이 당당한 여인의 삶을 들여다보니 그 자체가 곧 한국 화랑의 역사입니다.


짧은 머리와 단아하고도 세련된 패션이 트레이드 마크인 박여숙 대표는 스스로 30년간 ‘잘 견뎌왔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의 남다른 추진력과 독창적인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 속 작품은 이대원 화백의 ‘농원’(1992)과 ‘나무’(1986).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의 말을 빌리면, 한 인간의 깊이는 자잘한 삶의 동요가 가라앉아야 비로소 얼굴에 드러납니다. 다정한 눈매와 날카로운 혜안을 동시에 지닌 박여숙 씨의 얼굴에는 지난 30년간 그가 차곡차곡 쌓아 올린 수확의 결실이 녹아 있는 듯합니다. 미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수백 회가 넘는 전시를 기획해온 그는 그야말로 한국 화랑의 산증인입니다. 박여숙화랑이 개관 30주년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장인 이태호 교수와 공동 기획으로 개최한 전시 <컬러풀 코리아Colorful Korea>에는 한국 현대 회화의 대표 작가 김환기, 김종학, 이대원 씨와 사진작가 배병우, 염장 한광석 씨 등 다섯 명의 대가가 참여했습니다. ‘한국의 색’을 작업해온 다섯 작가는 모두 박여숙화랑과 특별한 인연이 있지요. 문득 박여숙 씨가 화랑을 연 30년 전이 궁금해집니다. 스물아홉 살이던 당시 그는 임신 6개월이었다는군요.

“이름을 내걸어야 세상이 기억하지요” “지금은 본인의 이름을 내세운 갤러리가 흔하지만, 당시엔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조선일보에 ‘김충복과자점’과 ‘박여숙화랑’의 오픈 소식이 기사로 함께 나가기도 했지요. 후후. 영세하고 소규모인 화랑을 가장 빨리 알릴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김충복과자점은 없어졌지만, 박여숙화랑은 현재 국내 미술계를 상징하는 대표 화랑으로 성장했습니다. “개관 30주년 소식을 듣고 다들 깜짝 놀라더군요. 30년을 걸어오는 길이 쉽지 않았지만, 미술을 향한 애정과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참고 인내한 근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습니다.” 홍익대학교에서 응용미술학을 전공한 그는 1975년 졸업 이후 건축 전문지 <공간>과 미술 잡지 <선미술>에서 기자 생활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접해온 미술에 관한 소양과 기자 시절 쌓은 전문 지식이 그를 자연스럽게 화랑의 세계로 이끌었나 봅니다. 이후 예화랑에서 약 6개월간 큐레이터로 재직하면서 도예 작가 윤광조ㆍ노경조ㆍ김익영 선생의 3인전과 서양화가 김원숙 씨의 개인전을 기획했습니다. 짧은 경력으로 6개월 내에 굵직한 내공이 필요한 전시를 두 개나 기획한 일은 이례적이었습니다. 다음 해 그는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압구정동에 덜컥 ‘박여숙 화랑’을 열었지요. 둘째 딸을 배 속에 품고 있었고 남편이 만류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 그는 밀어붙였습니다. 이후 그의 세상은 ‘화랑’이 되었습니다.

작가가 전시하고 싶어 하는 화랑 화랑의 첫 전시는 서양화가 김점선 씨. 괴팍하고 자유분방하기로 유명한 그는 박여숙 씨의 고향인 부산의 화실 선배이기도 했지요. 박여숙 씨의 대학 입학 축하 기념으로 ‘홍씨상가’라는 퍼포먼스를 열 정도로 친분이 깊었습니다. 그가 개관전의 주인공이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강물처럼 잔잔한 시작은 아니었습니다. “워낙 괴팍한 성격 탓에 전시가 끝나기도 전에 작품을 걷어간다고 선언하지 않겠어요? 주변 사람들의 설득으로 다행히 별 탈 없이 전시가 끝났지만 당시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죠. 작품 한 점당 30~50만 원에 거래되면서 처음으로 화랑의 수입이 생겼어요.” 전시 작품의 60%를 판매하는 등 실적도 남달랐고, 미술계 반응도 좋았습니다. 원로 작가들도 신선한 전시라고 호평했으니 화려한 출발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조각가 이영학 선생의 전시였는데, 이탈리아 유학 시절의 작품과 국내 작업 작품을 함께 선보이면서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박여숙화랑은 두 전시를 계기로 작가들 사이에서 이른바 ‘전시하고 싶은 화랑’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역량 있는 젊은 작가를 발굴해 미술 시장에 소개하면서 화랑은 오히려 큰도약을 맞이했습니다. 신용 카드 할부 결제를 도입해 작품의 대중화에도 한몫하면서 명실상부한 한국 대표 화랑으로 자리매김했죠.

한국의 대표 작가들과의 인연 정창섭, 서세옥, 박서보, 김종학, 이대호, 전광영, 이강소, 김원숙, 김웅, 변종곤, 이영학, 김강용, 이종빈, 서정국, 남기호, 김남진, 장승택, 이진용, 박용남, 이영섭, 임만혁, 허달재, 구성수, 권부문, 이재효 씨 등 한국 현대 미술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들이 박여숙화랑에서 전시를 했습니다. 모든 작가와 남다른 인연이 있지만, 설악산의 화가 김종학 선생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어릴 때부터 골동품을 참 좋아했습니다. 땅만 파면 골동품이 나온다는 소리에 틈만 나면 경주 이모 댁에 놀러 가곤 했지요. 대학에 다닐 때는 학교 근처에 있는 아현동 골동품 가게에 수시로 들러 물건을 고르곤 했어요. 원서동에 있었던 공간사에 재직할 때는 매일 인사동에 들렀는데, 골목길에서 김종학 선생을 우연히 만나기도 했어요. 둘 다 골동품을 참 좋아하거든요. 설악산 작업실도 방문하고, 인사동에서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전시까지 열게 됐지요.” 고급스러운 것보다는 형편에 맞게 구입할 수 있는 작은 소품을 좋아한다는 그는 최근에는 찬탁과 돌냄비를 구입할 정도로 여전히 민예품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런 관심은 그가 생활 도자기 보급 운동의 일환으로 개최한 전시를 바탕으로 1999년에 개관한 도예 전문 갤러리 ‘우리그릇 려麗’로 이어집니다. 소박하면서도 우수한 고유성을 지닌 우리 그릇의 빼어남을 알리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갤러리로, 현재 그의 동생 박은숙 관장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배병우, ‘BWN1A-022HC’, 153×275cm, c - print mounted on plexiglas, 1996.

김종학, ‘꽃과 나비’, 50×30cm, oil on trencher.

김환기, ‘산월’ 100×72.7cm, oil on canvas, 1950~1960. 모두 화랑 개관 30주년 기획전 <컬러풀 코리아>의 작품들이다.

해외 시장에서 더 알아주는 우리 그림 박여숙화랑이 한국 작가의 전시에만 공을 들인 건 아닙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세계로 그 무대를 확장하는 시기였습니다. 한국 작가를 해외에 소개하고, 해외 유명 작가를 국내에 선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던 그는 1993년 미국 LA 아트페어를 계기로 현재까지 매년 아트페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많은 도시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바젤, 홍콩, 쾰른 아트페어 등 매년 한 도시는 꼭 참여하려고 합니다. 해외 아트페어에서 한국 작품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높아지고 있지만, 세계적 작가가 나오기 위한 토양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에요. 작가를 알리기 위해서는 자본력을 갖춘 뮤지엄과 출판, 정부가 동시에 지원해야 하는데 그 삼박자를 갖추기 어렵거든요. 홍콩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한국 작가의 작품이 10만 달러 이상을 기록하지만, 국내에서는 전혀 수요가 없어요. 컬렉터의 수도 적고, 화랑에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2014년에는 더 많은 기회를 노려볼 생각이에요.”

매해 유수의 해외 아트페어에 참여하지만 정작 30년 화랑을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적은 없답니다. “그림으로 큰돈을 번 적은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화랑을 유지ㆍ운영해오기 어려웠을지 몰라요. 디자이너 강희숙ㆍ강진숙 씨가 청담동에 건물을 지으면서 적은 임대료로 1백 평이 넘는 갤러리 공간을 제공해 화랑 운영에 전력투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이한상 전 삼풍백화점 사장의 배려로 좋은 조건으로 삼풍갤러리를 3년간 운영할 수 있었죠.”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강태공이 되어야 할 때가 옵니다. 물길의 기세와 심리전을 하며 대어를 낚는 어부처럼 박여숙 씨는 위기를 기회로, 기회를 발전으로 만드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 패트릭 휴즈, 제니퍼 버틀렛, 로이 리히텐슈타인, 조지 리키, 프랭크 스텔라, 나이젤 홀, 해리 게리츠, 이고르 미토라이, 줄리아노 반지 등 세계적 작가들의 전시를 기획하며 한국 미술계에 ‘한 수’를 놓았습니다.

1 박여숙 대표가 ‘완벽한 한 팀’이라고 표현한 대지 미술가 크리스토와 잔클로드 부부와 함께.
2 1982년 예화랑 큐레이터 시절 ‘도예 작가 3인전’ 오프닝 사진으로 왼쪽부터 건축가 故 김수근 선생, 미술사학자 故 최순우 선생, 박여숙 대표, 도예가 김익영 선생.
3 화가 권기수 씨의 개인전에서 권기수 작가와 박여숙 대표, 그리고 둘째 딸 최수연 씨.
4 2008년 개관한 박여숙화랑 상하이 지점의 큐레이팅을 맡기도 한 딸 최수연 씨는 어머니의 대를 이어 화랑을 운영할 계획이다.

한광석 작가의 ‘전통 염색’ 시리즈와 박여숙 대표.

“박여숙 대표는 대범하고 통이 커요. 도전적이면서 여성적 감수성으로 매번 독특한 기획을 선보였죠. 김종학, 이대원 선생의 작품이 부상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등 수면 아래 있는 작가를 알아보는 눈이 탁월합니다.” _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장 이태호 교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눈 “미국 선박 회사의 한국 지사장이던 아버지는 항상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하셨어요.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해외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화랑주가 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께서는 진한 화장을 무척 싫어하셨고, 피부에 맞게 옷 색깔을 맞춰 입으라는 조언을 하셨죠. 여자가 술을 마실 줄 알아야 한다며 절 앉히고 술을 가르치고…. 책임감이 강한 어머니도 닮은 것 같습니다.” 어릴 적부터 쌓아온 경험이 그가 독자적 세계관을 구축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미술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남다른 DNA와 아름다움에 대한 신념 때문이지요.
알랭 드 보통은 “예술은 인간의 조건인 고난을 웅대하고 진지하게 바라 볼 수 있는 유리한 관점을 준다”라고 했습니다. 미술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 삶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은 반대로 우리에게 왜 미술이 필요한지 역설합니다. “그림을 보는 문화가 자리 잡길 바라요. 9년째 쾰른 아트페어에 참여했는데, 가족이 함께 논의하며 작품을 구매하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페어에 오기 전에 평론이나 기사를 참고하고, 1년 저축해서 꼭 필요한 작품을 소장하려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요. 건전하게 소장하는 문화는 장려해야 하는데, 그림을 구입하면 안 되는 여론이 형성되어서 안타까워요.”
전시 작가들이 좋은 평가를 받고 발전적으로 성장할 때 가장 뿌듯하다는 그는 화랑 역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박여숙화랑이 실력 있는 작가를 국내외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우리 삶을 궁극적으로 풍요롭게 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2014년에는 특히 역량 있는 신진 작가를 발굴해 대중에게 알리는 소임에 더욱 박차를 가하리라는 계획을 전했습니다. 마음이 확고해 모든 기초를 세운다는 이립而立의 세월에 방점을 찍었으니, 앞으로 더욱 미술계에 백의종군하리라 다짐하는 박여숙 씨. 추운 겨울을 견디고 그 차가움을 자기 안에 꾹꾹 눌러 담고 여름을 기다리는 보리처럼 그는 여전히 오늘도 치열하게 다음 전시를 준비합니다. 그 가열찬 열정과 끈기가 박여숙화랑의 내일을 더욱 기대하게 만듭니다.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이명수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