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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여들어보면] 국제 연대 활동가 곽은경 씨 국제 연대 활동가 곽은경 씨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제삼세계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를 돕는 국제 NGO 활동가 곽은경 씨의 삶을 들여다보며 떠올린 질문이다. 침묵과 포기 대신 투쟁과 도전을 선택하며 세상에서 가장 낮은 변방邊方의 외침으로 살아온 그는 여전히 빛과 어둠의 강 사이에서 희망이라는 다리를 짓고 있었다.

한국의 정치 사회 격동기이던 1980년대 당시 대학생이던 그는 종로, 서울역, 명동성당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학교보다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25년이 지났지만, 그는 명동성당 주변의 골목길과 오래된 식당을 기억하며 식당 아주머니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팥빙수를 먹어보려 사방으로 알아봤는데, 드디어 오늘 먹네요. 유럽에는 팥빙수가 없거든요. 빙수 기계를 공수하려다가 수화물 무게 초과로 매번 실패했어요. 이것저것 챙기고 김치까지 보태면 25kg이 훌쩍 넘으니 원. 후후.”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곽은경 씨는 요즘 건강을 위해 지키던 ‘금기’를 모두 깨고 있단다. 한국을 떠나던 25년 전,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주제로 밤낮없이 함께 토론하며 울고 웃던 옛 선후 배들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찬 음식을 자제하라는 한의사의 조언에도 먹고 싶던 한국 음식을 가리지 않고! 물론 팥빙수를 포함해서 말이다.

스물다섯 나이에 프랑스 파리로 떠나 전 세계 55개국 대표들의 투표로 국제 NGO 팍스 로마나 세계 사무총장으로 일하기까지 다시 25년…. 비행기에서 기절도 여러 번 했으며, 한쪽 고막이 터질 정도로 자신을 혹사하며 가열차게 달리던 그가 드디어 스스로 안식년을 선언했다. “이제 많이 웃기로 했다”며 호방한 목소리로 시원스레 웃는 여자, 굳게 입술을 다물면 진중한 사색가처럼 보이다가도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빛이 드러날 땐 거침없는 혁명가를 떠올리게 하는 ‘곽은경’이란 여자. 세상에서 가장 후미진 곳, 동정 없는 잔혹한 세상에서 인권과 평화, 그들의 생존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온 그를 명동성당 앞 카페에서 만났다. 외장 하드와 노트북, 두툼한 서류 뭉치와 책 등을 꾹꾹 눌러 담는 탓에 항상 15kg이 훌쩍 넘는다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여행 캐리어는 잠시 놓아두고.


1 2008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화해와 진실 위원회’ 15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해방과 용서>를 촬영하던 중 남아공 흑인촌에서.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방영했다.
2 2005년 5월, 남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로 입은 피해를 조사하기 위해 방문한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달리트 마을 어린이들과 함께.
3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서케이프타운 시 주변에 있는 흑인 거주 지역 구구레투Gugulethu의 전경. 1960년대 생겨난 구구레투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백인 거주 지역인 케이프타운에 거주가 허락되지 않은 흑인들을 강제 이주시켜 만든 전형적 흑인 거주 지역이다. 구구레투는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코서Xhosa족(넬슨 만델라 대통령도 코서족 출신이다) 말로 ‘우리의 자랑(our pride)’이라는 뜻.
4 남아공의 백인 친구들, 프랑스 동료들과 함께 하루의 피로를 풀며 한잔!
5 2004년 1월,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제4차 세계 사회 포럼에 참석한 달리트 인권 운동 단체 지도자들. 달리트 인권 변호사로 유명한 예수마리안 예수회 신부님이 달리트의 인권 옹호를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다.


“변화는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가닥의 희망일지라도,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작은 힘을 보태는 것. 그것이 모이고 쌓여 불가능한 기적을 만드는 것임을 나는 믿는다. 이것이 내가 모순과 절망 사이에서도 풀뿌리 운동을 지속하는 이유다.” _ 곽은경,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

저 너머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1987년, 국제가톨릭학생운동(IMCS)에서 아시아 대표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한국가톨릭학생전국협의회에서 전국 부회장으로 일한 경험이 원동력이 되었고, 가톨릭학생회 선후배의 적극적인 설득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정치와 사회, 역사 안에 드러나는 개도국의 현실, 식민지를 막 벗어난 저개발 상태에서 자본주의에 노출된 도시에 관한 책을 접하면서 범지구적 삶에 대한 지적 욕구가 강했습니다. <갈매기의 꿈>에 등장하는 갈매기 조너선 리빙스턴의 주문처럼 ‘생각의 사슬을 끊지 않으면 다른 세상을 볼 수 없다(Break the chains of your thought, and you break the chains of your body, too)’는 갈망이 컸죠. 제 결정을 격려한 사람도 있었지만, 지지자는 거의 없었어요. 한국의 정치 사회 격동기에 대부분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더욱 떠나고 싶었습니다. 뭔가 손에 잡히지 않고, 확실히 말 할 수 있는 미래도 없었지만 누군가 제게 손을 내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종교적으로 이야기하면 나에 대한 부름이라고나 할까요?” 두 달 속성 코스로 프랑스어를 배우고 1987년 10월,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그렇게 아름답고 뜨거웠던 청춘의 한가운데서 그의 진짜 인생이 시작됐다.

나는 자격 있는 연대 활동가인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출장을 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비소한지,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온몸으로 경험했다. “무슨 인턴 코스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복합적 정치 위기 상황을 입체적으로 읽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지혜가 부족했죠. 우리나라처럼 선배를 붙잡고 고충을 털어놓고 고민을 나누는 문화도 없으니 한국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요.” 에어컨 없는 비행기 안에서 숨조차 쉴 수 없는 소음과 악취, 턱없이 부족한 물과 음식, 감당할 수 없는 빈곤, 상상을 초월한 성범죄 등을 생생하게 목격하며 스스로 연대 활동가로서 자격이 있는지 자문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용기란 공포에 대한 저항이고 공포의 정복이지, 공포의 결여는 아니라 하지 않던가. 그들의 밤 뒤에 새벽이 올 것이라는 희망, 그럴수록 내면 깊숙이 떨리는 사명이 그를 더 낮고 약한 자들의 편에 서도록 이끌었으리라. 특히 그는 1998년부터 활동한 인도 카스트 제도 최하 계층인 달리트dalit 인권 운동을 ‘내 평생의 숙명’이라고 말한다. “제도의 비극은 표면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인도인에게도 보이지 않는 형태로 소외되는 차별과 억압, 인권 유린은 점점 극심해지지만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지요. 지독한 노동, 생리할 때 격리 수용하거나 물을 얻기 위해 찾아간 이웃 마을에서 성범죄의 대상이 되는 등 달리트 여성들의 모임을 통해 차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충격적인 일화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내는 낮은 목소리를 들어줘야 하는데, 많은 사람이 본인의 시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이 많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유럽인 동료에게는 없는 한국인의 정서가 있었다. “동료들이 어떻게 그토록 빨리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는지 묻곤 했죠. 한국인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이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힌두 사원 출입문 양옆에 소녀 두 명이 서 있는 걸 본 적이 있나요? 가장 똑똑하고 아름다운 달리트 소녀들이 초경 시기에 강제로 차출당하는 순간부터 자유 의지 없이 살게 됩니다. 사원에 출입하는 브라만 계급이 가장 먼저 그들을 착취하고 결혼도 못 한 채 평생 유린당하며 살아요. 간디는 그들을 ‘신이 주신 아들딸’이라 말하곤 했는데, 굉장히 나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요. 그들의 집은 문이 굉장히 작고 낮아요. 평생 허리를 구부리며 숨어 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질문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가 달리트 인권 운동을 하던 시기에 나는 인도로 생애 첫 배낭여행을 떠났다. 악취가 진동하는 거리의 화장실에서 대변을 퍼 나르던 그 아이가 달리트의 얼굴이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여행자의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어둠, 곽은경 씨는 그 밑바닥에서 ‘왜?’라는 질문을 세상에 던지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공감하는 것, 그들의 삶을 체험해보고자 노력하는 것, 그런 후에 비로소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곽은경 씨. 다른 이들이 지나치는 진실의 문을 열어 수면 위로 끄집어내는 일, 그것이 그의 사명이자 숙명이다.

“정말 내 마음이 가고, 온 열정과 가슴 벅차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지침이었고 그것이 결국 옳았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_ 곽은경,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렇게 깊숙하게 박힌 악습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아주 오래된 관습이지만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어떻게’ 건드릴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한 개인의 생각이 변해도 지속이 가능해야 해요. 그러려면 타인의 인정이 공존해야 합니다. 나의 변화를 그대로 인정하고 다른 이들이 그것을 존중해야 합니다. 함께 조직하고, 공동 활동을 통해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연대입니다.” 그가 연대 활동을 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나눔의 형태가 ‘피어 그룹 Fear Group’이다. 비슷한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한 이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아이디어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이 나온다고 그는 믿는다. “점점 변화가 보여요. 성폭력에 공동 대응하고, 밤에 몰래 하던 모임을 마을 회관을 빌려 당당하게 하자고 요구하는 등 태도가 바뀌고 있어요. 일부 달리트 지도자는 훌륭한 정치인으로 공동체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보람을 참 많이 느낍니다. 아, 이런 운동이 정말 필요하구나,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죠.” 하지만 경험과 시야가 다른 타인의 개입이 항상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란다. “타인의 시야로 경험을 공유하면서 스스로 보지 못하던 것을 바라보게 돕는 것이 연대 운동입니다. 그들의 몫을 내가 해서도 안 되고, 내 역할을 게을리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연대 운동의 성패를 결정합니다.”

두려움은 극복할 수 있는가? NGO 활동을 하면서 생사의 경계에 선 순간도 많았다. 그중 정치 폭력을 감시하는 국제 감시단으로 활동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목격한 학살 현장은 그에게 생애 가장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크리스마스로 남았다. 만델라가 속한 국민당(ANC)과 줄루족 출신의 부텔리지(Chief Mangosuthu Buthelezi)라는 지도자가 이끄는 잉카타 자유당(IFP)이 갈등하면서 양당 지지자가 대치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양편에서 돌과 총탄이 난무하며 벌어진 참혹한 유혈 사태를 바로 코앞에서 목격했다. 그 이후로 더 이상 크리스마스는 그에게 축제가 아니었다.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하려면 우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두려움을 상대방이 가장 먼저 느끼 니까요. 나쁜 목적을 가진 이들은 그것을 가장 빠르게 동물적으로 이용해요. 남아프리카공화국 줄루족의 촌장 집을 가이드이자 통역을 해주던 학생과 함께 찾아간 적이 있어요. 부족 국가라 들어가려면 촌장의 허 가를 받아야 하거든요. 그때 집에서 악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 몇 명이 나왔는데, 그중 한 사람이 피가 뚝 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나오더군요. 가이드 학생 얼굴 근처에 칼을 갖다 대며 격앙된 목소리로 위협했습니 다. 급한 마음에 칼등을 확 잡으며 ‘내려놓고 이야기하시죠!’ 하고 대응했죠. 우리는 국제 감시단이고 이 친 구는 통역자일 뿐이니 내게 이야기하라고, 대신 칼을 내려놓으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그를 저지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나는 그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외국 여자였고, 저의 태도에 어쨌든 한 번 놀람으로써 위기 상황은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누군가 희생을 당했을지 아무도 모른다. 자신의 두려움보다 폭력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고, 그것은 25년간 NGO 활동을 하며 쌓은 경험의 결과였다. 동행한 동료를 위한 배려와 관심이 그를 위급 한 상황에서 더욱 강인한 여성으로 만든 것이다.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복합 위기 상황을 여러 차례 겪으며 그는 제3세계의 삶에 관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힘든 적도 있었다. 그때 페루 리마에서 듣게 된 라틴아메리카의 대표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 신부의 강의는 그에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해결하려고만 했는데, 그것보다 건강하고 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당면한 문제를 잘 풀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하느님이 나를 조력자로 쓰고 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사명만 껴안고 있던 내가 새로운 인식의 문을 열고 다른 시야로 세상을 배워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이 가능하긴 할까? 하지만 상처 가득한 땅을 그저 덮어버린다면, 풀조차 날 수 없는 썩은 토양이 될 것이다. 그는 그곳에 사람들이 희망의 씨앗을 뿌릴 수 있도록 새로운 흙을 만드는 사람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발바닥이 닳아 새살이 돋을 정도로 뛰어다녔을 그의 치열한 하루하루가 떠올라 콧등이 시큰거렸다. 서로를 안는 방식으로 체온을 유지하며 매서운 겨울을 나는 황제펭귄처럼 연대는 유일한 생존 전략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가 그들의 편에 선 것처럼, 이제 우리가 그들의 편에 설 시간이 아닐까.

영원한 국제 NGO 활동가, 로렌스 곽 그의 이름은 세 개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곽은경, 국제 사회에서 저명한 이름 로렌스 곽, 그리고 세례명 로렌시아. ‘로렌스 곽’이라는 이름으로 각 국가가 직면한 문제를 파악하고 필요한 사업을 기획하고, 연대 활동으로 다양한 사업을 지원해온 그가 다시 ‘곽은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5년간 NGO 활동을 하면서 겪은 생생한 역사를 그의 오랜 벗인 작가 백창화 씨가 약 2년간 파리와 제네바, 인터라 켄을 오가며 담은 내용을 모아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남해의봄날)를 함께 펴냈 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세상에 눈길 한번 돌려주기를, 그래서 관심과 미안함, 뜨거운 분노와 호기심을 함께 가지기를 바란다. 곽은경 씨는 현재 5년간의 팍스 로마나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주변의 업무 제안도 정중히 거절한 채 스위스 인터라켄에 있는 ‘플로라 민박집 사장님’으로 지내고 있다. 산과 야생화가 좋아 언젠가 지리산 아래 살리라 다짐한 그는 결국 스위스 융프라우 설벽 아래 툰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터를 잡았다. 그의 평온은 이제 막 시작했지만, 제네바 인권 관련 회의와 국내외 강연에 참석하는 등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가 필요한 곳이 여전히 많은 까닭이다. 인터라켄에서 구름에 가린 설벽을 바라보며 그는 그 너머에 숨어 있는 낮은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그 뜨거운 마음의 결이 <행복>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신진주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