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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나의 살던 집은
서울시 종로구 평동・교남동・송월동 일대 6만 6백여 평의 오래된 주택 단지에는 곧 돈의문 뉴타운이 조성될 것이다. 재개발의 깃발이 휘날리며 철거된 이 동네엔 거미줄이 얼기설기한 빈집과 패잔병처럼 나뒹구는 세간들만 남아 있다. 잡다한 삶이 떠나간 이 마을에서 사진가 박기호 씨가 낯익은 추억들을 끄집어냈다. 불과 한 해 전에 철거된 추억이지만 아주 오래 전의 일인 듯 가슴을 아련하게 매만지 는 추억. 한때는 누군가의 아니 우리의 전부였을 부러진 것, 조각난 것, 찢어진 것들...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




내 살들이 자라난 이 집, 곳곳에 스며든 그리운 기억이 문지방을 넘는다. 만나식당 과부 아줌마와 동사무소 주사 장 씨의 사랑하는 틈바구니에 봉제 공장 다니는 김 씨가 공연히 끼어든 이야기를 속닥이던 우리 양친, 때마다 고봉밥을 다 비우곤 사약 같은 보약 한 사발 털어 넣으며 “늙으면 어서 죽어야지” 장단처럼 되뇌던 여든두 살 할머니, 피곤을 묻혀 온 외투를 저녁마다 털어대던 아버지, 들창 사이로 사랑을 속삭이던 문간방 미스 김과 그 애인…. 관절을 편안히 푼 빈집이 들려주는 내 기억들. 이가 빠진 마루, 기다리다 지쳤는지 빛바랜 얼룩으로 누운 원앙금침이 들려주는 옛 시간들. 적막이 무장무장 쌓이는 빈집에서 새살 돋듯 내 기억이 스멀거린다.


새해엔 넓은 집으로 이사할 거라던 우리 엄마. 벼룩처럼 뛰어오른 집값에 혀 끌끌 차시더니 이사 대신 장롱을 바꾸고, 주말 연속극이 잘 나오지 않는 TV를 들여놓고, 누런 벽지 위에 꽃무늬 벽지를 덧발랐다. 서툰 도배로 꽃무늬가 자꾸 어긋나고 쭈글쭈글 오그라들어도 방 안엔 꽃들이 피어 수천수만 송이로 나풀거렸다. 그 꽃 잔치 속에 엎드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읽으며, 눈썹이 기름한 동급생 남자아이를 떠올리곤 얼굴을 붉혔지. 이즈음부터 가끔 대들다 방문을 세게 닫았다는 이유로 손바닥을 맞았고, 친구들이 들창가에 와서 이름 부르면 엄마 몰래 놀러 나가곤 했지.


여덟 자짜리 장롱 하나 들어가던 이 방에서 우리 양친은 물새 같은 아이 둘을 업어 길렀다.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는지 제 혼자 울고, 웃고, 먹고, 싸고, 홍알홍알 옹알이하는 아이를 품으며 인생은 참말로 무상 증여 같다고, 이렇게 흥미진진한 공짜 체험이 또 어디 있겠나 생각하셨다지. 그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린놈이 이 험한 곳에 겁도 없이 나와 애쓴다는 생각에 마음이 짠해지기도 하셨다지. 그렇게 하루하루 자란 아이의 돌잔치 날, 얼마나 조촐하고 어설픈 상을 차려주었던지 내내 면구스러우셨다지. 그래도 그 애는 임금님 딸처럼 눈부시게 웃었다지.


동네에서 제일 처음 입식 부엌 만들었다고 자랑하시던 우리 엄마. 연기 한 오라기 없는 입식 부엌, 방보다 낮은 그 부엌에서 때마다 옥양목 앞치마 반듯하게 두르고 두레상을 차리셨다. 허리께를 꼭꼭 묶은 열무 두 단 풀어 헤쳐 김치 담그고, 뚜벅뚜벅 무 썰어 국밥 한 그릇 말아 오셨지. 엄마 손가락을 타고 혀에서 버무려진 그 냄새, 비에 홀딱 젖은 나를 맞이하던 젖무덤 같은 냄새. 부엌 문을 넘어 안방 문지방을 넘어 안개처럼 스며들던 냄새. 그 냄새에 홀려 날마다 밥 한 그릇 뚝딱 먹어치우곤 했지. 나는 오늘도 당신이 차려주시던 마음 한 상이 그립다.


종로구 평동·교남동·송월동 일대는 언덕에 자리 잡아 지하가 2층이 되기도, 2층이 1층이 되기도 하는 독특한 주택들이 자리한 동네다. 집의 지하방에서 창문을 열면 다른 집의 지붕이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이 동네엔 일본식 적산 가옥, 한국전쟁 이후 지은 한옥, 1970~1980년대에 지은 양옥집이 즐비하다. 늙은 골목들을 ‘뉴타운’으로 갈아엎는 요즘 유행에 따라 곧 사라질 이 동네를 산책 코스로 오가던 사진가 박기호 씨. 그에게 이번 작업은 어쩌면 숙명 또는 사명이었을 것이다. <타임TIME> <포천FORTUNE> 등의 한국 파견 사진기자로 노무현 대통령과 기업인 이건희 씨 등 한국의 유명인을 촬영했고, 상업 사진가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돌연 공부하기 위해 도미한 후 처음 연 전시가 Everything Must Go였다. 경기 침체로 폐업한 미국 상점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부의 몰락, 드림랜드의 몰락’이라는 메시지를 전한 그가 이번엔 우리의 ‘뉴타운’을 찍은 것이다. 이번에도 그는 선동과 비판으로 가득 채운 것이 아니라, 전작들처럼 버려진 물건에서 삶의 흔적을 발견해냈다. 그만의 그 그립고도 따뜻한 숨결은 아마도 조만간 근사한 전시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글 최혜경 | 사진 박기호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