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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 크레이에티브 디렉터 오준식 씨 나는 서울에 사는 디자이너다
만약 외국에 ‘서울’이라는 이름의 호텔을 짓는다면 과연 서울의 어떤 점을 부각해야 할까? 단순히 로비에 한국화를 걸거나 기와를 얹은 호텔이 매력적일까? 세계 어느 도시도 선사하지 못하는 서울의 매력은 바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서울 그 자체다. 디자인계의 혁신적 아이콘이자 아모레퍼시픽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새로운 도약을 펼치는 ‘서울리스타’ 오준식 씨가 담고 싶은 서울 그리고 서울다운 집.


다이내믹하고 열정이 넘치는 도시 서울 그리고 서울에 사는 디자이너의 집. 아모레퍼시픽 브랜딩&디자인 랩
오준식 상무는 단순히 화장품을 파는 것이 아닌, ‘서울’의 문화적 경험을 전하기 위해 서울을 읽고, 서울다움을 고민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떤 장소에서 살아간다는 뜻이고, 장소는 삶을 떠받치는 토대다. 또한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 이상의 맹목적인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신작 <블루 재스민>을 비롯해 유독 뉴욕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영화를 연출한 우디 앨런에게 ‘뉴욕’은 바로 그 자신이요, 영감의 보고다. 걷기만 해도 행복을 느끼게 하고 그곳에 있다는 사실하나로 생의 환희를 경험하게 하는 곳이 바로 뉴욕이라니, 오죽하면 죽으면 죽었지 뉴욕을 떠날 수 없다고 했겠는가. 국내 디자인계의 혁신적 아이콘으로 손꼽히는 아모레퍼시픽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오준식 씨에게 ‘서울’ 역시 그러한 의미다. 취재에 앞서 꼭 ‘서울에 사는 디자이너’로 보이면 좋겠다고 신신당부한 그의 눈빛에선 저 너머 세계에 대한 얄팍한 동경이나 호기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의 많은 도시를 다녀보면 서울을 보다 멀찍이서 바라볼 여유가 생겨요. 한국은 이미 아시아 각국에 문화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고, 서울은 어느덧 국제적 판타지가 있는 도시로 조명되고 있는데 정작 우리가 인정을 안 하는 분위기랄까. 제 자신도 ‘서울 사는 디자이너는 ○○해야 한다’라는 정의가 필요한 시점이었고요.”


1 현관에서 안쪽 거실까지 깊게 펼쳐지는 공간. 벽처럼 보이는 슬라이딩 도어를 닫으면 현관 앞 밀실이 만들어진다. 2 서울의 이미지와 활자들이 빼곡하게 자리한 아이디어 보드. 할리우드 영화 속 주인공처럼 ‘몸짱’에 도전하기 위해 봉도 달았다.

내가 사는 곳 서울 11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각. 손기정 기념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아파트 단지를 나와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카펫처럼 펼쳐진 노란 은행잎을 밟는 폭신한 느낌이 좋다. 꽤 쌀쌀한 날씨에도 축구장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는 소년들이 있다. 조금 더 올라 마주한 거대한 두상. 세계 무대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알린 故 손기정 선생의 얼굴을 마주하니 왠지 가슴이 뭉클하다. 왼쪽으로는 서울역이, 오른쪽으로는 용산까지 막힘없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 때문일까. 어깨가 가벼워지면서 호흡이 자연스레 깊어진다. “손기정 기념관과 공원은 제가 이곳으로 이사한 가장 중요한 이유예요. 집 거실에서 축구장이 한눈에 보이는데 가을이면 초록색 축구장과 은행, 단풍의 화려한 컬러가 장관을 이루죠. 공원에서 언덕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서울역과 명동까지 모양과 높이가 제각각 다른 스카이라인이 역동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요. 뉴욕이나 파리는 산이 없어요. 물론 고층 빌딩이 있기는 하지만 먼발치에서 소리 없는 곡선과 계절의 풍경을 마주하는 심상과는 분명 다릅니다. 서울의 첫 번째 매력, 바로 이 공기에 담겨 있는 ‘소울soul’입니다.”


주방에서 거실을 바라본 모습. 머릿속에 혼재된 생각을 정리하는 공간. 길게 늘어뜨린 카이저 이델 조명등, 디터 람스 책장, 자그마한 모오이 책상, 스탠드 등 하나씩 컬렉션한 가구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서울역 근처의 꼭대기층 아파트. 같은 건물, 같은 모양의 현관이지만 그의 집 현관 앞에 서는 순간 디자이너의 집이구나 싶다. 층수와 호수가 적힌 심플한 표지판은 분명 다른 집의 그것과는 달랐고, 문이 열리는 순간 예고 없이 맞닥뜨리는 거실, 경사가 비스듬한 진입로와 벽처럼 생긴 문을 지나 그냥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구조까지 스리 콤보를 경험하고 나니 과연 더 놀랄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아파트에서 현관 바로 옆에 있는 방만큼 활용도가 떨어지는 공간도 없을 거예요. 거실과 정반대에 자리해 컴컴하고 이웃 간의 소음도 신경 쓰이니까요. 하지만 문득 그런 곳에 거실을 만들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 어요. 복도 쪽으로 벽 같은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해 문을 모두 닫으면 또 하나의 방이 되는 구조는 디자이너가 제안한 거고요. ‘현관=신발장’처럼 어떤 공간이라고 규정짓지 않기에 현관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문만 닫으면 완벽히 밀폐된 AV룸으로 사용할 수 있죠.”

집을 어떻게 꾸밀까가 아닌, 어떤 프로그램으로 구성할까를 고민했다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본격적인 집 구경을 시작했다. 우선 까만 바닥재가 인상적이다. 나무를 태워 까맣게 가공한 바닥재는 주로 매장 같은 상업공간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중국에서 제작, 공수했다. ‘신발 신는 집’에 적당한 내구성이 있고, 마루 폭이 넓어 집이 한결 넓어 보이는 효과가 난다. “신발 신는 거요? ‘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들어올 수 있는 집’이라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콘셉트에서 출발한 디자인이에요. 하지만 아파트 에서 과연 옳은 디자인일까 하는 고민도 있었죠. 바닥 방음은 필수, 현관 앞은 벽에도 방음 처리를 했어요. 바닥이 20cm나 높아졌지만 내 소리가 남한테 안 들리고, 남의 소리도 나한테 안 들리니 결과적으론 잘한 디자인이죠.” 복도를 지나 메인 거실로 들어서면 디자이너의 집이라는 아이덴티티가 더욱 명확해진다.


1 낮은 천장, 부서지는 빛이 낭만적인 2층 다락방. 2 5m가 넘는 높은 천장에서 복층 메자닌 구조의 묘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2 위층 난간에서 바라 본 아래층 거실은 탁 트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인테리어 디자인은 아모레퍼시픽 작업으로 인연을 맺은 강지수 실장이 맡았다.

복층 구조의 색다른 공간감, ‘남산 타워 테라스’(위층에서 연결되는 테라스), ‘생크 비 휘 드 베르누이5 bis, rue de Verneuil’(세르주 갱스부르가 살던 거리에서 영감을 받은 현관 옆 작은 거실)라는 위트있는 설명, 에드라 소파의 마감을 블랙 가죽으로 선택한 취향, 천장보다 바닥에 가까울 정도로 길게 늘어뜨린 카이저 이델 펜던트 조명등의 감각적 연출, 조명등과 살짝 어긋나게 배치한 낮은 칠보 탁자 그리고 디자이너 장응복 씨가 제작한 ‘창이 있는 커튼’까지. 이 모든 것이 그동안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갖춘 것이라니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특히 커튼에 창문이 있는 콘셉트가 아주 재밌다. “커튼의 주된 기능이 창을 가리는 거라 할지라도 막상 커튼을 치면 외부 공간과 완전히 단절되는 것 같아 싫었어요. 저는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행위까지 주거 공간이 가진 콘텐츠라 생각하거든요. 안과 밖을 단절하는 게 아니라, 소통하게 만드는 커튼은 없을까 고민했더니 장응복 씨가 아주 간단히 ‘창문’이 있는 커튼을 만들자고 했죠. 마치 창호문처럼 빛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이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서울 풍경은 왠지 더 특별해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작은 거실. 세르주 갱스부르가 살던 파리의 거리에서 모티프를 얻어 ‘생크 비 휘 드 베르누이’라 이름 지었다. 유학 후 귀국해서 첫 전시 때 디자인한 하트 소파를 지금까지 사용한다.


1 계단을 올라 위층 남산 타워 테라스의 문을 열면 중구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진다. 2 주방의 가벽, 그래픽적 계단, 위층의 난간까지 복층 메자닌 구조가 공간을 한결 입체적으로 만들어준다. 오른쪽 요리 잘하는 남자 오준식 씨의 지극히 기능적인 부엌. 김용호 작가가 노출 테스트용으로 찍은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보내는 바람에(!) 부엌에는 늘 두 명의 오준식이 조우한다.

서울 남자의 고유한 감각 “보통 한 달 고민하고, 두 달 공사한 다음 그 집에서 10년 살 거라고 말해요. 10년 살 집을 고작 한 달, 그것도 다른 사람이 대신 생각해준다니 난센스 아닌가요? 저의 경우 집에 대한 구상은 1년 전 이 집을 구입하면서부터 시작했어요. 4년 살 집의 프로그램을 짜기 위해 6개월 생각했죠. 당장 설계나 공사를 시작하지 않더라도 평소 ‘집이 이러면 좋겠다’는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가 이처럼 공간을 재단하는 일에 전문가적 식견이 있는 것은 가구 디자이너로 활동한 이력 덕분이다. 홍익대학교 목조형가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 가구디자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오준식 씨. 1995년 사무용 가구 전시회에 출품한 크레데위앙(전통 평상을 모티프로 디자인한 소파)을 미국 하워드 그룹이 상품화하고, 졸업과 동시에 프랑스디자인진흥연구회에서 ‘올해의 신인 디자이너’로 선정한 그다.



하지만 한국 디자인 1세대라고 자부하던 그는 유학 후 외국 기업의 제의를 뿌리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 도시 ‘서울’에서 우리 문화와 함께 성장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한 한국적 디자인이란 태극무늬, 오방색 등이 아니었다. 동시대에 한국에서 꽃피운 문화 자체가 바로 가장 한국적인 디자인 아닌가. 디자인 스킬skill보다 문화를 향유하는 안목, 즉 고유한 테이스트taste를 키 우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하나하나 모은 가구가 한 번에 데커레이션한 것처럼 보이는 건 취향의 흐름에 공통분모가 있어서 그런 거죠. 우리 집이 서울을 벗어났을 때도‘아, 서울 디자이너의 집인가?’ ‘취향 좋은데’라는 말을 듣는다면 일단 성공한 거예요.”그의 집은 그야말로 크리에이터의 정체성이 오롯이 녹아 있다. 침실 한편의 디터 람스 책장과 어머니께 물려받은 칠보 함, 물고기 패턴 커튼과 핫핑크 컬러 에그 체어, 지극히 기능적으로 꾸민 주방에 놓인 우아한 라인의 튤립 마블 테이블과 프랭키 O. 게리의 골판지 의자까지 의외의 매치가 만들어내는 색다른 재미가 느껴진다.


1 투명한 오간자 실크 원단에 프린트된 물고기 문양이 공간에 은은한 활력을 전한다. 2 인테리어를 어떻게 했느냐보다 인테리어한 집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떻게 즐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오준식씨는 ‘남산 타워 테라스’에서 바라본 중구의 야경을 가장 서울다운 장면으로 꼽는다. 3 아모레퍼시픽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답게 해주는 아일랜드&세면대와 디터 람스의 시스템 장, 핑크색 에그 체어가 조화를 이루는 침실.

가구를 살짝살짝 튼 각도며 꽃병의 위치까지, 무척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질서 정연하다. 사실 집이란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지극한 열정으로 꾸미는 곳이기에 그의 집처럼 어떤 공식도 읽히지 않으면서 멋스러운 게 진짜 감각이고 개성이다. 이 집에서 가장 생경한 풍경은 침실을 떡하니 가로지르는 대형 아일랜드. “현대카드에서 아모레퍼시픽으로 직장을 옮길 즈음 이 집이 한창 공사 중 이었어요. 문득 아모레퍼시픽 디렉터의 침실은 현대카드 디렉터의 침실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레이아웃을 일부 수정해 침실 한쪽에 아일랜드를 짜 넣었지요.” 아일랜드 위에는 아모레퍼시픽에서 출시한 화장품들이 브랜드, 종류별로 놓여 있다. 디자인은 표현해야 할 상태를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 먼저 사용자가 돼봐야 하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중이다.


1, 2 늦가을의 여운이 전해지는 서울 풍경

화장품이 아닌 ‘서울’을 판다 에토레 소트사스는 “디자이너는 문화 창조자로서 디자인을 통한 사회적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문화적 수혜자인 동시에 창조자로서 문화 현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물론 문화를 주도해야 한다는 것. 지난 4년간 현대카드 디자인 실장으로 디자인 경영의 토대를 이루고 회사 전체에 영감을 불어넣는 일을 해온 디자이너 오준식은 얼마 전 아모레퍼시픽으로 자리를 옮겨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하드 또는 IT 인더스트리로 성장했다면 마지막 원동력은 소프트 인더스트리예요. 손에 잡히는 제품보다는 뷰티, 헬스, 엔터테인먼트 등으로 디자인 영역을 확장해야 하죠. 아모레퍼시픽은 다음 시대의 한국을 이끌어갈 소프트 인더스트리의 주자로서 한국의 문화 콘텐츠와 한국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마치 샤넬의 향수를 살때 파리에 대한 이미지와 경험을 사는 것처럼 하나의 제품이 단순한 물건을 넘어 경험의 산물이 될 때 영원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요.”


3
창문처럼 빛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동양적 감성의 커튼은 장응복 씨가 디자인한 것. 4 20대는 가구 디자이너로, 30대는 공간을 재단하는 라이프스타일 디자이너로, 40대는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비즈니스 디자이너’로 다양한 행보를 보여온 아모레퍼시픽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오준식 씨. 일요일 오후 산책길, 세계 무대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알린 故 손기정 선생의 두상과 마주했다.


브랜드 매거진 준비, 아시안 뷰티의 개념을 전달하는 마몽드 플래그십 스토어 디자인, 국립현대미술관 오설록 신규 매장 디자인 등 그는 아모레 퍼시픽에 한국ㆍ서울의 문화적 판타지를 접목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계획 중이다. 아름다운 서울, 매력적인 서울 사람, 더 알고 싶은 한국…. 샤넬이 파리의 위상을 높인 것처럼 아모레퍼시픽 또한 한국의 경험을 파는 회사가 될 수 있으리라. “서울에 살고 있는 이들은 서울의 진가를, 가치를 잊기 쉬워요. 지금까지 성장했고 강해졌음을 보여주기 바빴다면 이제 진짜 서울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줄 때죠. 온화한 자연의 생동감,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열정이 흘러넘치는 서울. 나는 내가 서울 사람인 게 참 좋아요.”

글 김민정 기자 | 일러스트레이션 김재훈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