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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여 들어보니] ECM 프로듀서 정선 씨 유망과 유명에 귀 기울여
“키스 재럿, 칙 코리아도 젊을 땐 커리어가 없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우리가 서로 좋아하면 긴 인생을 함께 발전시킬 것이다.” 만프레드 아이허 씨의 이 멋진 말로, 젊은 음악가도 젊은 프로듀서도 그의 인생에 동행해 예술의 세상으로 나아간다. 달팽이처럼 느리게 그러나 명확하게.



유명 재즈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 어둠이 내린다. 고요가 흐른다. 빛이 스쳐 지난다.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를 출발해 스위스의 취리히로 달리는 어두운 자동차 안. 주파수를 잃은 낡은 카 오디오가 긴 침묵 끝에 미세한 음을 내려 한다. 들릴 듯 말 듯 고요함에서 멀어지는 소리. 그 형상을 보려 내이內耳의 세포가 일어선다. 발꿈치를 최대한 끌어올린 청신경이 소리가 묻어나오는 공간으로 팔을 뻗친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투명하고 완고한 소리. 언제 다시 고요함으로 돌아갈지도 모를 그 소리를 귀에 담으려 운전자는 조용한 갓길에 차를 세운다. 엔진의 불협화음과 바퀴의 소음이 멈추자 더욱 명확하게 들려오는 감동의 소리. 그 자동차를 운전하던 ECM(Edition of Contemporary Music)의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 씨는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소리의 주인을 수소문했다. 그는 러시아의 변방 국가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아르보 파르트Arvo Part였고, 1984년 아르보 파르트의 <타불라 라사Tabula Rasa>가 세상에 나오면서 ECM 뉴 시리즈의 새 지평을 열었다. 1969년 ECM을 설립해 40년이 흐른 지금까지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Keith Jarrett, 칙 코리아Chick Corea, 섹소포니스트 얀 가르바 레크Jan Garbarek, 재즈 기타리스트 팻 매스니Pat Metheny 등 전 세계 재즈 팬이 “동시대에 사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는 극찬을 보내는 뮤지션을 발굴하고 1천4백여 장의 앨범을 직접 프로듀싱한 만프레드 아이허 씨는 재즈 역사의 ‘살아 있는 유산’. 유럽과 미국의 수많은 시상식에서 올해의 프로듀서상을 수상했으며, 스웨덴・에스토니아・노르웨이 왕에게서 명예 작위를 받았고, 현대 음악 발전에 기여한 명사로 브라이튼 대학의 명예 박사로 추대되기도 한 그의 프로듀싱 인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쓰이는 한 권의 재즈 역사서나 다름없다.
명반을 만들어내는 데는 아르보 파르트와의 일화처럼 우연히 들려오는 소리와 이를 지나치지 않고 마음을 기울여 듣는 과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차 안에서, 거리에서, 누군가의 집에서, 뮤지션과 함께 온 어떤 사람에게서 그를 감동시키는 찰나의 소리, 혹은 누군가와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찰나의 순간을 경험하며 ECM에 새로운 천재 음악가가 등장한다.


보이는 게 줄어들면 아름다운 음악을 눈으로 보듯 ‘명확히’ 듣게 된다. 최신 B&W 오디오와 암흑 공간이 음악에 집중하게 만드는, ECM 전시회의 음악 감상실 ‘Think of your ears as eyes’.


유망한 재즈 프로듀서, 정선 “ECM은 회사 자체만으로도 참 특별합니다. 설립자가 직접 프로듀싱하며 40년간 더 발전하고 유지해왔으니까요. 요즘같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정말 흔치 않은 일이죠. 오랫동안 같은 일을 하면 놀라운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세계의 많은 음반사가 합병되거나 인수되는 와중에도 40년간 독보적 존재로 제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직업윤리를 보여줍니다. 음악에 대한 만프레드 아이허 씨의 애정과 열정, 혜안과 천재적 직관이 이런 역사를 가능하게 했죠.” 지난해 가을, 젊은 프로듀서 정선 씨가 뮌헨의 ECM 본사에 합류한 것 역시 ECM의 거장 뮤지션들이 탄생한 과정처럼 만프레드 아이허 씨와 우연히 만난 것 때문이었다. 1968년 뮌헨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며 재즈 프로듀싱을 독학하던 가난한 청년 만프레드 아이허 씨는 우연히 한 재즈 음반 가게 주인의 지원으로 그 유명한 ECM의 첫 앨범 를 만들 수 있었다. 2011년, 뉴욕에서 베이스 기타를 전공하고 연주하던 청년 정선 씨도 재즈 프로듀싱에 관심이 많아 몇 년간 독학했다. 이를 알던 막역한 친구이자 베이스 기타 연 주가인 벤 스트리트Ben Street는 드러머 빌리 하트Billy Hart의 ECM 리코딩에 세션으로 참여할 때 스튜디오로 그를 초대했다. “벤은 제가 뉴욕에 사는 10년 동안 베이스 기타 연주는 물론 인생 전반에 대한 지혜를 준 가장 친한 친구예요. 벤이 연주하는 리코딩 스튜디오에서 아이허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무척 즐거웠어요. 그는 음악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좋아해서, 질문을 받으면 자신의 생각과 지식을 상세히 알려줘요. 그 후 아이허 씨가 뉴욕에 올 때마다 제게 전화를 했고, 1년 반쯤 뮌헨에서 같이 작업할 것을 제안받았어요. 제 인생 최고의 일이죠.”
모든 것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미국의 뉴욕과 전통・느림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유럽의 뮌헨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화려한 오디션을 보고, 전 세계에서 날아와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이는 데모 테이프를 듣고, 음반 시장의 흐름을 탐독하는 대신 뮌헨에서 하는 업무는 세상의 어떤 소리가 자신의 귀를 감동시키는지를 깨우치는 게 우선이다. 아이허 씨의 정의처럼, 프로듀서의 역할은 뮤지션의 고독을 종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뮤지션의 고독에 함께하는 것이고 특정 음악을 대할 때 선입견이나 태도를 갖지 않는 것, 또한 뮤지션의 마음을 한데 모아주고 그들의 역량을 가장 잘 표현하도록 돕는 것이기에. “문학을 알고 지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에 많지만 놀라운 직관을 가진 사람은 드뭅니다. 어떤 음악가를 선택하는 직관, 그 연주자의 놀라운 연주를 더 특별한 소리로 만들어내는 직관은 아이허 씨의 천재성이죠. 그래서 나는 달팽이가 되기로 했습니다.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그가 어떻게 상황을 다루고 대처하는지, 그의 작업을 듣고 보고 관찰합니다. 그러는 사이 저도 천천히 성장하겠지요. 천천히 움직이는 달팽이처럼요.”


“만프레드 아이허의 레코드 프로듀싱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예술이다”라는 아르보 파르트의 말처럼, 그 예술성을 동경하는 이들을 위해 지하 1층 전시실에서는 아이허 씨에게 헌사하는 특별 전시를 진행한다.


그가 사랑하는 유명인과 유망인 “한 번 녹음을 마친 후에는 귀를 날카롭게 하고 음악의 굶주림을 되찾기 위해 나만의 정지된 시간을 보낸다”라는 말에서 만프레드 아이허라는 프로듀서의 천재성이 하늘이 내린 재능에 귀를 날카롭게 하는 훈련이 더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날카로운 혜안이 정선 씨의 잠재력을 꿰뚫어보았다.
사실 정선 씨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음악을 명확히 듣는 훈련을 해왔다. 그의 아버지는 매일 새벽 5시면 어김없이 피아노를 연주했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외에 택시에서도 거리에서도 일평생 클래식 음악을 연구한 사람이었다. 삼형제 중 가장 반항심 많았던 그는 10대 중반에 거리에서 우연히 본 기타에 반해 록과 재즈를 연주하는 베이시스트가 된다고 선언했으며, 아버지는 세 아들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자유를 주었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정명훈, 세계인이 마에스트로라 부르는 지휘자 정명훈 씨다.
“아버지는 늘 새벽 4~5시에 일어나서 악보를 공부하고 피아노를 연주했어요. 매일 아침 아버지의 피아노 연주에 눈을 뜬 기억이 선명해요. 아버지가 제게 준 가장 큰 영향은 아마 직접적 음악적 재능이 아니라 ‘음악을 열심히 하는 태도’ 그것이었을 겁니다. 음악에 관한 한 제가 지금껏 살면서 아버지만큼의 하드 워커hard worker를 본 적이 없어요.”

클래식에서 록과 재즈로 장르만 바뀌었을 뿐 정선 씨도 살아오면서 음악 듣기를 멈춘 적이 없다. 알든 알지 못하든 그의 귀는 어려서부터 좋은 음악을 알아듣는 귀로 날카롭게 단련되었고, 반항심이 충천한던 베이스 기타 연주자 시절 정명훈의 아들이 아닌 ‘연주하는 정선’으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남보다 치열하게 연습했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부단한 걸음으로 바다를 향한 길목까지 온 달팽이가 아닐까. 찰나의 순간에도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포착하는 천재적 직관을 지닌 아이허 씨가 그를 지명해 뮌헨으로 부른 데도 달팽이 집 밖으로 채 나오지 못한 이 응집된 내공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는 정명훈’이라는 정선 씨만의 비밀 정보를 최근에야 전해 들은 아이허 씨가 “흥미롭다”라는 코멘트를 한 것 역시 자신의 직관이 포착한 정선 씨의 재능에 남다른 뿌리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리라.

바다 앞까지 다가간 달팽이의 내공은 그가 사랑하는 아내이자 재즈 보컬리스트인 신혜원 씨에게도 일찌감치 전해져 정선 씨가 프로듀싱하고 신혜원 씨가 노래한 첫 재즈 앨범으로 2011년 미국 그래미 어워드의 ‘라틴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다. 2011년 늦가을 피아니스트 아론 파크스 Aaron Parks의 앨범을 녹음하러 간 곳의 음향이 탁월해 재미 삼아 녹음한 신혜원 씨의 노래를 우연히 들은 아이허 씨의 요청으로 신혜원 씨는 ‘섬집 아기’ 등의 동요와 즉흥곡 열세 곡을 녹음하며 ECM 40년 역사상 첫 한국인 연주가가 됐다.
또한 평생 새벽 5시면 피아노 연주를 연습했으나, 지휘자가 되어 정작 자신의 피아노 솔로 음반을 낼 생각을 하지 못하던 아버지를 석 달간 설득해 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 녹음을 마쳤다. 매일 아침 세 아들의 잠을 깨우던 아버지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아버지가 선택한 슈베르트, 슈만, 쇼팽, 드뷔시, 모차르트의 소품 위주로 구성해 올 12월 발매한다. 정선 씨가 ECM에서 프로듀싱한 첫 번째 앨범으로, 아버지가 평생 아침마다 얼마나 열심히 피아노 연습을 해왔는지를 아는 아들이기에 그의 연주가 가장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공간과 소리를 더해 예술의 새로운 탄생을 이끌어내는 산파 역할을 누구보다 잘할 수 있었다.


만프레드 아이허 씨는 앨범 재킷을 ‘음악을 위한 초대장’이라고 했다. 하지만 고요함, 적막성, 형체를 알 수 없는 사물과 길, 나무, 바람 등이 등장하는 ECM의 앨범 재킷은 그 자체로도 음악만큼이나 예술성이 뛰어나다. 지하 2층 ‘풍경과 마음’ 전시실에서 음악을 느끼는 정선씨. ECM의 한국 전시는 11월 3일까지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린다.

한국에서 ECM의 음악을 듣다 정선 씨가 ECM의 정식 프로듀서가 된 지난해 12월, 뮌헨의 명소인 뮌헨 하우스 데어 쿤스트에서 ECM의 역사를 회고하는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뮤지엄에 새로운 관장이 취임하면서 뮌헨의 문화 아이콘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열기를 원했는데, 40여 년간 뮌헨은 물론 전 세계의 독보적 재즈 레이블로 특별한 존재감을 유지해온 ECM이 가장 적합했던 것.
평론가들에게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라는 찬사를 받는 ECM의 아름답고 특별한 음악을 한국에 소개하고자 연주가들의 내한 공연을 기획하던 정선 씨는 음악은 물론 사진, 영상, 회화까지 포함하는 ECM의 예술성과 전통성을 소개할 수 있는 이 전시가 한국에도 소개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인사동의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전시는 만프레드 아이허 씨와 ECM 음악의 오랜 팬인 전시 기획사 대표 김범상 씨가 아이허 씨에게 헌정하며, 뮌헨 하우스 데어 쿤스트의 전시와는 다른 새로운 틀로, 갤러리의 네 개 층을 대관하는 대규모 전시로 기획했다. 전시 기획자의 프로듀싱을 아이허 씨와 정선 씨는 연주자처럼 따랐고 최선으로 음을 내듯 최대한 자료를 내주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전시실은 지하 4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가장 처음 만나는 공간이에요. 어두운 방, 음악과 빛과 바람 같은 패브릭이 소리의 공간을 유영하며 ‘새로운 시작 (New Beginning)’을 여는 이곳은 ECM의 음악이, ECM의 예술성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느끼게 해줍니다.”
정선 씨의 설명이다. 그러면 음악은 어떻게 전시되는가. 오래된 것을 소중히 여기는 유럽의 문화, 투명한 사운드, 느림과 여백으로 수식되는 ECM의 음악은 소리・공간・음악・뮤지션이라는 요소로 완성된다. 우연히 들은 소리를 찾아 유럽 주변부를 부단히 여행한 아이허 씨는 노르웨이의 색소폰 연주자 얀 가르바레크에게선 노르웨이의 겨울 숲이 떠오르는 유령처럼 미세한 소리를 가려내고, 공산주의의 패기가 넘치던 폴란드의 색소폰 연주가 토마스 스탄코에게선 집어삼킬 듯 씩씩한 소리를 뽑아냈다. 유럽 주변부를 여행할수록 재즈의 지리적 경계가 한층 넓어졌고, 미국식 재즈가 아닌 연주가 자신의 뿌리와 전통의 토양이 투영되는 유럽적 정취가 재즈에 가미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ECM의 음악을 ‘유러피언 재즈’라고 부른다.

미국식 재즈가 풍물이라면 유러피언 재즈는 풍경이다. 미국식 재즈 앨범은 연주가의 인물 사진이나 스케치를 우상처럼 보여주는 데 반해, 유러피언 재즈의 앨범 재킷은 추상적으로 해석한 도형이나 풍경을 선보인다. 미국식 재즈 앨범이 연주 곡목을 알리는 팝아트적 서체를 자랑한다면 유러피언 재즈 앨범은 최소의 타이포그래피가 풍경 속에 숨어든다. 느림과 여백이라는 삶의 풍경을 연주하는 것, 그 가치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이 바로 ECM의 음악이다. 그것이 곧 예술이다.

글 김민정 기자 | 사진 박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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