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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기울여 들어보니]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총감독 인재진 씨 즉흥으로 살아도 멋진 인생
벌써 10주년을 맞이한 가평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이 끝난 자리에서 총감독 인재진 씨를 만났다. 재즈가 얼마나 쉽고 흥겨운지, 하지만 얼마나 요물 같고 요술 같은 매력을 발하는지를 즉흥 변주에 맞춰 재즈 페스티벌 기획자라는 외길을 걸어 온 그의 유쾌한 인생 이야기에서 느껴보시기를!


‘다른 사람이 많이 하는 건 안 한다’가 내 신조 중 하나다. 어려워도 한길로만 가면 없던 길이 열리고 모르던 도움이 덧붙여진다. 즉흥 연주로 놀라운 완성곡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인생도 재즈처럼 살아볼 일이다.

2008년 가을 어느 날, 도쿄 궁내청 인근의 허름한 재즈 클럽. 도쿄의 고급 생활 문화를 취재하는 한 달 간의 일정 중 가장 어려운 숙제로 미뤄둔 ‘세계 100대 재즈 클럽’을 취재하러 나섰다. 어두운 밤, 백발의 서양 노인이 좁은 지하 공연장의 피아노 의자에 앉는다. 콘트라베이스의 호위를 받으며 출발하는 피아노 선율. 들판을 지나 산으로, 산을 넘어 계곡으로, 양털 구름 가득한 하늘로. 까딱까딱 흔들흔들 흥이 어둠 속에 들썩인다. 실존하는 건 피아노 한 대뿐, 건반에 손을 얹은 백발 노인이 이 모든 공감각의 비현 실을 주도해나간다. 재즈라는 놀라운 전도체로. 연주가 절정을 향해 가자 재즈 클럽 주인장이 연주자의 피아노 의자에 같이 앉아 들어보라고 권한다. 다른 관객에게 신성모독죄로 참형을 당할 법한 이 비현실적인 주문에 나도 모르게 즉흥 순응. 감미로운 산길을 지나 별안간 감동의 대양을 펼치는 즉흥 연주와 사건,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재즈’가 완성된다.

즉흥 1. 앞산에서 나팔 소리가 들려오다 나중에 알게 된 그 피아노 연주자의 이름은 에디 히긴스Eddie Higgins. 그날의 연주는 세계적 재즈 거장인 그가 파킨슨병으로 잠시 연주를 중단했다가 오랜만에 1. 재즈계의 이너 서클 안에서 2.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기획자의 지하 공연장에 찾아와 3. 관객을 위해 벌인 즉흥 공연이었다. 며칠 뒤 한국의 대형 공연장에서도 연주한 그는 다음 해 지병으로 타계했으니, 도쿄에서 나는 인생 말미를 예감한 거장이 혼을 불태우는 순간에 참여한 것이다.
“일본은 오래전에 재즈 문화가 자리 잡았지만, 50대 이상이 주요 관객층이죠. 그런데 한국의 재즈 관객은 20~30대가 주를 이룹니다. 세계의 유명 연주자들이 한국에 왔다가 ‘신천지’를 발견하는 것이죠. 실제로 2005년에 자라섬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미국의 색소포니스트 조슈아 레드맨이 이 관객의 절반만이라도 미국에 데려가고 싶다고 고백했을 만큼 한국 관객의 뜨거운 호응이 세계 재즈 연주가들 사이에서 화제예요.” 가평의 황무지 섬에서 재즈 공연이 시작된 지 벌써 10년. 총감독 인재진 씨의 설명처럼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은 10년 만에 전 세계 재즈 연주가들이 앞다퉈 연주하려는 무대, 27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 축제로 발전했다. 인재진 씨가 위에서 언급한 1~3번의 매력을 발견하고 재즈 페스티벌의 총감독이 된 건 재즈처럼 인생의 변주를 받아들이며 살았기 때문.
수십 년 전 충남 당진. 초등학생 인재진의 집 앞에는 작은 산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름다운 노을이 질 무렵 앞산에서 누군가 ‘나팔(트럼펫)’을 불었다. 노을가로 아름답게 번져가는 나팔 소리에 감동한 소년은 나팔 부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20여년 후 영어를 곧잘 한다는 이유로 영문도 모르고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한 청년 인재진은 고려대 밴드부에 가입했다. 하지만 오랜 소망과 달리 밴드 활동은 자신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천혜의 무능력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대신 잠재된 능력도 알게 되었으니, 고연전이 열릴 때마다 웅장한 밴드 연주로 라이벌을 압도하기 위해 고속터미널 앞 상록수 회관이나 신사동의 중앙 스탠드바를 찾아다니며 이름난 나팔 연주가들과 협상해 저비용으로 모셔오는 일, 대학교 인근 당구장과 분식집에서 찬조금을 모금하는 일이 그가 출중한 두각을 나타낸 ‘전문 분야’였다.

즉흥 2. 대학로에 딸기 극장을 열다 음악 관련 일을 하며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으니 남들 다 가는 취업 설명회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학과에서 아웃사이더가 되어도 ‘남과 똑같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라며 똥배짱을 부렸다. 구체적 계획도 방향도 없는 말 그대로 똥배짱과 굳센 희망.
1993년, 친구 몇몇과 회사를 만들었다. 생존하기 위해 ‘음악’이란 단어가 들어간 모든 일을 했다. 음악이 흐르는 광장에서 캐릭터 인형을 뒤집어쓴 채 아이들과 악수하고, 풍선으로 강아지를 만들어 나눠주고, 자동 차로 터미널까지 손님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해도 남다른 일로 성공할 거라는 강한 자신감은 변함없었다. “1994년에 한 드라마에서 배우 차인표 씨가 검지손가락을 흔들며 색소폰을 불었어요. 재즈라는 장르가 전국에 알려져 재즈 연주자를 초대하려는 무대가 있는데, 막상 재즈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죠. 이게내 일이 되겠구나! 실력은 있으나 무대가 없어 고민하는 뮤지션과 무대를 이어주는 일을 시작했어요.”
재즈 뮤지션들과 가깝게 지낼수록 그들에게 음반과 공연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하지만 그 역시 양은 냄비에 라면 끓여 먹으며 꿈을 키우는 가난한 청년 실업가. 배짱 하나로 대학로의 폐업 직전인 공연장을 빌린 그는 좋아하는 과일의 이름을 붙여 재즈 전문 공연장 ‘딸기극장’을 열었다. 이곳은 국내외 재즈 뮤지션에게 연주하는 공간이 되었고, 대한민국에서 ‘재즈’ 하는 사람이 다 모여들었다. 연주가들은 마음껏 음악을 선보였고 그는 캐릭터 인형을 뒤집어쓰고 거리에서 번 돈으로 극장의 월세를 냈다. 그의 인생에 국내외 재즈계의 이너 서클, 프렌드십, 즉흥 연주와 호응을 위한 기획력이라는 변주가 흐르기 시작한, 고되지만 흥겨웠던 딸기극장의 나날.


지난 10월 3~6일에 열린 제 10회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서 25개국 1백31개 팀이 연주했다. 다른 해보다 기간이 하루 더 늘었으며, 어쿠스틱 공연 무대를 가평읍사무소와 옛 가평역사로 옮겨와 자라섬은 물론 가평군 전체에 재즈 선율이 가득했다.


즉흥 3. 공무원이 찾아오다 10여 년 전 어느 날, 지인 이선철 씨(현 감자꽃 스튜디오 대표)가 인재진 씨에게 급히 연락을 해왔다. 집에 일이 생겨 한겨레 문화교실에서 강의할 수 없게 되었으니, 대신 해달라는 부탁. “하지, 뭐” 하며 인재진 씨는 그 문화교실에서 자신이 가장 관심 있고 가장 잘 알고 가장 해보고 싶은 ‘재즈 페스티벌’에 대한 이야기를 펼쳤다. 며칠 뒤 수강생 중 한 명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 재즈 페스티벌이란 거 가평에서 할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 재즈 페스티벌을 여는 것이 숙원이던 인재진 씨는 곧장 가평으로 달려갔다. 소방서 뒷마당, 제재소 앞마당 등 규모와 환경이 적합하지 않은 땅들만 보고 실망하다 가장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이 황무지 ‘자라섬’. 비가 오면 물에 잠기고, 수풀이 무성해 주민들이 땅콩을 흩뿌려 키우던 땅이었다. 하지만 강이 흐르고 멀리 산이 호위하는 고즈넉한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그래요, 이곳에서 해봅시다!” 마침 가평군 공무원들이 유럽 출장을 간다는 소문을 듣고는 부득부득 우겨 그에게 영감을 준 핀란드의 포리 재즈 페스티벌을 견학하도록 독려했다. 바라는 것의 실상을 알지 못해 재즈 페스티벌 개최에 뜨뜻미지근하던 가평군 공무원들. 그런데 그들이 핀란드에서 큰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아름다운 자연에서 수천 명이 모여 음악을 듣고 즐거워하는 모습에 감동했기 때문. “가평의 경관이 포리보다 더 아름답잖아요. 우리도 재즈 페스티벌을 해봅시다!”
가평군의 과장, 계장, 주사 등이 가족과 친구에게 1천5백만 원씩, 2천만 원씩 빌려 인재진 씨에게 맡기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이 후원에 힘입어 버려진 땅에 강 너머 멀리 보이는 자라목섬의 이름을 본떠 ‘자라섬’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음 해인 2004년 9월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의 첫 번째 축제를 열었다.

즉흥 4. 눈앞에 펼쳐진 것을 믿는다 2013년, 10주년을 맞이한 자라섬 페스티벌은 27만 명이라는 놀라운 방문객 수를 기록했다. 관객이 3만 명이면 족한 메인 무대엔 울타리 너머까지 인파가 도열하는 장관이 연출됐다.
조용한 재즈 클럽이나 아담한 페스티벌 무대에서 공연해온 세계의 연주가들이 무대에 올라 3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어찬 광경에 말문을 잃는 건 당연지사. 턱을 괴고 와인을 마시며 우아한 미소를 보내는 대신 관객 3만 명이 연주가에게 허밍으로화답하고 들판의 황금 곡식처럼 리듬을 타고 너울댄다. “마케도니아 스코페의 페스티벌 디렉터는 그 광경을 보고 ‘제이제이, 여기 와서 보니 한국이라는 나라가 전쟁을 치르고도 이렇게 빨리 재건된 비결을 알겠어요’라며 진행과 연주, 관객과 자원봉사자들이 한 몸처럼 움직인다고 감탄했습니다. 연주가들은 마치 팝스타에게 보내는 듯한 관객의 열렬한 호응에 놀랍니다. 이 분위기는 페스티벌을 찾은 관객들이 만들어낸 작품이지요.”
하지만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한 연주가들은 ‘팝스타 같은 호응을 받는 것’이지 팝스타는 아니다. 몽트뢰, 몬트리올 등 ‘세계적’이라고 이름난 재즈 페스티벌이 흥행을 위해 프린스, 스팅, 폴 사이먼과 더피 등의 초대형 팝스타를 동원하지만, 자라섬은 오직 재즈 뮤지션에게만 무대를 내준다. 이러한 ‘건강함’은 자라섬이 10년 만에 세계 재즈계의 주요 무대로 자리 잡은 가장 중요한 힘이다. 스웨덴, 덴마크, 폴란드 등의 유럽 선진국에선 자국의 아티스트가 자라섬에서 연주하도록 기금을 지원하고, 예전엔 이메일을 보내도 답장조차 없던 일본의 콧대 높은 재즈 클럽이 아티스트의 공연을 함께 기획하자고 청해오기도 한다. 세계의 유명 재즈 연주가들이 10월에는 한국을 방문하는 일정 위주로 아시아 투어 프로그램을 구성해 직접 연락하니 이제는 연주가 섭외하는 데 걱정이 없을 정도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라이브입니다. CD를 믿지 않아요. 라이브 공연을 보고야 그 뮤지션을 초청할지 결정하죠. 그래서 1년에 90일 정도는 해외 출장을 가요. 국내 연주가는 그해에 새 음반을 낸 분들을 우선 고려합니다. 그들이 활동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니까요. 해외 연주가는 국가별 배려, 기금을 받고 오는 경우, 가평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경우도 좋습니다. 한국 연주가와 협연을 하겠다는 해외 연주가는 최우선이죠. 우리가 국내외 연주가를 이어주어 그들이 함께 연습하면 지구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던 특별한 공연을 관객에게 선물할 수 있으니까요.”
명성이 높아지고 섭외 걱정이 사라진 몇 해 전부터 인재진 씨는 페스티벌의 디테일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영농조합과 의논해 가평군에서 나는 와인으로 서늘한 가을밤을 데워줄 뜨거운 뱅쇼를 만들어 관객을 대접하는 것. 마을부녀회 무대 뒤에서 어묵국을 끓이고 빈대떡을 부쳐 일하는 사람 연주하는 사람 모두 뜨듯하게 먹이는 것. 상가번영회에서 가평 특산품인 잣을 이용해 잣볶음우동, 잣 피자를 개발해 페스티벌 먹거리 장터에서 선보이는 것. 마을 주민 6백여 명이 나와 자원봉사를 하는 이 ‘디테일’은 외국인 연주가들에게, 국내외 관객들에게 ‘자라섬에 꼭 가보라’는 입소문을 만들어낸 신선한 문화적 충격이 되고 있다.


페스티벌의 흥행을 위해 팝스타를 초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재즈’라는 외길을 고집하는 건강한 정체성이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 세계가 감동하는 이유니까. 뮤지션을 위해 관객을 위해 이 건강함을 지킬 것이다.

즉흥 5. 나윤선을 위해 집을 짓고 싶다
명문대 나온 아들이 만년 백수로 지낼까 봐 노심초사하던 어머니께 “한국에 판사, 검사, 의사는 많지만 제 직업을 가진 사람은 저 하나뿐일 테니 기다려주세요”라고 한 약속을 10회를 맞이한 재즈 페스티벌 총감독이라는 특별한 타이틀로 실현했다. 또 하나 특별한 것은 그의 결혼 생활. 9년 전, 한국 재즈계의 뮤즈 나윤선 씨의 해외 활동을 도와주기 위해 첫 회의를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함께 있던 음향 감독에게 “나윤선 씨와 사랑을 하게 될 것 같아”라고 고백했다. 남을 배려하며 따듯하게 말하는 아름다운 뮤즈의 모습에서 자신도 모르게 사랑을 느꼈기 때문. 그 이후 그는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 즉 ‘자신감을 갖고 솔직하고 정확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뮤즈에게 감동을 주었고 오랜 연애 끝에 3년 전 가정을 꾸렸다.
세계의 페스티벌에서 노래하는 아내, 한국의 페스티벌을 준비하는 남편. 이 절묘한 결혼 생활은 프랑스 파리와 한국의 가평을 무대로 펼쳐진다. 1년에개월 정도만 한국에 머무는 아내가 가평 집에 오면 부부는 그저 치열하게 ‘쉰다’. 느지막이 일어난 남편은 달걀을 입힌 프렌치토스트를 굽고 아내가 없는 동안 텃밭에서 기른 각종 채소로 직접 만들어놓은 페스토와 소스류를 곁들여 식사를 준비한다. 정리 정돈을 좋아하는 아내는 그사이 집 안을 정돈하고 햇빛이 잘 드는 마당에 빨래를 내다 넌다. 볕이 좋은 마당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TV 앞에 꼭 붙어 앉아 재미난 것들을 구경한다. 새벽까지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거나 자전거를 타고 나가 강가를 달리며 운동도 함께 한다. 관객 없는 이 소박한 일상이 그들에겐 1년에 얼마 안되는, 그래서 더 소중한 ‘치열한 휴식’이다.
아내가 파리로 돌아가면 매일 화상 전화로 통화하고, 인재진 씨는 가능한 한 ‘파리 공항 경유’로 출장 여정을 짠다. 어떤 날은 파리 공항에서 만나 겨우 커피 한잔을 하는 게 전부지만, 외롭지 않다. 결혼 전부터 혼자 지내는 삶이 잘 정돈된 덕분에 아내에게 인정받은 가장 큰 능력인 ‘요리’ 잘하는 남편으로 고기가 먹고픈 날은 혼자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 먹고, 갖가지 채소를 길러 소스와 잼을 만들어 먹으며 씩씩하게 잘 지낸다. 대신 세계 재즈 페스티벌에 다니며 공연하는 나윤선 씨는 놀라운 아티스트의 공연 소식이나 신선한 페스티벌 방식을 볼 때마다 실시간으로 알리며 부부만의 환상의 호흡을 맞춘다. “가평의 지인과 자라섬 재즈 센터의 스태프들 덕분에 외로울 겨를도 없어요. 가평 읍내에 자리한 자라섬 재즈센터에서 아이부터 어른까지 2백여 명의 주민이 악기 연주를 배워요. 초등학교 때부터 이곳에서 트럼펫을 배운 아이가 음악대학에 갈 만큼 성장했죠. 악기 연주를 배우는 주민이 많아지니 가평군 내에 밴드도 많아졌어요. 처음 가평에 왔을 때 하나뿐이던 밴드가 지금은 경찰서 밴드, 소방서 밴드 식으로 스물다섯 개로 늘어났습니다. 페스티벌 기간이 아닌 평소에도 가평 군민의 삶에 음악이 넘쳐나기를 바라요.”
다른 사람처럼 사는 게 싫다는 일관된 배짱으로, ‘재즈’라는 맛있는 부위를 알기 위해 돼지 한 마리를 다 먹는 고생을 한 외길 인생.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적 재즈 페스티벌의 총감독이 되어 칠순까지 일하겠다던 자신과의 약속에 최근 두 가지 꿈이 더해졌다.

세계를 순회하다가 가평으로 돌아오는 아내가 편히 쉴 수 있는, 나윤선이라는 멋진 아티스트에게 영감과 휴식을 주는 집을 짓는 것이 첫 번째 꿈. 언젠가 멀리 강이 보이고 뒤쪽엔 산으로 올라가는 산책길이 있는 집을 짓고픈 그는 요즘 (행복)을 정기 구독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집 짓기 자료를 모으는 중이다. 돼지 한 마리를 다 먹는 수고를 해서라도 가장 맛있는 부위를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또 하나의 꿈은 언젠가 능력이 된다면 작은 음악학교를 만드는 겁니다. 잠재력이 있는 뮤지션이 가평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의 세계적 명성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세계 무대에 진출하도록 도움을 주는 학교를 그려보지요.” 계획 대신 오직 자신감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즉흥 변주에 맞추어 살아왔다 하지만, 위기를 겪을 때마다 협연을 해준 사람들의 은혜에 힘 입은 삶이라고 하지만, 집 짓고 학교 세울 꿈을 품었기에 그것에서 파생된 인생의 즉흥 변주도 기대가 된다. 10년 전에는 황무지이던 곳이 전 세계 재즈 뮤지션이 동경하는 꿈의 무대가 되었듯이, 즉흥 변주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멋진 선율로 뻗어나가 빗속의 관객도 춤추게 만드는 기적을 이루어내니까. ‘제이제이, 인재진’이라는 이름처럼 당당한 자신감이 곧 재즈 같은 삶의 유쾌한 원동력이니까.

인재진 씨는 이제 페스티벌의 규모와 제반 여건이 안정되었으니, 프로그램의 디테일에 더 많은 노력을 쏟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넷 콜맨, 윈턴 마살리스, 파로아 샌더스 등 80세에 접어든 재즈의 거장들을 대한민국의 가평에서 만나보면 어떨까.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관객의 환호를 받으며 세기의 연주가들이 전설적인 연주를 들려주는 그날을 꿈꿔본다.
글 김민정 기자 | 사진 박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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