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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여 들어보니] 가수 한대수 씨 돌아온 행복나라 망명객
일찍이 ‘행복의 나라’로 간 줄 알았던 사람이 돌아왔다. 암울하던 시대,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희박해지는 자유를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경고한 그가 다시 돌아왔다.


‘선생님’이란 칭호 대신 ‘한대수 할아버지’라 부르라고 말하며 호방한 웃음을 쏟아내던 한대수 씨. 블루스와 포크록 사운드가 흥겨운 ‘누크 미 베이비’로 7년 만에 돌아온 그는 여전히 가슴에 자유를 품은 우리의 영원한 히피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여긴 그가 ‘장막’ 너머 ‘산들바람’과 동행하지 않고 다시 이 땅에 내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환갑이 되면 태국 꼬사무이에서 음악과 맥주를 즐기며 한가로운 노년을 맞이하고 싶었다는 사람, 그러나 그이는 지금 서울 한복판에서 알코올의존증으로 치료 중인 아내와 늦둥이 딸을 데리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고 있다. 그는 이것을 ‘업보이자 십자가’로 여기며 자신의 처소를 ‘행복이 달아난 집’이라 부른다. 여기까지만 보면 날개 꺾인 새처럼 추락한 모습이지만, 자세히 보면 수상한 점이 있다. 비극의 주인공이라기엔 두 눈에 생의가 가득하고, 호탕한 웃음과 유머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이의 삶 속 희극의 외피 속엔 어떤 비극이, 비극의 외피 속엔 어떤 희극이 숨어 있을까?

‘대한민국에 모던 포크와 록 시대를 연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사랑과 평화를 열망하는 한국 최초의 히피이자 마지막 히피’로 불리는 사람, 유신 시절 어느 날 갑자기 청바지와 장발에 통기타를 들고 나타나 충격을 안겨준 사 람,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 ‘바람과 나’ 등을 발표하고 검열 대상이 되어 미국으로 쫓기듯 사라진 사람, 오래도록 가수는 없어도 노래는 살아 팬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사람. 10여 년 전 다시 돌아와 이 땅에 정착한 전설적 가수 한대수 씨를 청담동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여섯 살배기 그이의 딸 양호가 동행했다. 10여 년 전 그를 만난 적이 있는 나는 깜짝 놀랐다. 10년의 세월이 얼굴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양호’한 모습이었다.


양호가 벌써 여섯 살이 됐다. 옥사나 씨의 이국적 외모와 한대수 씨의 강단 있는 눈빛을 고스란히 닮은 양호를 그는 신의 선물이라 말한다.


사람은 미니멀리스트로 살 수 있다. 간단하게 먹고 최소한의 공간만 있으면 된다. 나는 아주 간소하게 산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2005) 중에서

이 정도면 ‘양호’합니다! “치렛말 아니고 10년 전보다 더 젊어 보입니다. ‘장어 효과’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수온과 먹이를 최적 상태로 해주는 것보다 천적인 장어를 한 마리 넣어두면 관상어들이 훨씬 더 건강하고 생기 있게 산다는 것이죠. 선생님의 얼굴은 단연코 ‘양호 효과’인 듯합니다.” “아하하하, 맞아요. 양호가 바로 장어입니 다. 수시로 제 엉덩이를 걷어차죠. ‘빨리 나가서 돈 벌어 와’ 하고 말이죠.”
그의 일상은 한마디로 ‘양호 중심’이다. 아침 7시 반에 양호를 유치원에 맡기고 국밥 한 그릇을 사 먹고 방송국으로 간다. 오전에 생방송을 마치기 무섭게 집에 돌아온다. 요리를 해서 아내와 함께 점심을 먹는다. 몽골계 러시아인 아내 옥사나 씨에게는 치즈버거나 불고기를, 자신은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먹는다. 오후 4시에 유치원으로 가서 양호를 데려온다. 하지만 이제부터 또 다른 일과가 시작된다. “그때부터가 전쟁이지요. 책도 같이 읽고, TV도 함께 보고, 숨바꼭질이나 가위바위보를 합니다. 양호는 밤 12시쯤에나 잠이 들어요. 나는 다른 아버지들하고는 완전히 거꾸로 삽니다. 대개 50대가 되면 아이들 공부도 마치고, 예순에 손주도 보면서 자유 시간을 보내는데 나는 쉰아홉 살까지 자유를 누리다가 이렇게 됐어요. 와하하, 완전히 거꾸로 삽니다. 그런데 나만 이런 건 아닙니다. 프랑스 가수 이브 몽탕, 그는 예순일곱에 애를 낳고 칠십에 죽었어요. 공자 아버지도 환갑이 넘어서 공자를 낳았고요. 그러니까 우리 삼총사 양호하죠? 으하하하.”

“대개 10대나 20대 초반에 사고를 치는데 선생님은 육십에 사고(?)를 치셨어요. 굳이 좋은점을 꼽자면 젊은 아빠들과달리 따님과 종일 교감한다는 점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20대나 30대는 제일 정신없는 나이거든요. 내 집 마련하고, 직장에서도 자리 잡느라고 아이와 제대로 눈 마주칠 겨를이 없지요.” “환갑 즈음에야 첫딸을 얻으셨는데, 기다리셨나요?” “양호한테는 미안하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어요.” 자유를 추구하던 그이는 젊은 시절부터 아이 낳을 생각이 없었단다. 그러나 막상 양호가 잉태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하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양호야 양호야’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며 딸의 출생을 기다렸다.

“양호의 출생을 계기로 저는 B.C.에서 A.D.로 넘어온 것 같아요. 나이 육십에 자본주의를 깨달았어요.” 아이가 생기자 덜컥 겁이 났다. 늦은 나이에 본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다른 아버지들과 달리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 동안 딸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었다. 평생 저축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온 그이였다. “아이가 생긴 것이 반갑지만 화폐가 필요하구나 생각했어요. 음악도 피크가 있고 내리막길이 있는데, 저는 피크에서 내려오고 있었어요. 무얼 할까? 이탤리언 음식점을 할까도 생각했어요. 제가 파스타를 잘하거든요.” 누구든 제가 먹고살 숟가락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던가? 양호가 태어나던 해부터 아리랑 국제방송에서 <골든 구디스Golden Goodies>를, 2007년부터는 CBS 라디오에서 <손숙ㆍ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를 진행하면서 호구지책으로 삼았다.

아내와 딸은 신의 선물 뉴욕에서 증권회사에 다니던 미모의 아내 옥사나가 알코올의존증으로 치료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방송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아주 통이 큰 대륙의 여자, 그야말로 칭기즈칸의 후예입니다. 이해력이 좋아 무슨 일이든 정확하게 조언해주는 훌륭한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사랑에 빠졌죠.” 그러나 그녀와 알코올이 만나면 빛나던 태양은 구름 속에 모습을 감추고 만다. 치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그이는 유전적 요인도 있을 거라고 본다. 그녀의 집안에는 부모, 고모, 삼촌 모두 알코올로 일찍 세상과 결별했다.
“제가 몇 년 전에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았어요. 내가 거기 나오는 예수 같아요. 예수가 어제도 맞고 오늘도 맞고 계속해서 맞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잖아요. 제가 꼭 그래요. 대수는 예수의 친구다. 아하하하, 내가 고통스러울 때마다 그 장면을 떠올려요.” 알코올의존증 아내와 늦둥이 딸은 한없이 창공으로 날아가려는 풍선 같은 그를 지상에 잡아두는 무거운 추가 되었다. 하지만 평생 갖지 않으려던 아이가 태어나자 신의 선물로 받아들인 것처럼, 알코올의존증 아내에 대한 사랑도 변함없다. “드물지만 기적처럼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끝까지 함께할 겁니다. 결혼할 때 목사가 물었어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끝까지 함께하겠는가?’ ‘네’ 하고 대답했지요.” “누구나 대답하지만 이혼할 때는 까먹는 말이지요.” “아내에겐 나 하나뿐입니다. 돌아갈 곳이 없어요.
마누라와 양호를 보살피는 것, 죽을 때까지 나의 책임입니다. 아, 이런 지옥 속에서도 양호는 매일같이 큰다는 것,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의 삶은 출생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순탄한 적이 없다. “환경은 비할 수 없이 좋았지요. 그러나 고독은 말도 못했습니다.”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춘다면 그의 할아버지 한영교 박사는 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낸 분이다. 아버지는 핵물리학자,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인 이른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미국으로 유학 간 아버지가 오랫동안 실종되면서 그이는 남다른 굴곡진 인생을 살아야 했다. 미국에 가면 ‘칭총(중국인을 비하하는 말)’, 한국에 오면 ‘양키’라는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다.
“경계인이었죠. 어찌 보면 자유로운 측면도 있지만 자유에는 꼭 고독이 따르는 법이죠. 저는 항상 소속이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친구를 사귀었는데 미국 가면 없어지고, 미국에서 사귄 친구가 한국에 오면 없어지는 식이었지요. ‘나는 누구인가?’ 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죠. 음악과 글은 그 질문의 결과물입니다. 위대한 아티스트들을 보면 엉뚱한 곳에서 꽃을 피우곤 합니다. 바이런도 이탈리아에 가서 작품이 좋아졌잖아요. 베토벤도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와서 작품이 안정되었고요. 그러나 경계인의 삶은 창작에는 좋은 비료지만 생활에는 지옥입니다.”
“불행하지만 예술가로 이름을 남기거나, 이름 없지만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 가운데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후잡니다. 나는 가수를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에요. 음악을 한 것은 너무나 현실이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제가 계곡에 손톱만 박고 매달려 있었어요. 떨어지면 죽어요. 그래서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춘다면~’이라고 노래했죠.” ‘행복의 나라로’는 그가 열여덟 고등학생 때 지은 노래다. 오랫동안 실종된 아버지를 미국에서 만났지만 기대하던 따뜻한 교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대수 씨가 친필로 적은 노래 ‘또 가야지’의 가사. 1974년에 발매한 1집 앨범 <멀고 먼 길>에 수록된 노래다.


나는 늙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울면서 세상에 나왔고, 울면서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나 자신의 비극을 두고 실컷 웃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2005) 중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꿈꾼다 “어느 날 맨해튼에서 롱아일랜드로 기차를 타고 갈 때였습니다. 들판은 넓고 하늘은 푸른데 나는 왜 이리 슬픈가. 1960년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자였어요. 우리나라는 최고 가난뱅이 나라였죠. 양쪽을 오가면서 느낀 생각을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장막을 거둬라’ 장막이 뭡니까? 남과 북을 가로막고 있는 철의 장막이죠. ‘창문을 열어라’ 창문이 뭡니까? 우리를 가두고 있는 좁은 관념의 문을 이르는 겁니다.”
“개인의 내면 고백이 아니라, 고국이 처한 현실을 노래한 거네요.” “그렇습니다.” “지난해 발표하신 전자 책 <우리는 왜 불안한가?> 잘 보았습니다. 물가 상승, 자살률, 일자리, 전세 대란, 월가 시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을 주제로 다루고 있더군요. 대중 가수가 이토록 주밀하게 사회 문제에 촉수를 세우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했고, 오펜 하이머가 핵무기를 만들었고, 히틀러가 독일을 통일시켰지요.”
“영향력 있는 한 개인이 되고 싶으셨나요?” “그래요. 하지만 양호한 쪽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싶었어요. 저는 인간이 악하게 태어났다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세계를 끊임없이 주시하고, 악한 인간을 선한 쪽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티스트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지요. 두발동물은 네발 동물보다 나쁩니다. 우리가 두 발로 서니까 두 팔이 남았지요? 그걸 좋은 쪽으로 써야 하는데 나쁘게 쓰고 있습니다. 보세요. 지구가 점점 살 수 없게 되어가고 있어요. 왜 오늘 날씨가 이렇게 덥겠어요? 두발동물이 초래한 지구온난화 때문 아닙니까?”

두 팔의 자유는 인간이 받은 창의성이라는 선물인데, 그걸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질투가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질투 때문에 지나친 경쟁이 나타나지요. 교육도 질투의 힘입니다. 옆집 애보다 더 잘하기 위해 학원에 보내고, 더 비싼 학교에 보내고, 외국인 학교에도 보내지요. 두발동물이 질투를 컨트롤하지 못하면 네발동물보다도 못하게 됩니다.”
“소유와 질투가 가장 잘 작동하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지요. 선생님의 책을 보니까 자본주의에 인 본주의를 더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꿈꾸고 계시더군요.” “마르크스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가 생각하지 못한 것은 인간의 질투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평등할 수가 없어요. 질투 때문에 두발동물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사랑의 질투, 돈의 질투, 형제 사이의 질투…. 우리는 왕조주의, 봉건주의, 공산주의를 경험했고, 지금은 자본주의인데 끔찍한 자본주의가 가장 성공적입니다. 내가 마누라 때문에 모스크바에도 다녀왔어요. 기본적으로 그 사람들은 게으릅니다. 모든 게 똑같이 주어지니까 적당히 일하고 보드카를 마셔요. 그렇게 게으르니까 창의성이 없어요. 미국에서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게 있잖아요. 내가 비록 지금 접시닦이를 해도 10년 뒤에는 저 음식점을 내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꿈을 꾸지요.”
“좋은 의미의 꿈과 나쁜 의미의 욕망이 함께 있지요.”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자본주의가 가장 성공적이죠. 중국을 보아도 코뮤니즘이 아니라 가장 자본주의적 체제로 접근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자본주의가 군림하겠지만, 인본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만이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꽤 오랜 촬영 시간에도 투정부리지 않고 아빠를 기다리던 양호 양. 딸 양호는 한대수 씨의 삶에 근원적 에너지다.

사랑하는 양호에게! 나는 이 지구를 걷지 않고 있더라도 항상 네 곁에 있다. 걱정 마라. 하늘을 쳐다보면 내가 웃고 있을 것이다. <뚜껑 열린 한대수>(2011) 중에서

누크 미 베이비! “선생님께서는 최근, 7년 만에 ‘누크 미 베이비Nuke Me Baby’라는 신곡을 발표하셨습니다. 이 곡을 쓴 계기가 있다면요?” “지금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핵 아닙니까? 미국과 유럽에서는 반핵 운동이 활발한데 우리나라하고 일본만 관심이 없어요. 핵은 지구를 파멸시키는 겁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가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지구의 파멸자가 되었구나!’ 하지만 우리는 히로시마를 경험하고서도 핵실험을 멈추지 않았지요. 핵폐기물을 땅속에 묻고 있는데 그게 5백 년 갈지, 1천 년 갈지 아무도 몰라요.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만지고 있습니다.” ‘누크 미 베이비’는 핵에너지 사용 반대 메시지를 담은 음악이다. 무거운 주제지만 가사 속 핵은 마치 ‘팜 파탈’ 같다. 치명적 파멸의 눈빛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내용은 심각하지만, 가사는 재미있습니다.” “발전소를 없애자, 핵무기를 없애자, 설교적으로 말하면 아무도 안 듣죠.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말인데 풍자적이죠.”

유머가 곧 구원입니다 “‘행복의 나라로’와 ‘물 좀 주소’는 1970년대 노래인데도 지금까지 호소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행복의 나라에 이르지 못한 반증이겠지요. 인류의 미래에 대한 비극적 전망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비결은?” “코미디의 심연은 비극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찰리 채플린도 비극적 사람입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유명해졌지만 공산주의자로 몰려 추방당하죠. 코미디언도 무대에서는 웃기지만 집에서는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유머 없이는 살 수 없어요. 날마다 예수하고 대수하고 회초리로 얻어맞는데 구원은 오직 유머뿐이죠.”
새들이 창공을 나는 것은 우주 밖으로 탈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더 맑은 물과 맛난 열매가 있는 이 땅에 되앉기 위한 것이다. 나는 그이가 꿈꾸던 ‘행복 나라’가 초월적 유토피아가 아님을 깨달았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이유로 끊임없이 간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처럼 그이는 인간이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 세계를 환기시킨 죄로 ‘노래하는 형벌에 처해진 프로메테우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통을 비명이 아니라 노래로 부르는 자를 처벌할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가 삶을 벗어날 수 없다면 때론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이 가장 높은 비상인지도 모른다. 달팽이는 하늘을 방황하지 않고도 이미 땅에 도달해 있지 않은가? 나는 그이가 혼자만의 세상을 떠메고 ‘행복의 나라’로 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단독 망명이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 그의 노래를 부르며 위무받고 있지않은가? 나는 그가 꼬사무이에서 한가로이 맥주를 마시는 것보다 양호와 함께 숨 가쁘게 숨바꼭질하는 게 여간 고소하고도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다.

글 반칠환(시인) | 사진 민희기 | 담당 신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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