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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세계로] 이탈리아 여행에서 아버지라는 신사를 만나다
시인 신현림 씨는 이탈리아 여행으로 아버지께 말을 걸었다. 자식들의 관심이 몇 해 전 타계한 어머니에게 집중된 사이 외롭고 서툴고 고단하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신사였고,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보살펴주어야 할 가족이었음을 한겨울 이탈리아 여행에서 깨달았다.


어느 날 아버지 집에서 딸아이와 함께 여행 계획을 세우는데, 딸과는 해마다 하는 해외여행을 아버지와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제야 생각났다. 그날도 여쭈었더니 역시 아버지는 너희끼리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 컬컬한 목소리에서 부러움과 외로움이 느껴져 그날따라 재차 여쭈었다. “이번엔 같이 가세요. 여행 경비는 문제없어요.” 두어 번 거절하시더니 웬일로 “그래도 괜찮겠니?” 하는 말씀. 담담한 척했지만 가슴엔 놀라움과 먹먹함이 교차했다. ‘그래, 우리 아버지도 여행하고 싶으셨구나! 왜 이제야 내가 그 마음을 느꼈을까.’

12시간 전에 공항에 나오신 아버지 ‘소싯적에 종종 해외 출장도 다니셨으니 아버지에게 여행이 큰 의미가 있을까’ 하고 생각한 자식의 강퍅한 마음은 여행 당일, 출발 시간보다 12시간이나 일찍 공항에 나오셨다는 아버지 후배분의 귀 띔을 듣고 다시금 저며들었다.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들떠 저 명민한 분이 12시간이나 먼저 나와 기다리셨다니.
베니스를 시작으로 파도바, 베로나, 피렌체, 피사, 로마 등 이탈리아 북부부터 남부까지 전체를 돌아보는 7박 8일의 패키지여행 코스. 칠순이 넘은 아버지를 위해 비상약을 챙기고, 물 선 곳에서 배탈이 나실까 봐 아버지가 드실 생수도 열 병이나 구입해 트렁크에 담았다. 경유지인 도하로 가는 비행기 안에 서부터 아버지를 살피느라 아버지보다 내가 더 좌불안석이었다. ‘직항 노선이 있는 여행을 택할걸’ 하는 자책에 온 신경이 아버지에게 향했다.


(왼쪽) 피사의 사탑을 떠받치는 착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가족.
(오른쪽) 베로나, 로미오의 연인 줄리엣이 살던 집에서.

아버지와 딸이 함께 반해 축배를 든 카프리 섬에서.


카프리 섬을 떠나며 아버지와 축배를 다행히 별 탈 없이 베니스에 도착해 아기자기한 이탈리아 일주를 시작했다. 절벽 위의 작은 집, 멋진 두오모,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 삐딱하게 기울어진 피사의 탑을 보며 열두 살 난 손녀와 칠순이 넘은 아버지 그리고 딸이자 엄마이며 가이드이자 보호자인 나는 종알종알 이야기를 그칠 줄 몰랐다. 단체 여행이지만 중간중간 넉넉한 자유 시간이 있어 셋이서 몰려가 그 유명한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피사의 사탑을 떠받치는 듯 한 착시 효과의 포토존을 찾아다니며 깔깔댔다.
아버지는 풍광이 아름다워 고故 다이애나 비와 찰스 황태자가 신혼여행을 다녀갔다는 카프리 섬이 꽤나 마음에 드셨나보다. 소렌토로 돌아오는 배의 갑판에 앉아 수려한 지중해 풍광에 넋을 놓은 내게 저만치 앉으신 아버지가 손짓을 하셨 다. 센스 넘치는 아버지가 카프리에서 산 미니어처 술 한 병. 중년의 딸과 노년의 아버지가 뭍으로 돌아오는 배에 나란히 앉아 뚜껑을 잔 삼아 소박한 여행의 축배를 들었다. 이런 게 행복이구나. 엄마 살아계실 땐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달달한 술 한 모금에 그리움 쌓인 마음이 시큰해졌다.

다음엔 발칸 반도에 모시고 갈게요 아버지와의 여행은 출발 전부터 보살펴드려야 했다는 걸 여행의 막바지에 이른 로마에서야 깨달았다. 유럽의 겨울은 한국보다 훨씬 시리고 스산한데, 아버지가 따뜻한 코트가 없었던 것. 아버지의 여행 가방을 미리 열어보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로마의 광장에서 자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버지가 인파 사이로 슬며시사라지셨다. 그리고 몇십 분 후, 아버지 손에는 너무나 근사한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롱 코트가 들려 있었다. 칠순을 넘은 나이에서도 외국에서 혼자 쇼핑을 뚝딱 해내시는,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 롱 코트를 고르는 안목까지 갖춘 우리 아버지! 이제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시기 전에 더 자주 모시고 다녀야겠다. 발칸 반도, 수도원과 고성이 많은 그리스에 함께 가고 싶은 꿈이 생겼다. 너른 세상에서 누구보다 신사적으로 행동하신 아버지. 이번 여행 후 쓴 책 <아빠에게 말을 걸다>의제목처럼 아버지 살아계실 때 함께 할 것들에 대한 소망과 기 대를 품어본다. 이 값진 시간을 더 만들어야겠다. 

여행 정보
여행 기간 7박 8일
여행 코스 카타르를 경유해 이탈리아 베니스 - 파도바 - 베로나 - 피렌체 - 몬테카티니 - 친퀘테레 - 산지미냐노 - 피사 - 로마 - 폼페이/ 소렌토/ 카프리 - 나폴리 - 바티칸을 돌아보는 여행사 패키지 상품 이용
여행 경비 약 7백만 원(3인, 8일)
추천 이유 가족 여행은 비용 부담이 큰데, 유럽 여행은 겨울이 저렴한 편. 이탈리아 남부는 겨울에도 중부 유럽보다 덜 춥고, 화장실이 딸린 버스로 다니기 때문에 노인을 모시고 가기에 적합하다. 간혹 기차와 배로 갈아타니 일주일의 일정이 다채롭고 풍성하게 느껴졌다.
딸의 조언 유럽의 물가는 비싸기도 하거니와 물이 바뀌면 탈이 나기 쉽다. 평소 한국에서 드시던 생수를 열병쯤 준비해 가니 일주일을 나기에 문제없었다. 주전부리 준비도 필수. 특히 로마로 가는 버스에서 다 같이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를 볼 때 우리 모녀가 준비한 간식이 대인기였다. 넉넉히 준비한 덕분에 다른 분들과도 나누어 먹으며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글 김민정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